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일기

in #kr6 years ago (edited)

일어나선 울면서 양파즙을 먹었다. 편식이 심한데, 몸에는 좋다 하니 코를 꽉 막고 먹었다. 양파즙을 마시는 내내 이건 어니언맛 쥬스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양파'보다는 '즙'이 문제였던 것 같다.

양파즙을 먹고 바로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을 보니 한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곤 나중에 아이에게 어떻게 양파즙을 먹여야 할지 걱정이 됐다. "엄마는 안 먹잖아!!!"라고 하면 어떡하지? 아이 앞에서 억지로 웃으며 양파즙을 마셔야 할지, 잘 타일러야 할지, "이거 안 마시면 엄마처럼 돼"라고 해야 할지... 셋 다 좋은 답은 아닌 것 같다.


엄마가 되면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최대한 미루거나, 가능하다면 영영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럼 안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이런 고민을 내비치면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말해준다. 뭐가 됐든, 일단 나이가 들어야 할까?


요즘은 알게 모르게 날이 서 있다. 나도 모르게 때때로 날카로운 눈빛을 짓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얼마 남지 않으면서도, 꽤 남은 이사 때문일 것이다. 새집 계약이 끝난 후로 지금 있는 집에 있는 것이 무척 불편해졌다. 가능하면 빨리 떠나고 싶은데, 적어도 보름 이상은 이곳에 있어야 해 괴롭다.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내게, 타인이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다는 사실은 공포로 다가온다. 부동산에 집 비밀번호를 알려준 후로는 밤 열 시가 넘으면 이중 잠금을 한다.

쓸데없는 불안함이지만, 생각해보면 2년간 이 집에 들렀던 사람은 다섯 명도 되지 않는다. 차가 없는 나는 가끔 악기를 실어야 할 때 사람들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게 됐는데, 그때마다 나는 도착 10분 전부터 악기와 케이블, 스탠드까지 미리 내려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그걸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배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종의 결벽이었던 것 같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 동안 이 동네에 있었다. 단골 가게가 생길 뻔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카페건 음식점이건 좋아하는 곳은 몇 번씩 들렀지만, 주인이 조금이라도 아는 체를 하면 그다음부터는 가지 않았다.


몇 달 전 집 도보 5분 거리에 스타벅스가 생겼다. 처음 생겼을 때만 해도 이 좁은 동네에 스타벅스가 몇 개냐며 투덜댔지만, 생각보다 쾌적해 자주 가게 됐다.

아침 작업을 그곳에서 하게 되면서 더 자주 가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매장에 있는 직원의 얼굴을 모두 익히게 되었다. 유독 그 매장의 직원이 친절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언제부턴가 내게 더 크게 웃어주고(내 착각일 수도 있다), 늘 마시는 메뉴를 먼저 물어봐 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텀블러를 씻어 와 줘 감사하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을 들은 종일 그 점원의 예쁜 미소가 맴돌았다. 점원과 나 사이에 스타벅스라는 벽이 있었고, 그래서 떠나기 전 겨우 단골 가게 하나를 만들게 되었다.


동네를 떠나면서 아쉬운 것이 앞으로 그 스타벅스를 가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라니... 나는 실은 무척 외로운 게 아닐까?


타인에게 보여질 모습을 생각하며 매일 아침 방을 정리한다. 무척 깨끗하지만, 내 방은 아닌 것 같다. 오늘도 그 방에서 연습을 시작했지만, 연주에도 날이 서 있었다. 이런 상태로 연습을 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에 아침 연습을 포기했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연습이 잘 된 날은 세상과의 조화도 잘 이뤄진다고 한다. 나는 오늘 아침 세상과의 조화가 힘들어 연습이 잘 안 됐지만, 다행히 아직 하루는 많이 남아 있으니 연습을 통해서라도 세상과 잘 지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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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즙이라고는 하는 것들이 전부 약재를 섞은 것들이라 저도 상당히 싫어 합니다. 그냥 생 쥬스를 마시면 괜찮은데 말이죠...

오늘도 연습 잘 되어서 세상과 잘 지내세요. 이사 가고 나면 다시 단골 집도 만드시고...

부모님은 매번 건강에 좋다고 챙겨주시고, 버리기도 그렇고, 먹기도 그렇고 참 애매해요.

@banguri님 덕분일까요? 어제 연습이 잘 돼 세상과 잘 지내게 되었어요. 이제 이사 가서 단골 가게만 만들면 되겠네요. 감사해요.

나이가 들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하는데. 최고의 거짓말이죠. 지금 나이 때 뭐가 해결됐는지를 보면요. ㅎㅎㅎㅎ 하긴 뭐 귀찮아서 그런 얘기로 떼우고 있을지도.

