Lifestyle Essay 020 | 삶의 공기

in #kr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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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로서의 공기가 아닌, 삶의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공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시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공기라는 존재는 온도와 냄새, 밀도 같은 것들로 일상의 기류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미묘한 기류의 변화가 사소한 감정을 좌지우지하며 일상의 균형을 끊임없이 흔들어댄다.




뿌연


서울에선 하늘이 뿌옇거나 달이 선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미세먼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회색빛 공기를 한탄스럽게 바라보며 집안의 창문을 꼭꼭 걸어 잠근다. 달의 빛 번짐도 다 먼지의 탓인 것만 같고, 흐릿하게 보이는 도시의 풍경도 아쉽기만 하다. 문을 여는 순간 보이지 않는 이물질들이 나의 피부에 묻어나고 내 폐 속으로 흡수될 것 만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기차의 창가에 앉아 아침의 뿌연 안개를 실로 오랜만에 마주했다. 이 하얀 흐릿함은 앞이 더 캄캄할지언정 수분을 가득 머금은 맑음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순간 깨달았다. 고속도로에서는 골칫덩어리이기도 했던 안개가 도시의 텁텁한 미세먼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어딘가 묘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재난문자가 발송되고 마스크 없이 외출하는 것이 찝찝해지는 일상은 맑은 안개마저 이물질 덩어리로 보이게 만든다. 사람들이 바라본 것들이 그 순간에 정확이 어떤 성분과 요소가 만들어낸 공기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모두가 확신한다. 먼지 구덩이 속에 살고 있음을.






지하철에서


택시도 버스도 기차도 아닌 유독 지하철만이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대중교통이다. 그래서인지 지하철은 아주 인적이 드문 시간에 한강을 지나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단한 출퇴근 시간의 인구밀도를 떠올리게 한다. 매일 아침 사람들로 채워진 빽빽한 지하철에서 손잡이에 매달린 팔에 온몸을 의지한 채 몇십 분을 보내고 나면, 진이 빠지도록 피곤이 몰려와 안 그래도 가기 싫은 발걸음이 더 느려지곤 했다. 어느새 그 일상에서 빠져나와 살다 보니, 가끔 마주하는 지하철은 늘어진 시간의 속도에 대한 탄력을 회복하게 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오래된 지상 전철역이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닥까지 물이 들이쳤고,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배차 간격이 뜸해지곤 했다. 특히나 겨울엔 발을 동동 굴리며 전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지하철 역사 안이었다면 따뜻하게 기다렸을 거라는 상상을 여러 번 하면서도 더 추운 건 마음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와 나의 현실이 이 모든 지상 전철역에 담겨있는 듯한 기분이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지곤 했다.

여행지에서 모노레일을 발견하면 놀이공원에 온 것 같은 기대감과 설렘이 생기곤 한다. 육교 위에 가만히 서서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장면을 영상으로 담기 위해 꽤 오래 기다린 적도 있다. 좋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맨 앞자리를 놓치고 나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꼬마 아이를 부럽게 바라본 적도 있다. 그러다 문득, 밖을 내다보기 좋은 전철이나 모노레일이나 뭐가 다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온도가 그것을 한없이 따뜻하게도 했다가 차갑게도 만드는 것이다.






날씨


겨울엔 움츠려 드는 어깨만큼이나 어두운 마음들이 쉽게 엄습하고, 화창한 날엔 가벼운 발걸음만큼이나 모든 게 여유 있는 태도로 변하게 된다. 그만큼 날씨가 지닌 온도와 일조량, 풍량 따위들은 우리의 기분에 많은 영향을 준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이 되면 사람들의 표정에서 옅은 미소가 발견되고, 여기저기서 북적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온 세상이 나만 빼고 행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벚꽃엔딩의 시절을 달가워하지 않기도 한다.

타인이 가진 삶의 속도와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날씨도 계절의 날씨만큼이나 쉽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휩쓸려버리게 만든다. 누군가의 밝고 좋은 에너지가 주변에게 나누어져 또 다른 시너지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우울한 기운이 삽시간에 번지듯 물들기도 한다. 심사가 뒤틀린 누군가는 안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고도 의기양양하게 뿌듯한 미소를 띤다.






사소한 이야기들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줄 때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불안하고 약해진 마음엔 그저 단편적인 자기 위안으로 끝맺음되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실제 기온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체감 온도'가 마치 서로가 각기 다르게 느끼는 '삶의 공기'와 닮아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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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motionalp님

오늘도 미세먼지가 장난 아니네요ㅠㅠ그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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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낯설게 대면하는 P님의 에세이 잘 읽었어요.
전 어린 날 저녁 안개가 낀 근처 하천을 엄마와 운동삼아 산책하며 이토록 안개가 근사하고 멋진 거구나라고 기억했는데
요새는 미세먼지때문에 '안개'가 두려워졌어요. 아니 '안개'란 날씨가 제겐 지워지고 있죠.

지하철과 모노레일, 결국 그 공기를 다르게 체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제 안의 온도 때문이겠지요.

언젠가부터인가 억지로 밝은 척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좋은 기운을 발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조금이나마 따스했으면 좋을테니까

어떤 감정이 들면 그냥 그걸 충분히 느껴야 털어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우울함이나 뭐 꿀꿀함같은 것들도요. 고물님의 온도가 좀 더 따스해지길! ㅎㅎ :)

맑은날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날씨에 따라 사람들의 에너지도 많이 변하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요즘 아이들은 하늘을 회색으로 그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맑은 하늘이 간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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