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연작-2] 무지한 교관

in #kr-writing6 years ago

<군대 연작>
0 기획의도
1 작명소
2 무지한 교관
3 파리대왕
4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5 선배님
6 애국과 제국
7 종교로서의 계급제도
8 정신교육의 근본문제
9 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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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TV "진짜사나이" 중

"You are taller than a mountain"

훈련소에서 교관(이하 조교까지 통칭)은 카리스마의 화신이다. 빨간 모자 아래로 선글라스 낀 얼굴이 까무잡잡하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훈련병들은 눈치를 본다. 교관의 입꼬리가 좀체 올라가지 않는다. 두 손으로는 허리를 짚은 채 단단하게 서있다. 지시를 하고 시범을 보인다. 이윽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훈련병들은 헐레벌떡 뛰고 엎드린다.

확실히 훈련소에서 교관은 커다란 산과 같은 존재이다. 아니, 퇴소나 전역 후에야 추억거리지만 현장에서 교관의 존재감은 커다란 산 이상이다. 훈련병과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느껴진다. 낯선 환경에 직면해 그저 주변을 살피기 급급한 훈련병들에게, 교관은 생존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두루 갖춘 다른 등급의 인간처럼 보인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인간의 마음을 가진 플레이어가 이니라 처음부터 그 상태 그대로 숙련돼 있던 NPC인 것 같다.

곱씹어보자면 기이한 일이다. 왜 훈련병들은 교관의 말에 벌벌 떨며 뛰고 구르고 엎드렸을까? 어떻게 그들은 물리적인 힘과 같은 직접적인 수단 없이도, 처음부터 말 몇 마디로 우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그토록 자연스럽게 복종하고 질서잡힐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교관은 불과 몇 개월 먼저 입대했을 뿐이다. 지금 눈앞에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는 훈련병들과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다. 교관이 되기 위해 일찍이 훈육의 기술을 학습해온 전문인력을 선발하는 것도 아니다. 보직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훈련병들을 압도하고 지휘하며 손쉽게 움직일 수 있으며, 훈련병들은 누구도 그들의 훈육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정말 기이한 것은, 누구나 이 모든 게 일종의 역할 놀이(role play)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교관의 특수한 지위와 권력을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당연한듯이 지침에 따르고 복종하며 그들을 별개 종류의 인간으로 대우한다. 이것은 교관의 '인간적인' 모습이 노출될 때 훈련병들이 보이는 독특한 반응에서 잘 드러난다. 가장 엄격했던 교관이 우연찮게 웃는 모습을 보이면 이후 훈련병들 사이세서는 큰 화젯거리가 된다. 훈련병들은 그 사실을 즐거워한다. 우상의 아우라에 균열이 생겨 마각이 노출되자 이 모든 게 역할 놀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농담처럼 감각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이전에 교관의 지위는 '농담'이 아니었다. 과장된 역할 놀이의 농담 같은 성격이 드러나면 지시와 복종의 효율적인 진행이 어려워진다. 때문에 교관의 웃음은 보통 훈련이 막바지에 이를 때 목격되는 것이다.

복종의 메커니즘 - 예상되는 답변과 그 반박들

교관에 대한 훈련병들의 복종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음 같은 답변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1) 교관은 그 뒤에 버티고 서있는 국가의 힘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복종하지 않으면 감점, 체벌, 심지어는 퇴소와 같은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 정도의 앞선 기간과 지식들도 훈련병들을 훈련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1)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첫째, 국가 권력은 분할 또는 이전 가능하다. 둘째, 개인은 분할 또는 이전된 권력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첫 번째 전제는 실제로 국가를 비롯한 관료 기구가 작동하는 방식을 묘사한다. 결재 시스템을 예로 들 수 있다. 권력의 핵심이 있다고 할 때 거기서 모든 사항들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지시할 수 없다. 그래서 대결과 전결, 보고 순서의 체계가 존재한다. 물론 권력에 물건 같은 실체가 있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뢰의 습관'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 이상은 현재 논의의 범주를 넘어가므로, 현실에서의 양상과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서 만족하기로 하자.

