얏호 가을날!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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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 & Oates를 듣고 있다. 어제는 Jamiroquai를 들었다. 공연이 끝나서인지 원래도 아름다운 계절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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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마치고도 일정이 빽빽해 쉬지 못했다. 긴장한 채로 하루를 더 보내고, 늦은 저녁 집에 돌아오니 긴장이 풀려 바로 잘 수밖에 없었다. 어제 끝내야 했던 작업이 있는데, 그냥 잠든 바람에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근 몇 달간 알람을 맞춘 기억이 없는데, 요즘은 늘 알람에 맞춰 일어났다. 작업 시간을 계산해 알람을 4시 30에 하나, 5시 1분, 2분, 3분에 하나씩 맞춰뒀다. 일어날 시간 30분 전에 알람을 맞춰 놓으면, 늦잠 자는 기분을 즐길 수 있다. 이상하게 수면 시간이 길지 않았는데도 4시 30분부터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꾸물대다 5시부터 일을 시작했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날이 밝아오는 기분이 좋았다. 기상 시간을 더 앞당겨봐도 괜찮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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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공연을 함께 준비하면서 자연스레 내 이사 과정을 알게 된 동생들이 내 집을 치워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다. 장난기 없는 진심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온 힘을 다해 거절했지만, 동생들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대화 속에서 '은혜', '보답' 같은 이야기가 나올 땐 정말 까무러칠 뻔했다. 얘네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나는 악기 하는 손으로 내 집을 치우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연주보다 청소가 더 즐겁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뜬금없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악기 하는 손'이라는 게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연주할 땐 느려도 청소할 땐 손이 빠르다는 말에 웃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럼이 들었다.

한 시간이 넘는 긴 실랑이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마음이 움직여 마지못해 승낙을했다. 그중 한 명은 당장 다음 주에 출국해야 해 이번 주에 오겠다며 일정을 잡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셋이 다 같이 맞는 시간이 없어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는 얘기를 전했다.

그것으로 대화는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꼭 내가 집에 있을 필요는 없다며 둘이 와서 치우고 가겠다는 주장이 시작됐다. 그때는 정말로 뒷골이 당기면서,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애들이 오겠다는 날은 공연이 있어 일정 조율이 불가하다. 어떻게 짐 하나 정리되지 않은 집에 애들을 불러 청소를 시킨다는 건지... 기껏 만나 합주 한 번 못하고 돌아올 것 같아 일단은 알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일은 그토록 고대하던 휴일인데, 어쩔 수 없이 짐 정리에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애들은 오히려 과하게 미안해하는 내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친한 동생이 와서 놀고 간다고 생각하면 돼요."라고 말했을 때, "우리 집에 친한 동생이 와서 놀고 간 적이 없어."라고 말했다.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하나의 벽을 허무는 과정은 아닐까?

바쁜 나에게 깨끗한 집을 선물로 주고 싶다는 말을 듣고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어떻게 내가 이런 귀한 마음을 받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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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레슨 과제는 리하모니였다. 리하모니는 기존의 곡에 새로운 화성을 붙이는 작업이다.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로 리하모니를 해갔는데, 레슨을 받으면서 내가 아름다운 사운드와 보이싱에 매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단지 과제 곡일 뿐이었지만, 그것은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같아 큰 충격을 받았다. 음악과 삶이 정말 이어지는구나.

그런 내게 선생님은 허비 행콕을 치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나도 동감했다. 실은 은연중에 허비 행콕 사운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듣기엔 좋지만, 직접 연주를 하려면 와닿지 않았다. 해가 지나면 변할 거라는 말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또다시 고민해보게 되었다.

뭐든 지나치면 안 되니 적당히 행복해하면서, 가끔은 나쁜 것도 보고, 피하고 싶은 것들도 정면으로 마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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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지금처럼 모든 것이 조화로웠던 적이 없다. 일, 음악, 사람 관계 이 모든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없애려 부단히 노력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사람 관계였는데, 이제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행복이 오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

의자 위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씻지도 않은 채로 음악을 들으면서, 넓은 책상 위에 이것저것 늘어 놓고 글을 쓰는 지금이 좋다. 이제 나가야하는데, 오늘까지 힘내보자. 다음 주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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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읽고갑니다 @ab7b13
다음주 행복한 여행 되세요!

와우~~~ 멋진 여행 되시길요. ^^

내가 없는 시간에 청소를 해준다는 마음은 고마운데, 저는 너무 부담스럽네요.ㅠㅠ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있네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세상일이 조화롭게만 이루어진다면, 인생사가 오히려 더 무미건조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입니다.

글에서 행복감이 느껴져요!

친한 동생이 와서 놀고 간다고 생각하면 돼요."라고 말했을 때, "우리 집에 친한 동생이 와서 놀고 간 적이 없어."라고 말했다.

이 구절이 너무 좋아요. 그래도 넉살좋게 집에와서 청소를 하고 또 ab7b13님은 소중해하는 마음이 느껴져서요. 생소한 일들도 하다보면 받아들여질만하고 어느새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가을날 만끽하세요!

그래도 마음써주는!! 고마운 팀원들과 같이 하시는군요! ㅎㅎ

나루님의 일기를 넘 좋아하는데 요 며칠간은 정말 너무너무너~~무! 좋네요:D 요즘 저는 별로 안 행복했는데 나루님 일기를 보니까 저도 행복에 전염될 것 같아요ㅎㅎ

마지막 단락에서는 이세상에서 가장편한자세가 연상되네요..

하루를 새벽부터 시작하면 저도 기분이 참 좋더라고요. (물론 잠이 어느정도 괜찮게 들고 수면의 질이 괜찮을 때 말이지요.) 하루를 길게 찬찬히 쓰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손에도 귀천은 없겠지만, 우리의 밥을 벌어다주는 귀한 손이라 생각하면 모든 손이 귀하다 생각합니다.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마음이 고마울 수밖에요 :)

동생들에게 짜장면 한 그릇 사주시면 됩니다. 탕수육에 고량주 한잔이면 더할나위 없고요 ㅎㅎㅎ
예술가들의 삶은 고스란히 작품에 담기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또한 삶의 연륜이 작품에 끼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고요.
다음주에 가을여행이시군요 즐거운 여행되시고 아름다운 여행이야기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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