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수다] 힉스 입자, 믿음, 그리고 존재

in #kr-science8 years ago (edited)


이름을 써주신 @tata1 님 고맙습니다.


지난번 "엑시덴탈 유니버스"에 대한 독후감을 썼었는데,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오늘은 그 책 내용을 가지고 '책수다'를 떨어볼까 한다.


과학자들의 믿음


종교에서 ‘믿는 자들’은 증거가 없어도 믿는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는 성경 말씀처럼 말이다. 하지만 과학은 다르다. 과학자들은 직접 보고, 만지고, 실험하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증명이 돼야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나 ‘이중 슬릿 실험’과 같은 양자역학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과학자들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처럼, 마치 ‘믿는 자들’처럼 얘기하는 것 같다.

사실 보통의 사람들은 ‘이중 슬릿’ 실험이니 뭐니 하며 증거를 들이밀어도 “말도 안 돼. 어떻게 입자가 파동이 되니? 어떻게 두 개를 동시에 통과하니?”라며 안 믿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험 결과만 있으면 안 믿기는 일들도 믿는다. “내 말이 안 믿기겠지. 하지만 이건 진짜야. 내가 직접 (실험해) 봤어.”하며 말이다. 마치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하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앞에서 “내 말이 안 믿기겠지. 하지만 이건 진짜야. 내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 봤어.”하고 말하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과학과 종교는 전혀 다른 분야인 것 같지만, 이럴 때면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나 하고 느껴진다.

어쩌면 과학자들이 ‘믿는 자들’ 이기 때문에 ‘힉스 입자’도 찾아낸 게 아닌가 싶다. 예전 과학자들은 왜 어떤 입자는 질량이 있고, 빛과 같은 어떤 입자는 질량이 없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모든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신의 입자 ‘힉스’가 존재할 것이라는 결론(가설)에 도달했다. 이 힉스 입자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과학자들은 그 입자를 찾아 반지 원정대에 버금가는 대여정을 시작했다.


힉스 원정대


보석함의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보석함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망치로 두드리거나 벽돌로 내리쳐서 보석함을 깨뜨리려 할 것이다. 그래야 속에 있는 보석을 찾을 수 있으니까. 원자보다 작은 입자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자를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원자는 굉장히 단단해서 그걸 깨뜨릴 수 있는 '망치'는 없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똑같이 단단한 두 개의 '원자'를 서로 부딪혀서 깨뜨리는 것이다.

손으로 던지는 속도 가지고는 원자가 부딪혀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 마주 달려오는 자전거 두 대가 부딪힌다 한들 기껏해야 바큇살 정도만 부러질 뿐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차 두대가 부딪힌다면? 차가 많이 찌그러질 것이다. 차가 가속을 더 많이 할수록 더욱 세게 부딪힐 것이다. 원자를 부딪힐 때는 '입자 가속기'를 사용한다. 원자가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빠른 속도로 슝 달려서 서로 부딪힐 수 있도록 장치를 만든 것이다.

힉스 입자를 발견하는 과정은 이렇다. 입자 가속기에서 두 개의 입자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충돌시킨다. 그러면 마치 폭발이 일어나듯이, 커다란 에너지가 생기고, 작고 새로운 입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입자를 충돌시켜서 깨뜨리는 게 쉬울 리 없다. 전자-양전자를 충돌시키는 그 입자 가속기는 둘레가 무려 26.7km이다. 트랙을 빠르게 달리는 레이스 카 두 대를 충돌시키듯, 이 어마어마한 가속기 안에서 입자를 충돌시키며 힉스 입자를 찾는 것이다.

두 입자가 충돌할 때마다 힉스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충돌을 수십 억 번 반복하면 그중에 한 번은 어쩌다가, 힉스 입자가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힉스 입자를 캐치해내야 한다.


출처: 여기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ERN)에는 지하 100m 깊이에 건설된 거대 강입자 충돌기(LHC)가 있다. 둘레는 무려 27km.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힉스 입자를 감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힉스 입자는 질량이 크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겨난 지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 만에 더 가벼운 질량을 가진 다른 입자로 붕괴해버린다.1) 힉스 입자를 바로 감지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 그래서 그 입자가 붕괴돼서 만들어진 다른 입자들을 통해 흔적을 찾아내기도 한다. 저렇게 커다란 입자 가속기에서 입자들을 충돌시키면서, 엄청난 비용과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아부으면서도 과학자들은 언제 힉스 입자를 발견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아 나선 지 20여 년이 지난 후인 2012년, 드디어 힉스 입자를 발견해내고야 만다.

커다란 입자 가속기, 20여 년이 넘는 시간, 수십 억, 수천 억 번을 넘는 입자들의 충돌. 이 기나긴 여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건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힉스 입자가 존재한다는 걸,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어찌 보면 종교적일 정도로)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힉스 입자를 발견해낸 것이다.2)


존재함에 감사하며


가끔 인생이 덧없다 느껴질 때가 있다. 이룬 것도 하나 없고, 잘 하는 것도 하나 없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인가. 내가 태어난 의미는 무엇일까.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자면 한낱 점에 불과할, 겨우 백 년을 살다 가는 인생. 나 하나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데 힉스 입자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도 한낱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 년 사람 인생에 비하자면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만 살다 가는 힉스 입자는 그 점에 붙은 티끌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힉스 입자를 찾기 위해 수십 년간 애를 태웠다. 힉스 입자가 그저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과학자들은 열광했다. 힉스 입자는 스스로 ‘길고 긴 우주의 역사에 비하자면 한낱 점에 불과한 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 존재 자체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어쩌면 우리도 모두 힉스 입자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각주