사실 문제는 두 번째 전제에 있다. 개인은 그 권력의 작동 양식을 인지하고 있는가? 복종은 인식의 층위에서의 이해를 전제하지 않는다. 가령,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인 카리스마에는 대부분 실제적인 근거가 없다. 카리스마를 지닌다는 것이 꼭 물리적인 압력 수단의 소유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래서 카리스마는 종종 신비로운 능력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종 행위 자체도 충분한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명령하는 이에게 불리하다. 최종적인 판단의 순간까지 복종이 지연되는 것은 물론 '복종하지 않을 근거'가 발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오히려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러므로 두 번째 전제는 오류이다. 훈련병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에 맞춰 움직이길 요구되고 그렇게 행함으로써 복종하고 있다. 복종이 이루어지는 실제 순서는 (1)의 견해에서와 정반대이다. 일단 복종이 먼저 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맞춰 근거들이 마련되고 정당화가 이루어진다. 파스칼은 권위의 근거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 바 있다.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그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권위를 그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괴하게 된다."

다음으로 (2)를 보자. 이 견해는 앞서의 것보다 유력한듯 하다. 실제로 훈련병들은 특기분류나 자대배치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주의적 결론은 여전히 복종의 메커니즘 자체는 해명하지 못한다. 좋은 평가를 얻고자 하는 생각이 훈련에 성실히 참여하고자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맞지만, 어째서 교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 '그토록 순간적으로 과도한 양상'에서 이루어지는지는지 까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벽에서 못을 빼면 거기 걸려있던 옷은 떨어진다. 이때 옷이 낙하하는 이유를 알려면 중력을 해명해야지 못이 그 원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2)의 주장은 훈련병이 그 모든 근거부족에도 불구하고 <연작 1>에서 봤던 것처럼 복종하는 이유에 대한 답변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3)은 교관이 복종을 요구할 수 있고 또한 실제로 그리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지식과 기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다. 과연 그럴까? 신입 교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훈련병 시절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훈육관으로서는 모든 면에서 아직 서툴고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간혹 교관이 서툰 모습을 보이더라도 복종은 이어진다. 아니, 오히려 이 경우 복종의 기이함이 잘 드러난다. 훈련병들은 '뭐 저런 게 교관이라고...'라고 생각할지언정 대개는 여전히 복종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 견해가 훈련병들의 계산가능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관의 자질 같은 것은 애초에 객관적인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고, 이제 막 입대한 훈련병들이 관련하여 공통적이고 적합한 판단의 척도를 지니고 있다 생각하는 일도 부적절하다. 나아가 계산(판단)하는 일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촌각을 다투는 복종의 문제에 시간 간격의 존재는 치명적이다. 실제로는 훈련소에서 복종이 매우 갑작스레 진행된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견해가 복종의 과정을 지지할지언정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예시된 답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대상들, 즉 확인 가능한 대상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란 각각 국가의 힘, 불이익, 교관의 자질이다. 하지만 논의했듯이 위의 판단들은 모두 객관적 계산을 필요로 하지만 그 계산 자체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다. 계산을 통해 실제로 그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해도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계산 과정의 소요시간이 복종의 유도 과정에 포함되는 순간 훈련 과정의 신속한 복종은 성취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복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선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적합한 답안은 훈련소에서 이루어지는 복종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연작 1>에서 이것을 "극대화된 이름의 물질성과 내재화의 광기 어린 속도"라고 표현하였다. 덧붙여, 복종이라는 사태 자체가 이미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대상들의 계산(판단)이라는 '합리적' 과정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비합리성이 성립되는 내부의 논리학을 찾고자 하는 목표를 지녀볼 필요가 있다. 이상의 맥락에 따라 본 논의에서 제출하는 답안은 다음과 같다. <훈련소에서의 복종은 전이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이의 마술

정신분석학에서 '전이(transference)'는 분석가와 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특수한 정서적 작용을 일컫는 개념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분석가라는 타자와 환자라는 주체 사이의 과정으로 전이를 재개념화 함으로써 그 상호관계적 성격을 강조했다.

여기서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 개념으로서의 전이 현상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상기했듯이 전이가 주체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감정적 작용이라는 사실만에 집중하는 것에서 출발하기로 하자. 꼭 정신분석이라는 분석가-분석주체 간의 특정한 환경에서 뿐만 아니라 타인과 관계하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전이적' 현상은 흔하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여기서 주목하는 사례들이 정신분석 환경에서의 전이에 정확히 대응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정신분석 환경은 일상 환경과는 달리 특수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정신분석학 개념들은 오남용되기 십상이다.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전이 개념을 해석의 도구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라캉의 공헌이다. 라캉은 스피노자나 헤겔을 비롯한 철학자들을 정신분석학에 끌어들임으로써 정신분석학의 사유들을 구조적으로 손질해냈다. 라캉의 이와 같은 작업은 거꾸로 철학의 개념들을 손질하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라캉이 재개념화한 전이 개념을 통해 '주체와 타자의 관계'라는 철학적 문제의 한 해석 방법을 염두에 둔 것이지 정신분석학 개념을 그대로 끌고 와 대입한 것이 아님을 강조해둔다.)

