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자의 사진엽서│ 02 조절 가능한 불행에 대하여

in kr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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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의 사진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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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절 가능한 불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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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쓰고 있던 편지가 사라져 주말을 잘 지냈냐는 인사가 더욱 늦어졌어요. 꽤 공들여 쓴 게 아쉽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이야기를 꼭 써야 했을까 싶은 것들도 있었네요. 편지가 사라진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토요일에 차를 팔고, 어제저녁에 새로운 차를 사고, 주말에 의뢰받은 사진 촬영을 하고, 월요일과 화요일은 사진 작업을 하고 글을 쓰는 데 보냈습니다. 한 달 중 컨디션이 가장 좋지 않은 시기도 함께 견뎠네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 주의 중간 지점도 지나 있습니다.






조금 더 괜찮은 차를 사기 위해 4개월 동안 모험을 함께 했던 1999년식 혼다 오디세이를 팔기로 했어요. 그동안 시답잖은 이메일 피싱 시도가 네 번이나 있었고, 90년대 차량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과도하게 값을 깎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연락이 왔습니다. 거의 두 달 만에 우리와 영혼이 딱 맞는 사람들이 나타났어요. 카일과 세이미, 콜로라도에서 온 20대 초반의 아메리칸 커플이었답니다. 그들은 우리가 요구하는 가격과 차 상태에 무척 만족했어요. 집이든 차든 제 주인이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이 차보다 1년 더 오래된 혼다 오디세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주차장에 세워두고 트래킹을 다녀온 사이 누군가 차를 통째로 훔쳐갔다고 합니다. 통째로, 차 안에 있는 여행 짐까지 싹 다요! 트래킹 갈 때의 옷차림과 배낭,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갑만이 그들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경찰에서도 손을 더 쓸 수 없는 상태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제가 정말 놀랐던 건, 카일과 세이미가 그 일에 대해서 마치 오래전 일을 회상하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꺼내는 태도였어요. 어찌 그리 긍정적일 수가 있어,라고 물어보니 그냥 그래야 하니까! 하며 와하하 웃음을 쏟아내더군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은?' ─ 지난겨울, 책을 읽다가 몇 가지 물음들이 나와서 일기에 적어 놓은 것이 있어요. 문득 생각나는 까닭에 카일과 세이미를 만난 이후 다시 펼쳐 보았습니다. 제가 그때 떠오르는 대로 써 놓은 답변을 요약하자면 「소중한 사람이나 물건을 잃는 것」이었어요. 추가적인 질문이 이어졌어요. 그 상황이 제게 미칠 영구적인 영향력은 1부터 10 중에 6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50%로 보았어요. 책은 또 이렇게 묻더군요. '손실을 복구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밟을 수 있는 단계는?', '위의 시나리오에서 일시적 결과나 이익, 혹은 영구적 결과가 이익은?'






(저의 답변이 궁금하시겠지만, 다음에 만나면 그때 제가 답변을 써 놓은 일기장 페이지를 보여드릴게요.)






그렇게 질문과 답변을 써놓고 보니 제가 두려워했던 일들은 그렇게까지 속수무책의 재앙은 아니었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마음/행동 지침'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최악의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니 일상에서부터 저절로, 미리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최악을 생각하는 건 위축되거나 행동에 제약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선물해줍니다. 그것만 조심하면 되거든요. 미래의 'Best'가 아니라 미래의 'Worst'에 초점을 맞추면 지금 당장의 행동이 선명해집니다. 좋은 건 조금 좋든, 아주 좋든, 좋은 게 좋은 거지만 나쁜 건 크기가 작을수록 좋잖아요.






