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기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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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동생 집에서 눈을 떴다. 타인의 공간에서 아침을 맞는 것만으로 큰 피로를 느꼈다. 눈 뜨자마자 스케줄이 시작된 기분. 그래서 어제는 유독 더 바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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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과 관련된 만남. 그제 쓴 재밌는 작업과는 조금 다른, 정말로 '재밌는 작업'을 함께하는 모임이었다.

오랜만이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편안했던 사람들.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면서도 중간중간 작업 이야기가 나오는 게 좋았다. 가벼운 수다를 떨다가도 "근데 이 부분은 이렇게 만들어보면 어떨까요?"라는 이야기를 불쑥 꺼내게 됐는데, 그게 자연스러워 좋았다.

우리는 이번에 좀 잘해보자고 카페에 앉아 마인드맵도 그리고, 여러 영상도 보고, 음악도 같이 들었다.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한 우리는 다음 만남까지는 연습 대신 대화를 더 나누기로 했다. 같이 작품 한 편을 보고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작품을, 그것도 타인이 고른 작품을 함께 본다는 것과 거기까지 가야 한다는 것, 심지어는 밤에 만나야 한다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무척 큰 부담으로 느껴졌다. 평소라면 핑계를 대며 피해갔겠지만, 지레 겁먹는 건 바보 같다는 생각에 한번 해보기로 했다.

함께한 시간을 남기고 싶어 사진을 찍었는데, 찍고 보니 이런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사람들과 함께한 일이 많지 않았다. 올해는 내게 기억에 남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많이 비우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려 한다.


어제는 병원 예약이 있었는데, 갑자기 작업이 생겨 진료를 포기했다. 원두 냄새에 혹해 커피까지 마신 나는 지하철에서 다시 극심한 복통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배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분께서 자리를 양보해주셨다.

의자에 앉아 부들대다가, 언제까지 젊다는 이유로(이제 젊지도 않은데!) 몸을 혹사시키면서 살아야 하는지. 당장 며칠은 병원에 가기 힘들 것 같은데, 또 응급실에 가는 건 아닌지 심란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시자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이 들렸는데, 그때 내가 듣던 곡은 이거다.


< Bill Evans & Jim Hall - Skating in Central Park >

비와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이 음악을 듣는 내내 짐 홀과 빌 에반스가 번갈아 가며 아픈 배를 어루만져주는 기분을 느꼈다. 9호선 급행열차에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가능만 하다면 여기서 영원히 내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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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목적지가 지인의 작업실이라 이 곡을 이어 들을 수 있었다. 한 번 밖에 안 들었지만, 좋은(진짜 좋았음) 스피커로 들어서 그런지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지니어인 지인은 함께 음악을 들으며 내 피아노 톤과 이 곡의 피아노 톤이 비슷하다고 했다.

빌 에반스와 피아노 톤이 비슷하다는! 믿을 수 없는 칭찬을 들은 나는 그럴 리 없다며 격렬하게 부인했는데, 그러자 지인은 내 곡을 틀어주었다. 묘하게 물기 어린, 어두운 느낌이 제법 비슷했다.

그걸 듣고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아직도 그 스피커 자체가 좋았던 것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빌 에반스의 톤을 좇았는지는 알 수 없다.


스팀시티는 어떤 곳으로 가라앉은 걸까? 멀린(@mmerlin)님께 받은 카메라를 손에 익지 않다는 이유로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던 건 아닐까?

요 며칠은 늘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를 내려놓고, 멀린님의 카메라와 이곳저곳을 함께했다. 이 카메라가 내 손안에 있는 동안은, 적어도 무언가를 찍는 동안은 스팀시티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마침, 어제 만난 지인은 사진찍는 내 모습을 찍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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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zing friend ! nice to visit this!

사람관계가 처음에는 좋아서 죽자 살자 못 산다 그러다 가도, 점점 내가 가진 영역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소홀해지도 피곤해지고 멀어지게 되죠.

즐거워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나 자신이 즐겁지 않고, 고민을 해야 할 정도이면, 꼭 해야 할 이유가 없으면 피하는 것도 답인 듯하네요.

이제 복통은 괜찮은 신가요?

곡을 듣고 싶은데 첫째 고양이를 팔베개 해서 재우는 중이라 들을 수가 없네요. 요며칠 장염 증상을 보이더니 오늘은 저한테 꼭 붙어 자서요.
나루님 장염도, 첫째의 장염도 오늘부턴 뿅 하고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오...
저 검은것이 멀린님의 사진기로군요^^)

아.. 맞다. 그때 지구는 둥그니깐으로 카메라 받으셨죠.ㅎㅎ

에고.. 건강관리 잘 하셔야 합니다.
통증과 증상이 어느 선을 넘어서면 치료하기 힘들어지니까요. ㅠㅠ

Skating in Central Park.. 아직도 듣고 있어요. 눈물이 다 흘러 나올 때까지 듣게 될 것 같군요. 그 때에는 떠오르겠죠? 라라님이 스팀시티를 찾으러 여정을 떠난답니다. 대서양을 넘게 될 텐데.. 나루님이 함께 해 주시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 카메라와 함께.. 답신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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