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팀] - 짙은 사랑에 대한 선득한 시선.

in #kr2 years ago (edited)

아니 에르노 - 단순한 열정

사랑으로서 모든 삶이 의미를 가지게 될 때가 있다. 인생의 난잡한 퍼즐을 맞추어 주는 사람. 허공에 맴도는 자물쇠에 은빛 열쇠를 꽂아 주는 사람. 상대방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구제해 주는 사람이 있다.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람이 뒤따라 온 건지 그 사람이 있기에 사랑이 뒤 따라 온 건지 답을 알 수 없는 우주가 담긴 눈동자를 온종일 바라보고픈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게 된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짙은 사랑에 대한 차가운 회고록이다. 아주 오랫동안 곱씹어 가장 날 것의 형태만이 남을 때 쓸 수 있는 사랑의 기록이다. 어쩐지 그녀의 글을 읽으면 새벽빛 아래 침대 옆자리에 누은 누군가의 슬픈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처연한 눈망울이 그려진다.

그가 잠잘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가늘게 떨리는 나방날개처럼 부드러운 그의 눈꺼풀이 작은 담회색 눈을 덮을 때, 자기를 배반하고 무슨 말이든 꺼낼까봐 겁먹고 낮에는 꾹 다물고 있던 매끄러운 아랫입술이 그 훈련에서 벗어날  때, 지친 몸을 길게 뻗은 그가 입을 약간 벌리고 쫓기는 아이처럼 급하게 얕은 숨을 쉴 때. 30-31

자신이 잠을 잘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자기 자신도 모른다. 이러한 일상의 조각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곳에서 낮음 숨을 쉬고 사라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러한 은밀한 모습을 다룬 누군가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사라지는 누군가의 일상이 어떤 이에겐 이토록 소중하여 존재가 되어 무게를 갖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는 사랑이 얼마나 슬프고 외로운 것인지 다시금 알게 해준다.

뒤 늦게 떠오르는 생각으로는,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가끔 나는 베를린 장벽도 프란츠가 마침내 내가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너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43

언젠가 풀리지 않는 퍼즐이 들어맞을 때가 있다. 이슥한 밤길을 이토록 멀리 되돌아 온 것이 실은 뚜렷한 목적지를 향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여태껏 안고 살았던 모든 상처와 생채기들이 이해가 될 때가 있다. 작가의 삶은 아마 이 사랑을 알게 된 후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가 바뀌었을 것이다. 어쩐지 영화 ‘컨택트’에 나온 에이미가 내린 결정을 보여주는 씬이 생각이 난다.

나는 행복을 동경했고 동시에 무시했다. 아마 행복한 사람들도 무시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이, 또는 누가 내 영혼에 이런 음울함을 불어넣은 것인지 지금까지도 궁금하다. 47

슬픈 사람이 사랑을 하는 건 어쩐지 더 마음이 아프다. 사람이 슬프다는 것은 자신의 가슴에 달린 추의 무게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의 모양과 무게를 잘 알고 그래서 자제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엔 나지막한 체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사랑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슬픈 것이다. <단순한 열정>이 그러하다.

저자가 사랑을 읊조리는 목소리를 이 리뷰에서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다소 빈약하지만 너무 많은 내용들을 스포하기는 원치 않아 결말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직접 읽으시거나 만약 너무 궁금해서 알고 싶으시면 인터넷에 검색하면 금방 나올겁니다. 하지만 이 책은 꼭 한번 읽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제목에 이끌렸고 다음엔 짧은 분량에 놀랐지만 지금은 아직까지도 작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리고 있어 놀람이 가시지 않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회고록이지만 사랑은 사랑할 때에만 모습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있을 때의 사랑의 모습과 다르게 누군가와 헤어지고 이별을 하고 난 후부터 시작되는 다른 모습의 사랑의 기록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절한 사랑의 기록! 한 번쯤은 기회가 된다면 읽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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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메모에 읽어야 할 책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네요 :>

사랑은 사랑할때에만 모습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 인상깊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 심오한 세계를 알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냥 사랑할때의 설렘과 행복감만을 추구하고 싶네요. ㅜㅜ 아직 어른이 덜 된 것이겠죠.

음... 처절한 사랑의 기록이라 관심이 갑니다 명절 연휴에 볼 시간이 좀 생기면 좋겠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웬지 조만간 읽을 거 같아요 ㅎㅎ 팔로우 하고 갈게요~

아 나는 처절하기에는 너무 늦은 듯....ㅠㅠ 배도 나오고....

서글픈 사랑의 자서전같군요. 암튼 읽고 싶어졌습니다.

힘내세요! 짱짱맨이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