ⓒ chaelinjane, 2018






4월 말, 뉴질랜드 북섬 서쪽의 피하 비치에 갔습니다. 안개가 잔뜩 끼고 폭우가 퍼붓는 겨울 날씨였어요. 몸을 녹이고 싶어 작은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다가 테이블에서 커피 자국과 커피 가루가 묻어 있는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어요. 커버에 수놓아져 있던 글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전한 항구는 항상 존재한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왠지 노트를 펼치면 항해 중 비상 상황에 대한 대책과 주변 항구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을 것만 같았어요. (노트의 정체는 '카페 방명록'이었지만요.) 오늘의 편지에 딱 맞는 사진일 것 같아 함께 넣었어요.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이나 가장 큰 슬픔은 '예상치 못한 것'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기쁨으로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어두고, 현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손 안에서 굴려보고 최대한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줄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카일과 세이미도 이렇게 미리 불행의 크기를 줄여두었던 걸까요. 당신도 지금 망연한 두려움을 느낀다면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과, 그에 대한 시나리오를 한번 써 보세요. 불안과 두려움은 전염성이 강하며 주위도 싸늘하게 만듭니다. 바꿔 말하면, 나의 불안이 줄어듦으로써 나도 내 주변도 함께 따뜻해진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언젠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외치고 싶을 때, 정말 아무것도 없는지 잘 살펴주세요. 다음 편지가 도착할 때까지 당신에게 예상치 못한 기쁨 하나가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8년 8월 16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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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의 사진엽서 │ 우편함

2018년 8월 10일 금요일, 첫 번째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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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lin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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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커플이네요. 어린나이인데도요. 각박한 삶을 살아오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너무 좁은세계에서 너무 좁은 계단을 오르다보니, 늘 손해보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익숙해졌는지도 몰라요. 여행을 하면서 그런 좁은 마음을 극복해나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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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븐님 말씀처럼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 한국은 차량 도난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서 제가 더 놀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ㅎㅎㅎ

한국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나이가 지긋해질 때까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조마조마 살아내야하니, 아등바등 모은 작은 것들 하나도 잃어버리는 게 자연스럽게 겁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한국도 작은 세계가 아니지만, 자꾸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배우다보면 “상황 대처 능력” 리스트가 더욱 다양해지리라 생각됩니다 ㅎㅎㅎㅎ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정말 대인배 커플이네요. 그리고 거의 같은 차를 구입한 것도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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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오디세이가 뉴질랜드 지역에서는 국민 차로 불린대요 ㅎㅎㅎㅎ 쓰임새에 비하면 중고차 가격대도 무척 괜찮은 편이구요! :-))) 부자가 아닌 보통의 여행자를 위한 차랄까요ㅎㅎㅎㅎ 어린 나이라도 삶의 경험이 무척 풍부해보이더라구요 :))

가장 최악을 생각해서 불안의 크기를 줄인다는 생각의 과정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최악은 생각하지 않으려하기 마련이잖아요. 뭔가 두렵기하면서 해보고싶은 호기심도 드는 편지네요. 다음 편지전까지 저에게 예상치못한 기쁨이 전달되게 해주세요(급 기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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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 p님께 다음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 예상치 못한 기쁨이 전달되도록 해주세요🙏

저도 기도 드렸습니다! 히히 ;)))))
예전에 지인들께 이 질문들을 대화 중에 은근히 섞어서 물어봤는데 대부분이 별 고민 없이 극단적으로 '죽는 거!'라고 대답을 하더라구요. ㅎㅎㅎㅎ 죽으면 해결이고 뭐고 그냥 거기서 끝이기 때문에 그건 최악도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중단'의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악의 불행을 떠올리기 직전의 두려움- 어떤 감정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요ㅎㅎㅎㅎㅎ 불행을 떠올리고 위축되기만 하면 별 소용이 없겠지만, 꼭 그 다음 단계의 질문들(손실 복구, 일시적 결과/이익, 영구적 결과/이익)까지 생각을 이어나가보면 불행을 손으로 감싸쥘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ㅎㅎㅎㅎ (이 부분에서 영화 '소림축구'의 만두가게 종업원이었던 아매(자오웨이 역)가 골을 막아내는 동작이 생각났어요 ㅎㅎㅎㅎㅎ)

아이고오...ㅠㅠ 오늘 사진엽서 너무 좋네요...ㅠㅠㅠㅠ 사진도 본문이 주는 느낌이랑 참 잘 맞는 것 같구요. 역시 최고ㅠ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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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잌 토랙슈님 '_'* 감사하여요 ㅠㅠㅠ ㅎㅎㅎ 어떤 사진을 써볼까 하다가 네 달 전 사진에서 딱 어울릴만한 사진을 골라봤어요ㅎㅎㅎㅎ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두아!!!!!!! 토랙슈님 상하이 여행기 읽으러 가야겠어요 ㅎㅎㅎ

혼다 오디세이... 회사차였는데 늘 타고 출장다녔어요. T^T
갑자기 반갑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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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저는 이곳에 와서 이 차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ㅎㅎㅎㅎ
혼다 오디세이, 키위파이님의 출장 기억을 간직한 차로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