나이가 들면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 거라는 뜻으로 해주신 말이었어요. 그게 맞는진 잘 모르겠지만, 가끔은 나이가 들어야만 해결되는 것들도 있더라고요. 물론 말씀해주신 대로 귀찮아서(?) 그런 말을 하는 분도 있지만요.

나이가 들어야 해결되는 것이라 ㅎㅎ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즙이나 포도즙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포도즙 맛있겠는데요. 스미골님 프로필 사진을 보니, 더욱 포도 생각이 간절해져요! 커피즙은 없겠지요....

제가 예전에 먹었던 양파즙은 양파보다는 한약맛이었던 거 같아요. 순수 양파즙은 아니었나봐요.

전 오히려 한약은 맛있게 잘 먹습니다. XX즙은 정말 먹기 힘들어요 ㅠㅠ

늘 마시는 메뉴를 먼저 물어봐주는건 정말 좋은 손님이어서 그런거예요:)

보얀님의 이 댓글을 보고 잠시 마음이 두근거렸어요. 그럴 수도 있다니(!) 앞으로 스타벅스 갈 때마다 부끄러울 것 같네요. 이사 가면 마음의 빗장을 열고, 단골집도 만들고 그래야겠어요.

그냥 좀 달짝지근하더라구요, 양파즙.

제이미님과 양파즙은 정말 안 어울리는데요. ㅋㅋㅋ 제이미님 양파즙까지도 섭렵하셨군요! 양파 향까지는 괜찮았는데, 여튼 괴로웠습니다.

ㅎㅎ 그냥 먹어본 정도? 양파껍질차라고 음료처럼 나온 것도 있는데 그냥 옥수수수염차 비슷해요.

양파즙... 군대에서 먹던 어니언 쥬스가 생각나네요 ㅋㅋ

실제 어니언 쥬스라는 게 있나요?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무시무시하네요...

겉보기엔 이상해보여도 나름 맛있어요...ㅋㅋ 정확한 명칭은 '버디언'이네요
https://namu.wiki/w/%EB%B2%84%EB%94%94%EC%96%B8

겉보기엔 정말 이상해 보이네요. ㅋㅋ 올려주신 링크를 읽어보니 군대 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 것 같네요. 저는 먹기도 전에 피하고 싶은 비주얼인데... @qlfxkdla님은 맛있게 드셨나 보군요? 덕분에 재미난 걸 알아갑니다.

생각보다 맛나요... 가공해서 그렇겠지만 박카스랑 비슷한...

양파즙이라니.. 한참전에 잉어즙을 먹던 때가 생각나네요. 견디면 익숙해집니다. 화이팅!
살면서 지금의 삶이, 지금의 상황이 내 것이 아닌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외로운만큼 자기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신기한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척 깨끗하지만, 내 방은 아닌 것 같다.

와... 잉어즙... 잉어즙은 엄두도 못 냅니다. 양파즙으로 만족! 화이팅!

지금의 상황이 나만의 것이라 힘들었는데, 말씀을 들어보니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힘들었던 것도 같아요. 무의식중에 여러 상황을 피하고 미루고 있었습니다. 하루 지났더니, 또 제 방으로 돌아왔어요. 치우기 전에 평온한 시간을 가지려고요.

부동산에 비밀번호 알려주는 거 참...어쩔 수 없긴 한데 꺼려지는 일인거 같아요.
저도 이사가 결정이 되면 왠지 급해지고 민감해지곤 하는데..
그래도 정든 집에서 살 날이 얼마 안남았으니 좀이나마 편하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이사는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군요.

미술관님 이야기를 듣고서 머물고 있는 집에 다시 정을 붙이게 됐어요. 이곳에서 즐거웠던 일도 많은데, 추억들을 잘 보듬으면서 이별 준비를 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아이에게 줄 유리잔 하나는 양파즙을 담고 다른 하나는 아메리카노를 담으면 어떨까요? 혹여 엄마잔에서 커피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양파 냄새때문이라고 코를 막고 마시라고 하는겁니다 ㅎㅎㅎ

새로이 만날 동네에서도 좋은 사람들 만나시기를.

어제 하루종일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양파즙을 먹이지 말자'였어요. 아이와 뭔가를 같이 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 했네요. 선의의 거짓말이라 괜찮을까요?

아이랑 테이블에 앉아 같은 곳을 보면서, 같은 잔에 커피와 양파즙을 따라 마시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은연중에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과도 선을 긋고 있었다는 생각이...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다정한 아빠가 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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