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의 명문없는 100만 민간인 학살의 실체

in #kr6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좋은이웃 @chipochipo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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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바로 625발발 68주년이 되는 날이였네요.
우리는 대개 6.25전쟁을 남한 vs 북한의 대규모 군사적인 충돌정도로만
알고있는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연합군들까지 합쳐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있었으니
많은수의 군인들이 죽어나간것은 당연하다 쳐도 민간인들이 왜 그렇게
명분없는 죽임을 당한것에 대해서는 정부가 의외로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에 나서지 않는게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도올 김욕옥 선생님의 동아시아 30년 전쟁사 강의를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6.25 전쟁이라는것이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어느날 갑자기 터진
침략전쟁이 아니라는걸 받아들이면 민간인 학살도 결국 그 프레임안에서
어떻게 일어날수밖에 없었는지 실마리가 풀릴수 있겠죠.

그 원인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1.한국전쟁이 나기도 전에 이미 '작은 전쟁' 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미군정과 정부를 수립하려는 이숭만세력에 대항하는 국민적 저항의 중심은
평지를 떠나 산으로 진지를 옮겼고, 전쟁이 나기도 전에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작은 전쟁’의 평지판, 도시판은 파업과 쟁의, 폭력과 테러와 암살의 연속이였죠.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 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김두환이 우익 선봉장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나오죠.
드라마에서는 좀 미화한 감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좌익들을 죽창등으로 잔인하게
때려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국민들의 저항을 누르고자 했던 이승만과 친일, 친미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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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의 저항을 누르고자 1948년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1949년에는 친일파 청산기구인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좌익 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여
준군사조직으로 만들었죠.

다시말해 준전시 병영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전쟁기 남한 지역의 민간인학살 (ex.보도연맹) 은 국민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승만 정부와 자신들의 동아시아 전략에 입각하여 이승만 정부를 주무르고 있던
미국의 정략적 판단의 산물인 셈이였죠.


3.학살자들이 친일파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미군정을 중심으로 친미파가 폭넓게 형성되었고,
친미파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죠.
미군정과 이후의 미 군사고문단, 전쟁 후 대한민국에 진주한 미군은
친미파를 내세워 자신의 걸림돌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최고위층은 대부분 친미파였고,
남한의 최고위층에서 학살 지시가 내려졌다는 증거는 적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미군은 직접 학살에 가담까지 했죠.
잘 알려진 노근리 사건, 곡계굴 사건말고도 미군 폭격에 의한 집단학살 사례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졌고, 부산 대구 대전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들도 확인되었습니다.


4.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6.25 전쟁은 오히려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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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전쟁은 최소한 한반도의 남쪽에라도 확고한 반공국가를 세워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과 정통성의 빈 곳을 메우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죠.
속성상 사람들을 ‘아’와 ‘피아’의 두 진영으로 갈라놓는 전쟁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들은 법을 무시한 채 조직적으로 제거했고,
승리라는 목표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걸림돌들은 무자비하게 치워 없앴죠.


5.죽인 자와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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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이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수가 적이 아니라
우리 군경에 의해 우리 국민이 집단학살 당했다는 점입니다.
전체 학살 중 미군, 국군,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와 비정규무장대에 의한 학살이
다수를 차지하고,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오히려 훨씬 적었죠.

당시 이승만 정권과 그 후견인인 미국이 다수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또는 묵인했다는 증거가 적지 않습니다.
이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반인도적 전쟁범죄이자 명백한 국가폭력입니다.
학살희생자는 국민보도 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좌익경력자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빨치산 활동지역 인근 마을 주민, 피난민, 우익 인사 등 사실상 국민 모두인 셈이죠.


6.전쟁 이후 살아남은 국민들은 ???


한 술 더 떠서, 체제에 순응할 것 같지 않거나 이질적인 존재들 중 일부를 제거하고,
남은 이들에겐 재갈까지 물리는 억압의 연속이였죠.
살아남은 국민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모두 맹목적인 반공주의자,
맹목적인 반공국가의 신민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이처럼 정치적 학살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극우반공체제는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졌습니다.
요컨대, 한국전쟁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대한민국이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극우반공체제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존재의 일부를 걸러내고
남은 국민들을 체제에 순치시켜가는 절차였다고 할수 있겠네요.


7.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


학살의 1차적 책임은 그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고 국민의 군대와 경찰과
그 위임을 받은 우익단체가 오히려 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 기간과 이후 미 군사고문단의 개입,
그리고 1950년 7월 초 작전지휘권이 미군에 넘어간 상황 등을 감안할 때
미군의 직접 학살은 물론 이 기간에 자행된 모든 학살사건에 대해서도
미국도 당연히 국제사회에 진상규명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민간인학살은 제네바협약에 반하는 전쟁범죄이며 국제법상으로도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됩니다.
전쟁은 없던 틈도 벌려놓는 속성이 있어서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고, 그 배후에는 이성을 잃어버린 국가권력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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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종전된지도 이제 6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당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잘못은 정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념비 같은것을 세워 묵념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이런 진상규명에 기반한 종전선언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초석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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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먹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진상규명을 하는것도 한계가 있는것이 막는자들이 있다는것이지요.. 꼭 피해자들이 다 죽고 힘없이 살아남은 분 1-2명이 있을때 즘이야 슬그머니 진실이 나오곤 한다는게, 너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덧붙이는 말이지만 65년이 지난 아직도 그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분들이 믾이 살아계시고 기득권층에 힘을 실어주다 나가리가 되어 결국 또 다른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계시지 그중에서도 태극기들고 광화문 질주하는 분들이 .... 이런 분들을 단순히 모지란 인간으로 볼 곳이 아닌 이런 역사의 한켠을 보내온 이들로 그럴 수 밖에 없는 인생인거라고 생각하며 가엽게 여길수밖에 없다는거네..

다시 그런 역사가 반복되는 일이 없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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