타인이 단순히 나와 닮은 한 인간 이상의 무엇이 되는 순간이 있다. 예컨대, 당신이 아주 존경해 마지 않는 노스님을 방문했다 하자. 당신은 스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의 지혜로움과 능숙한 언변에 감탄하고 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스님이 일어나 창문을 연다. 창밖에는 봄이 한가득이다. 스님이 말한다. "날씨가 아주 좋네요. 이런 날도 있어야지요. 그렇지 않나요?"

스님의 말을 들은 당신은 생각한다. 스님의 말과 행동에는 무언가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저 고승이 봄을 빗대 무언가 깨달음을 주려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 스님은 그냥 방이 더웠던 것 뿐이었다면 어떨까? 아니, 스님이 정말로 깨달음을 주려 했다 해도 그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는 한 당신은 스님을 '한 인간 이상의 무엇'으로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에게 스님은 단순히 타인이 아니다. 그는 당신이 품은 질문들의 답을 지닌 것만 같다. 스님에게는 당신처럼 사소한 고뇌들로 밤지새우는 일이 없을 것만 같다. 요컨대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려 스님은 작은 타인 이상의 '큰 타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전이의 현장이다! 당신은 스님을 답변의 장소로, 완전무결에 근사한 존재로, 숭고한 존재로, 존경스러운 스승으로, 뭇 사람들보다 지혜롭고 고등한 인간으로 가정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 결과 당신은 스님의 말들을 기꺼이 가르침으로 삼으며,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이라도 해석해야 할 암호인양 생각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스님이 실은 아는 게 별로 없어도 상관 없다. 전이적 관계를 위해 중요한 것은 주체, 그리고 주체가 '안다고 가정할 수 있는' 큰 타자이다.

타자는 말이 적고 모호한 외관(말투, 헛기침, 기행 등)을 많이 지니고 있을수록 주체를 전이로 사로잡기에 용이하다. 적절하게 그 앞에 미끼가 던져진 장막은 그 이면에 대한 상상력을 한껏 부풀린다. 덫이 제대로 놓아져 있기만 한다면 장막 뒤에는 아무 것도 없어도 상관 없다. 심지어 주체가 자발적으로 빈 공간을 채워줄지도 모른다. 타자는 주체의 욕망에 답을 줄 수 있는 재판관으로 화하고, 이렇게 주체는 타자와의 신비로운 관계에 빠져든다.

한편, 전이의 큰 타자는 사람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예컨대 이데올로기는 강력한 큰 타자로 작용한다. 무슨무슨 주의가 세상 만물을 설명할 수 있는 만능 이론으로 여겨지듯이 말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비합리적인' 열정과 완전무결한 타자라는 신념은 모두 전이의 대표적인 장소이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누군가는 전이가 용이한 환경을 구성하여 타인을 그 안에 빠뜨릴 수 있다. 전이의 열정은 사랑의 감정과 자주 중첩되기에 성공확률이 높은 포획장치이다(존경이나 동경과 사랑을 혼동하는 것 같은 사람들을 떠올려보라). 이때 전이는 권력의 주요한 전략으로 활용될 수 있다.

주장하건대, 훈련소에서 이루어지는 복종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전이의 개념을 동원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훈련병들은 처음부터 속임 당한다. 군대와 훈련(소)에 대한 어떤 이야기이든 군대를 다른 사회 집단 이상의 어떤 특수하고 신비로운 집단으로 여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하다. 나이든 어른들은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라고 말한다. 군필 친구는 "넌 이제 죽었다"거나 "거기도 사람 사는 데다"라고 말한다. 군 내 사고에 관한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띈다. 입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발소든 미용실이든 가서 머리를 민다. '사회'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스타일로. 바깥과 격리될 준비를 한다. 황량한 장소로 와서 훈련소 문을 넘어선다. 개인물품을 반납한다. 처음 보는 온갖 군수품들을 수령한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지식의 낯섦도 군대라는 존재 앞에 장막을 침으로써 신비화하는 데 일조한다. 갓 입대한 훈련병들은 낯설지만 빨리 익숙해져야 하는 용어와 지식들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지식의 경우를 보자. 모포를 개는 법에서 군복 입는 법, 관물대 정리법에 이르기까지 병영생활을 위해 새로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게다가 기준은 그 얼마나 까다로운가? 개고 입고 정리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는 치수(cm)가 정해져 있다. 교관은 자를 들고 다니며 훈련병들을 단속하고 1cm 차이로 엄벌에 처한다. 이 과정은 지식을 단순히 병영생활교육 책자 이상의 까다로운 것으로 만든다. 훈련병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이러한 '낯설게 하기'의 전략은 수시로 가해지는 기합과 함께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런데 눈앞의 교관을 보라! 속되게 말해 그는 "큰소리 뻥뻥 친다." 훈련소라는 이 낯선 공간에서 교관의 풍채는 참으로 자연스럽고도 당당하다. 교관은 훈련병들이 모르는 지식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교관은 마치 자신이 훈련소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한다. 또한 그는 많이 말하지 않는다. 훈련에 관련된 지시들만 간결하게 행하며, 그 와중에 말과 행동의 엄격성은 일관되게 유지된다. 웃거나 장난치는 모습은 금지되어 있다. 그런 모습은 언급했듯이 훈련이 후반부에 치달으면서나 목격될 수 있다.

