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레슨받는 날

in #kr6 years ago (edited)

숨 가쁜 며칠이다. 자는 시간을 빼고도 하루에 7시간 이상은 집에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요 며칠 일찍 나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어제 저녁에 해야 했던 레슨이 오늘 아침 열 시로 미뤄졌다. 몸은 아침이 훨씬 편하지만, 하루 중 가장 좋을 때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좀 피곤하더라도 저녁이 더 기껍다.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도 먹고, 여유를 즐기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 있었다. 오늘 마감인 작업이 있는데, 적어도 열 시는 넘어야 집에 들어올 수 있어 아침에 끝내고 나가야 했다.

이사를 앞두고 물건을 하나둘 버리고 있다. 너무 멀쩡한 몇 개는 버리기 아까워 중고나라에 올려두었는데, 막상 답장하려니 귀찮아져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오늘은 우체국에 가 서류를 보내야 했는데, 마침 중고나라에서 연락이 왔다. 거래를 일사천리로 해결하고 아침부터 분주하게 포장을 했다.

가깝다 해도 동료와 친구 사이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편이다. 그래도, 동료 중에 친구가 있냐 물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얼마 전 늦은 전역을 해 뭔가를 챙겨주고 싶었는데, 우체국 가는 김에 미뤘던 택배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랴부랴 선물을 챙기면서, 선물만 챙기다 인생을 다 보내겠다는 생각을 했다.


IMG_8291.JPG

이따 오후엔 레슨을 받으러 간다. 근 일 년 만의 레슨이다. 레슨 일정이 정해지자마자, 진작 받아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로 챙겨갈 것이 있냐 여쭤보았고, 오선지와 리얼북을 가져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리얼북은 자주 연주되는 재즈곡의 멜로디와 코드를 간단하게 적은, 재즈 악보 모음집(?)이다. 연주자들의 교과서라고 해야 하나? 다양한 종류가 있고, 정식으로 발간된 책도 있지만 리얼북이라고 하면 보통은 불법인 Fifth Edition을 떠올린다.


내가 스무 살 때쯤 아이패드가 막 나왔던 것 같은데,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재즈 연주자들이 400페이지가 넘는 리얼북을 제본해 들고 다녔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한 오빠의 낡고 낡고 또 낡은, 걸레짝이라는 말이 어울리던 리얼북이다. 그 오빠의 리얼북 스프링은 이미 진작에 이곳저곳으로 휘어있었고, 심지어 몇 장은 찢어져 테이프로 붙여져 있기도 했다.

그 낡은 리얼북을 보면대에 턱하고 올려놓을 때, 나는 동경의 시선을 보냈던 것 같다. 얼마나 연습해야 저런 리얼북을 갖게 될까? 나는 그 리얼북을 닮고 싶어 괜히 책 모서리를 만지고 또 만졌지만, 그 내공을 따라갈 순 없었다.


IMG_8287.JPG

리얼북을 가져오라는 선생님에게 태블릿을 가져가도 되냐고 여쭈려다, 첫 수업 만이라도 제본된 리얼북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굳이 그런 사실을 묻지 않고도 태블릿을 꺼내는 세상이지만, 레슨만큼은 다른 마음으로 임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책장 구석에 있는 리얼북을 꺼내 보니 여전히 너무나도 깨끗했다. 그래도 세월의 흔적이 조금은 묻어있는 것 같았다.


주로 총보지를 쓰지만, 오선 노트가 필요할 땐 대한 음악사에서 만든 노트를 사용한다. 가격이 좀 비싸긴 하지만, 종이의 질이 좋다. 대한 음악사에서 나온 노트에 만년필로 악보를 그릴 때, 그 합이 무척 좋다.


아침부터 리얼북에 노트에, 팔아야 할 물건에, 여러 선물까지 챙기니 한 짐이었다. 낑낑대며 레슨을 겨우 마치고는, 택배에 넣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지에 글을 쓰다 오자가 생겼고, 고민 끝에 챙겨온 오선 노트에 편지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음악인들에겐 오선지에 편지를 자주 써주곤 했는데, 글의 끝엔 갑자기 떠오르는 멜로디를 그리거나, 그때그때 떠오르는 곡의 멜로디를 그리곤 했다. 간만에 그 때 생각이 났다. 오늘은 짧은 고민 끝에 만년필로 '생일 축하합니다'의 멜로디를 그렸다.


숨 돌릴 틈 없이 우체국에 들러 서류를, 선물을, 택배를 보냈다. 묵은 짐을 던듯 후련했지만, 무게가 제법 나갔던지 팔이 후들거렸다.


아직도 돌처럼 무거운 리얼북을 어깨에 메고 있다. 이따 레슨 받아야 하는데 아침부터 무거운 물건을 든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절망적이게도 오늘은 손 풀 시간도 없다.

그래도 이상하게 오늘 하루는 기쁨으로 충만하고, 그때 그 낡은 리얼북을 갖고 다니던 오빠에게 내가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 저 재즈왕이 될 거에요."

Sort:  

오선지에 만년필...
정감 있는 사각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손 편지를 만년필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레슨 잘 하세요.

저도 만년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해요! 저는 요즘 웬만한 글은 만년필로 쓰고 있답니다. 괜히 더 좋은 글이 되는 기분이에요. 레슨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해적왕이...아니, 스팀왕(?)이 될 거예요!ㅋㅋ

금손이고픈 한손님. 이런 드립 경고입니다.
제 방송에 다룰 수 밖에 없겠군요...

댓글 물관리 위원장 - 카비

저는 이 드립 너무 좋은데요. ㅋㅋㅋ 방송에서 어떻게 다루실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한손님 오랜만이에요. 포부가 멋지신데요? ㅋㅋ 저는 재즈왕을 맡을게요!

갑자기 제 폰에서 고이 잠자고 있는 iReal Pro가 생각나네요. 계속 잠잘 분위기..

악보에 이것 저것 연필로 쓰는 느낌이 좋아서 저도 리얼 리얼북을 선호할 것 같아요.

iReal Pro가 잠들어있을 정도라니! 재야의 고수의 느낌이 나는걸요?

근데 막상 리얼북에 안 쓰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심지어 한 장 한 장 뽑아 쓰게 돼요. 간만에 꺼낸 덕분에 요즘은 여기저기 들여다보고는 있지만요:)

저도 내일부터 iReal Pro와 함께 합니다!

ㅎㅎ 그런건 아니예요. 잠깐 재즈보컬 수업 들을 때 소개 받아서 설치 했는데 집에서 혼자 노래 부르고 있기도 뻘쭘하고 그래요 ㅋㅋㅋ

레슨을 하시기도 하시지만 레슨을 받기도 하시는 거군요.

Coin Marketplace

STEEM 0.28
TRX 0.12
JST 0.032
BTC 62521.03
ETH 3025.04
USDT 1.00
SBD 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