1)
"엑시덴탈 유니버스" 중에서

It turns out that the Higgs particle is a shy little fellow. It takes roughly a trillion collisions between protons to coax one Higgs into existence, and, once created, the particle hangs around for less than a billionth of a trillionth of a second before changing into other subatomic particles. Clearly, a particle with such a fleeting acquaintance cannot be spotted directly. (p. 69)

힉스 입자는 굉장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녀석이다. 두 양성자를 대략 1조(兆) 번 가까이 충돌시켜야만 겨우 힉스 입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힉스는 1조(兆) 분의 십억 분의 1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다른 입자로 붕괴되어 사라진다. 이러니 힉스 입자를 직접 감지하고 관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
사실 나도 힉스 입자가 뭔지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이 글은 힉스 입자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과학 글이 아니다. 다만 '힉스 입자가 과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과학자들이 오랜 기간 힉스 입자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힉스 입자를 발견했다.' 정도만 알면 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번 주까지는 일이 바빠서 글도 자주 못 올리고, 다른 분들 피드를 찾아뵙는 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 짐작하시겠지만 "이지스팀잇(@easysteemit)"에서 준비하는 "초보 가이드"의 출간을 위해 막바지 교정 작업이 한창입니다. 교정 작업이 마무리되면 다음 주부터는 좀 더 활발히 스팀잇 활동을 하려 합니다. 저 잊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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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스팀잇을 들어와서 찾아뵈었는데, 너무나도 멋진 글입니다 bree님^^ 깊이 공감하고, 힉스 입자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 배웠네요! 저도 당분간은 바쁘지만 여유가 생기면 다시 자주 놀러오겠습니다~^^

저도 깊게 아는 건 아니지만, 과학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신비하더라고요. :)
바쁜 일 끝나면 저도 블로그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

사람들이 믿기로 결심하고 합의한 것들만 결국 존재 증명의 시험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이군요. 그렇게보면 말씀하신대로 과학자의 자질 중에 믿음은 엄청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네요.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이론상으로는' 그 가설이 맞다고 믿는 거죠. 그러면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거고요. 실제로 현대 과학(물리학)에서는 이렇게 이론적 가설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그게 실험적으로 증명된 사례가 참 많아요. 그걸 실험적으로 증명해내기 위해 때론 수십 년의 연구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점이 대단한 거고요.

이룬 것도 하나 없고 잘하는 것도 없다

한번씩 이런 생각이 들면 한없이 스스로가 작아보일때가 있어요. 그럼에도 내가 나로서 가치있다는거. 과학자들이 힉스입자를 발견한 것 처럼 저는 내 안의 가치를 찾아보겠습니다^-^ bree님 영어이야기 늘 기다리고 있어용. 이지스팀잇 마무리 잘하시고 얼른 돌아오세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해요. 나 스스로가 가치를 잦지 못할지라도, 더 큰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내 존재가치도 어마어마할 수도 있다고.. ^^;
넵. 이지스팀잇 마무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

브리님이 이시간에 포스팅을...ㅎㅎ
종교와 과학... 정신적인 믿음과 현실적인 믿음의 차이겠죠!
반지원정대에 버금가는 원정대란... 어마무시합니다 ^____________^
아직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이란게 세상을 알기엔 너무 미미한것 같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신비를 하나하나 밝혀내겠지만...

어쩌다 보니 밤 늦게 포스팅을 하게 됐어요. ㅎㅎ
이번주는 시간이 모자라 내내 비몽사몽이네요. -_-;;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었던 시대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더 많은 신비를 알고 싶어요. ㅎㅎ

가설을 증명하기위한 끊임없는 도전이 멋있죠... 과학자는 그래서 멋있습니다.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노력하는 ㅠㅠ

맞아요.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ㅠ.ㅠ
신념이 증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몇 십년의 연구 끝에 "결국 내 가설이 틀렸다"고 깨끗히 패배를 인정하는 경우도 있죠. 얼마나 허무할까요.
그러고 보면 다른 분야에서는 내 논리가 틀렸다는 증거를 들이밀어도 꿋꿋하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과학만큼은 자기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가 나오면 과학자들이 결국 인정하고 물러서는 모습도 멋져 보여요.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브리님 교정작업 화이팅!!! 스팀잇 가즈아!!!

고맙습니다!! 요즘 스팀이 안 그래도 잘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긴글 단번에 읽고 갑니다 ㅎㅎ
잘 보고 갑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쓰다 보면 자꾸 길어지네요. ^^;

아. 힉스 입자에 대한 글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수가 있나요? 마지막엔 코끝까지 찡해졌어요.

과학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가슴으로 (코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드디어 올려주신 과학관련 글을 한번에 정독했네요..어렵네요.ㅎ
근데 쉽게 잘 쓰셔주셔서 무슨 내용인지는 알거 같아요.
예전에 수학문제 풀다가 이거 철학인데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과학의 끝이 사람에 닿는다는 설명도 너무 좋았습니다.ㅎ
힉스입자는 로또 저리가라군요.ㅎㅎ
좋은 독후감 감사드려요~~ 저두 언제 용기내서 이런 책을 읽어볼 수 있길 ^^

저도 처음에 과학 책을 읽을 땐 무척 어려웠어요. 예전에 한창 유행하던 '과학 콘서트'였나? 책을 시도했었는데 어려웠었거든요. 이기적 유전자도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고..
물리학 쪽은 일단 대학 때 강좌를 들었던 게 큰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그 다음에 기초적 지식을 주는 책들부터 시작했고요. 철이님도 관심있는 분야의 책으로 쉬운 것부터 시작하시길 바랄게요. ^^

과학과 종교의 경계... 음... 어렵네요. ^^

동과 서로 나뉘어 반대로 내달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학과 종교, 과학과 철학이 서로 닿아있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참 오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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