우리는 방금 훈련소에서의 전이현상을 두 층위에서 논의했다. 하나는 군대라는 조직 자체를, 다른 하나는 교관의 존재를 큰 타자와 겹쳐 본 것이다. 어느 경우든 군대는 훈련병인 당신보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당신이 앞으로 익혀야 할 것들에 대한 완전무결한 계획을 앞서 담지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훈련소가 적극 조성한 낯선 환경과 피로해진 신체는 이미 당신으로 하여금 기존에 알고 있던 '사회'의 지식을 무화하며 스스로 비워낼 준비가 되어 있도록 한다. 때문에 교관이 지시하는 내용들은 급속히 내재화될 수 있다.

기묘한 것은 교관이 까다로운 것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전이적 관계에 빠져들기 쉽다는 사실이다. 유사하게 훈련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복종은 더 수월하게 진행된다. 어째서일까? 그렇게 함으로써 군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상연하기 때문이다. 훈련병은 이것을 군대가 지닌 지식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인다. 달리 말해, 군대가 내보이는 자신감은 그 자체로 매혹적인 덫으로 작용한다.

물론 전이가 복종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복종의 '비합리적인' 특징, 즉 그 갑작스런 발생과 진행이라는 비약을 설명하기 위해선 특수한 관계의 논리학이 필요하다. 전이의 마술이 바로 그것이다. 전이의 논리학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평면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국가의 힘, 불이익, 교관의 자질에 근거한 계산주의적 설명방식은 복종이 함축한 불균등한 관계의 외관만 흉내낼 뿐 그 구체적 의미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에 전이는 복종이 타자의 '매혹'에 의해 주체가 말려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달리 표현하자면, 믿음의 조작적 구성이다. 복종은 큰 타자가 완전무결한 지식과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 필요한 것은 다만 믿음을 유발하고 지탱할 수 있는 외관이다. 따라서 큰 타자의 외관을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 있다면 교관은 모든 것을 다 알 필요가 없다. 물론 애초에 고작 몇 개월 제한적인 환경에서 복무한 교관이 다 알 수도 없기는 하다. 교관은 훈련병들이 복종을 통해 상상하는 수준에 비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 많은 교관의 지식 제공은 훈련병을 복종시키는 일에 유해하다. 공백을 만들어 훈련병이 스스로 채울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옭아맬 수 있는 전이를 구성하는 것, 스스로 채워낸 믿음의 무게에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복종의 핵심이다.

권력이라는 농담 - "왜 도마(Thomas)가 옳았는가?"

