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을 때 일어날 때 걸어갈 때

in #kr-writing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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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소설의 한 구절이다. 읽은 지가 꽤 되었는데, 예전 블로그를 정리하다가 이 책을 읽고 당시에 썼던 글을 발견했다.

아저씨가 젊었을 때 어떤 유명한 스님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삼천배를 하고서야 어렵게 뵈었지. 그리고 물었어. 스님,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습니까? 하고. 그랬더니 그 스님이 대답하더구나. "앉아있을 때 앉아 있고, 일어설 때 일어서며 걸어갈 때 걸어가면 됩니다." 하는거야. 아저씨가 다시 물었지. 그건 누구나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자.....
그스님이,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그 눈빛이 생각난다. 형형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 눈으로 아저씨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하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앉아있을 때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일어설 때 이미 걸어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블로그에 글을 쓸때는 약간의 허영심과 과시욕을 버무려 쓰게 마련이다. 그 책의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내가 이런 책을 읽었어, 멋지지 않아?' 하는 마음과 더불어 '오 역시 남다른 데가 있어' 하는 찬사를 얻고 싶어함이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른 뒤에 그 글들을 되돌아 보면 부끄럽다 못해 손발이 오그라든다. 약 10년전 내가 이 글을 읽고 쓴 짧은 소회는 이러했다.

그렇다...
난 앉아있을 때 앉아있었던 적이 있었을까?
이미 내게 주어져 있는 것이 내 눈앞에 놓여있는데,
난 왜 시계를 자꾸 쳐다보며 다음을 다음을... 걱정할까.
언제 쯤이면 앉을 때 일어설 때 걸어갈 때를 구분 할 수 있게 될런지...



부끄러운 마음에 뒷목이 뻣뻣하다. 그때 썼던 글의 대부분을 지워 버렸다. 미니 블로그 같은 것이 유행하던 시절 그 특유의 허세어린 짧은 대사들, 글에도 유행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것은 깊은 생각 없이 그저 그럴듯 해보이는 구절을 그럴듯 해보이게 적어 넣은 점이다. 어쩌면 당시의 나는 저 스님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나의 부끄러움은 허세스러움이기 보다는 생각없음에 있다. 모든 글에 진심을 담아야 하거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을 속여서는 안될 일일 것이다. 그럴듯 해서 읽는 이들을 잠시 깜빡 속여넘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글을 쓴 사람 자신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자신이 그 글을 쓴 마음을.

그런 점에서 보면 스팀잇은 무섭다. 십년이 지난후에 어제 내가 한 것 처럼 부끄러워 하며 지워버릴 수 없다.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쉽게 쉽게 쓰던 글에 이제는 마음이 조금씩 더 담긴다. 기록이 기록인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는 하나, 내가 십년후에 돌아봤을때, 십년전 내 인생의 한토막에 대한 기록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전달했던 이야기가 허세스럽고 쓸모없는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용이 없는 이야기라서 쓸모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용도 없고 마음도 없이 허황한 명제만 던진다면 그것이 쓸모없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십년이 더 나이든 지금에야 '앉을 때 일어날 때 걸어갈 때' 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본다. 우선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지금 앉아 있는지, 일어났는지 아니면 걸어가고 있는지. 우습게도 대부분의 상태는 '엉거주춤'이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서있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것이다. 물건을 잃어버려 집안을 뒤지고 있다면, '땅에 발을 붙이고 찾아라' 하는 말이 있다. 집안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열쇠를 찾으면서 집안을 헤매고 다니면, 한곳을 뒤지는 동시에 이미 머리속에는 '아 그래 서랍에 넣었을지도' 하는 생각이 떠돌기 시작하고 지금 찾고 있는 선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우선 발을 땅에 딱 붙이고 머리속에서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시작해야 쉽게 찾는다.

지금의 내가 바라본 스님의 이야기는 그렇다. '현재의 상황에 충실하라' 일 수도 있지만, 외려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라' 가 아닐까. 우선 지금 내가 앉아있는지 서있는지를 똑바로 알아야 앉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일어설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언젠가 은퇴하신 선배님이 '지금 네가 올라가고 있는지 피크에 있는지는 지나봐야 안다, 피크에 있을때는 그게 피크인지 모르는 법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당시에 나는 그것이 무슨말인지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 지를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대부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채 허공에 뜬 상태로 다음을 바라본다. 가지고 있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지도 놓지도 않고 그 다음에 손을 뻗는다. 무협지에 나오는 허공답보와 다름없음이다.