<군대 연작>의 기본 전제는 군대 조직을 존속시키는 메커니즘이 사회 일반과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 극단적인 활용 방식에서 차별성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매 글에서 되풀이하여 설명하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 전이가 활용되는 양상은 권력이 전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이는 주체를 타자에 옭아맬 수 있다는 점에서 권력의 탁월한 무기로, 특히 권력의 존속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권력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과대부여하고 그에게 무언가 평범한 사람 이상의 지식과 통찰력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는 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실 환경만 갖추어졌다면 평균 이상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요컨대 권력은 그 자신을 큰 타자로 제시하여 과대평가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전이의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은 절제하거나 과장한다. 그 중간이란 없다. 주체의 상상력이 전개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거나, 아니면 뻗어나가도록 자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이의 관점에서 권력은 일종의 농담이다. 권력의 말과 행동은 그 외관만큼 내부도 견고한 것이 아니다. 권력에는 실제적인 근거가 충분치 않다. 권력의 기원을 찾아올라가는 사람은 반드시 권력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전이의 환상적 장막을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시덥잖은 농담이다. 권력자는 그에 매혹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합당한 자질과 능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권력을 획득한 순간 권력자는 그에 걸맞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순식간에 정당화된다. 심지어 그의 뛰어난 면모만 시야에 나타날 것이다. 노스님의 헛기침이 삼라만상을 꿰뚫는 의미를 담지한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어느 유명한 예시처럼, 왕이 왕인 까닭은 그 자신이 왕이라서가 아니라 신하들이 그를 왕으로 대우하기 때문이다. 전이의 논리학을 고려한다면 여기에 한 가지 전도를 더 추가할 필요가 있다. 신하들이 그를 왕으로 대우하는 까닭은 그가 왕인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력 비판의 첫 걸음은 그럴듯한 외관 너머의 우스꽝스러움을 포착하는 일이다. 위장된 농담에 또 다른 농담으로 대응하는 일이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이 일을 해왔다. 이제는 진부한 예시지만,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와 <모던 타임즈>를 떠올려보라. 또는, 영화 <고지전>의 마지막 전투 후 애록고지 정상에서 마주친 신하균과 류승룡의 터져나오는 웃음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모두 이면의 농담과 조우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비판의 첫 걸음 이상을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 첫 걸음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순진한 질문'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 부활의 소식에 도마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못 믿겠소."(요3:25) 물론 이 일화는 도마의 믿음이 불충분함을 비판하기 위해 종종 인용된다. 그러나 적어도 권력에 결부된 전이적 믿음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반문할 줄 하는 순진함이 필요하다. 전이를 유도하는 덫 앞에서 언제나 그 이유를 묻고 실제임을 증명해달라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는 후에 도마를 꾸짖으며 "보지도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요3:29)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권력을 지닌 자는 예수 같은 성인이 아니므로 보지도 않고 믿어서는 안 된다. 주지하듯이 주체가 보지도 않고 믿으면 대개 타자에게 복이 있다. 현실에서는 도마가 옳다. 보여달라 물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농담일 따름이다. 해결책으로서는 불충분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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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punk님 안녕하세요. 개대리 입니다. @sleeprince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제 0회 짱짱맨배 42일장]3주차 보상글추천, 1,2주차 보상지급을 발표합니다.(계속 리스팅 할 예정)
https://steemit.com/kr/@virus707/0-42-3-1-2

3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라면 한번쯤은 공감할 만한 글이에요! 보팅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공감하셨다니 뿌듯하네요ㅋㅋㅋㅋㅋㅋ

오늘도 @kittypunk님의 머릿속을 잘 산책하다 갑니다.

@홍보해

아 다섯번째 문단에 오타 있는듯 합니다.

가장 엄격했던 교관이 우연찮게 웃는 모습을 보이면 이후 훈련병들 사이세서는 큰 화젯거리가 된다.

항상 깊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많은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앗 오타...! 그런데 무슨 오류인건지 수정이 안 되네요 이런ㅋㅋ

심오한글이네요. 논산훈련소에서 겪었던 일들이 상기되며 처음엔 끄덕끄덕하면서 읽다가 너무 길어서 솔직히 포기했...습니다. 두세편으로 나눠서 연재하면 좀더 가독성 있을거같다는 의견입니다!

방문 감사합니다. 흑흑 스팀잇 인터페이스에 익숙하지 않아서 글 호흡조절이 아직 미숙하네요. 좋은 조언 감사드립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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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주제의 글 잘 읽고 갑니다. 당장은 정독할 시간이 없어 댓글로 흔적만 남기고 갈게요. 군대썰 정도로 생각하고 클릭했는데 생각할꺼리를 던져주시니 횡재한 느낌입니다.

그리 생각해주시다니 황송합니다ㅎㅎ 앞으로도 여러 의견들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헉... 길어요.
시간내서 정독하겠심더.

감사합니다ㅋㅋㅋ
글을 좀 플랫폼에 맞게 간결하고 깔끔하게 쓰는 방법을 익혀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연작^^ 기대합니다~

틈나는대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군대 조직을 존속시키는 메커니즘이 사회 일반과 이질적이지 않다

온 사회를 지배하는 ‘까라면 까야지’가 떠오르네요.

힘은 정보의 통제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최소한 군대에서는요.

정보의 비대칭성을 정확히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나아가, 정보의 통제 뿐 아니라 통제된 정보에 대한 상상도 일종의 사슬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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