스님의 말씀은 '스스로를 잘 들여다 보고 그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에 다음 일을 도모하라'는 말씀이 아니셨을까 한다. 나는 내가 짊어지고 있던 많은 일들과 내가 나라고 믿었던 많은 모습들을 얼마전에 내려 놓았다. 이것이 잘 한일인지 아닌지는 또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 알게 되겠지만,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나를 똑바로 잘 바라보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앉을 때 인지 일어날 때인지 아니면 걸어갈 때인지를 다시금 곰곰히 생각해볼 때가 된것이다. 오래된 일기 속에서 이 구절을 필연코 찾아 낸것도 어쩌면 그런 까닭일 것이다.



Fin.


written by @travel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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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아는 말씀이지만 누구나 할수 있는 행동은 아닌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더운 날씨에 건강한 하루 되세요~

싸이월드나 카카오스토리 등 기존에 하던 사진첩을 모두 다 삭제해버려서 속이 시원했는데 스팀잇은 그렇지 못해 저도 좀 두려운 마음이 있네요....
지울수 없는 과거가 될텐데 말이죠...

옷.... 프사가... ^^ 오랜만에 뵙습니다 ㅎ 그간 별일 없으셨죠??

네 저는 늘 안녕합니다 :D

이번 한주도 힘내세요!

반님도 그런 고민을 하시는군요?
제가 죽은 뒤에도 글이 남아있을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좀 그래요.
디지털 장의사가 블록체인 글도 지울 수 있으려나요ㅎ

이건 못지울지도 모르죠... 그래서 살짝 걱정이.. ㅎㅎ

앉아있을 때 앉아 있고, 일어설 때 일어서며 걸어갈 때 걸어가면 됩니다.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또 충실하란 말같네요!!
우린 늘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 속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잊고 살고 있진 않은지...!!

안녕하세요 독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
네 아마도 제일 어려운일이 아닐까 합니다 ㅎ

십년 뒤에 보면 오글거릴지는 모르겠지만
십년 뒤에 볼 사람은 나밖에 없다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ㅋㅋㅋ
안그런가요? 누가 나의 십년 전 기록을 들춰볼까요?
ㅎㅎㅎ
(만약 그렇다면 잘 살고 있다고 보면 될것 같네요.
뭔가 대단한 사람일테니까요.)

매 순간 거짓없이 그냥 살면 되는 거죠?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긴 그렇죠? 십년후에도 남을 만한 글을 쓴다면 부끄러울 이유가 없고, 그렇지 못하면 부끄럽지만 남이 찾아 볼일 없을 테니 말이죠 ㅎㅎㅎ

선보팅
후감상

^^ 선후가 어느쪽이어도...

자기 자신을 직시해서 안다는 것!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딘.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라!

는 말처럼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저 스스로도 자신을 직시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시원한 오후 보내세요~

지금 봐도 좋은데 왜 부끄러우실까요? 전 제 글을 다시 찾아 읽지 않는답니다 ㅋㅋ 부끄럽지 않기 위한 노력이지요 ㅎㅎㅎ저도 지금의 때가 어떤지 생각해봐야겠어요! 오늘부터 지금부터요~

에빵님 오랜만입니다 ^^ 한국 방문은 즐거우셨나요? 저도 한 보름 떠나있다 돌아와서 낯설어하고 있는 중인데요. ㅋ
다시뵈니 반갑네요 ㅎ

저도 스팀잇에서 포스팅 할때면 영원히 박제되는거라 그런지 신경을 더 쓰게 되요. 후회없는 날을 위해서도 그렇구요.

네 맞아요. 아무래도 조금더 신경이 쓰이죠 ^^

제가 요새 문득 하게된 고민 이에요..
나의 기록을 적는답시고 허울좋은 보여주기 따위의 글을 쓰고 있는게
아닌지 곰곰히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사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어서
취미로 들어왔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시점에 놓여 있어요 ㅎㅎ
이걸 어찌 타파해야 하는지...

전 공지영씨 별로인데 ㅎㅎ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은 정말 좋았어요!
그 한편으로 저에게 참 괜찮은 작가로 남았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녀의 신념을 사랑하진 않습니다. 그녀의 몇몇 글을 좋아하는 것이죠. 너무 딱떨어져서 깍쟁이 같을때가 있지만, 확실히 이야기꾼으로서는 훌륭하니까요 ^^
말씀하신것이 저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취미가 깊어지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선에 자꾸 서게 되는데, 스팀잇을 프로의 입장으로 바라봐야하는지 계속 취미의 영역으로 둬도 되는지 좀 헷갈리거든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일단 더 들어가보고 결정하겠다는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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