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9] 알코올 사용 장애와 12단계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Jellineck는 음주형태에 따라 alpha, beta, gamma, delta, epsilon alcoholism의 5가지 형태로 분류하였다. Alpha형은 신체적, 감정적인 고통해소를 위한 심리적인 의존에서 알코올을 찾는다. Beta형은 신체적, 심리적 의존없이 기질적인 합병증을 보이는 경우이다. Gamma형은 금단증상 및 내성으로 세포대사의 변화가 일어나고 조직의 내성이 형성된 경우로 금주가 가능하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끊지 못하며, 미국에 많은 편이다. Delta형은 gamma형과 함께 질병형에 포함되는 형으로 임상양상은 gamma형과 비슷하지만 매일 술을 마시는 편으로 금주가 불가능하며, 유럽에 많다. 마지막으로, epsilon형은 일시적으로 폭음하는 경우이다.1

알코올 남용으로 인한 명백한 법적 혹은 금전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나는 안 마시려고 하면 두세 달은 안 마실 수 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문제음주에 대한 통찰을 하지 못 하는 경우를 빈번하게 보게 됩니다. 하지만 알코올리즘에 대한 Jellineck의 유형 분류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일시적인 금주 역시 알코올 의존 사이클의 일부입니다.

알코올중독은 절주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절주에 집착하는 병이다.2

위 인용한 문장과 비슷하게 혹자는 알코올 사용 장애(Alcohol Use Disorder)가 조절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조절망상'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보는데요. 망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망상의 정의를 잠깐 살펴볼까요. "망상은 현실에 맞지 않은 잘못된 생각이며 실제 사실과 다르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시정되지 않고, 교육 정도나 문화적인 환경에 걸맞지 않는 잘못된 믿음 또는 생각"3입니다. 이 정의를 따르면 조절망상이라는 용어가 적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코올 의존으로 인한 내성이나 금단 증상은 일차적으로는 뇌의 구조나 기능상의 문제입니다. 문제음주의 빈도나 심각성에 따른 뇌의 구조나 기능상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신경인지장애처럼 불가역적인 수준에 이르게 되는 때는 언제인지 사실 잘 알지 못 합니다. 공부가 필요합니다. 다만 알코올 의존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입원을 통해 해독 과정을 거쳐야 하며 약물치료가 반드시 수반돼야 합니다. 알코올 의존인 사람이 약물치료를 받지 않고 의지를 통해 낫겠다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조절망상입니다.

대부분의 정신장애가 그렇듯이 알코올 의존 역시 유전적 요소, 기질적 특성, 성격적인 취약성, 환경적 요인, 생애 스트레스 사건과 같은 다양한 변수가 상호작용한 결과입니다. 약물치료 이외에도 다른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이유이죠. 인지행동치료, 동기강화면담 등 여러가지 치료적 개입 중 역사가 길고 치료효과가 잘 검증된 비약물치료 개입은 12단계 중독 치료입니다.4 단주를 하고 있거나 단주를 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의 자조(self-help) 모임인데요. 1935년에 미국에서 시작돼 현재 전세계에서 자조 모임이 열리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여러 12단계 집단이 정신과 안팎에서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 사이트를 참고하세요. http://aakorea.org/)

12단계는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주자들의 경험에 근거합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결점을 찾아내어 개선하려고 하고 대인관계에서의 자신의 미숙을 성찰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및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아 이를 위해 살고자" 함에 있어 12개의 단계를 밟게 됩니다.5 알코올에 앞에서 무력했고, 알코올로 인해 우리 삶을 수습할 수 없었다고 인정하는 1단계부터 우주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게 되는 12단계까지 차례대로 통과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던 삶에서 타인의 안녕을 생각하게 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전과정에서 신의 도움을 갈구하게 됩니다. 종교는 분명 아니지만 영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죠. 치료가 되는 것은 나의 의지 때문이라기보다 신의 도움 때문이라고 봅니다. 나의 의지와 나의 고집 때문에 내 삶과 가족의 삶이 처참하게 망가졌으니 나의 의지와 나의 고집을 내려놓는 것에서 삶의 수습이 시작된다고 보고, 내 의지 대신 신의 의지에 나를 맡기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12단계에서 말하는 신이 개신교 신자에겐 하나님이 될 수 있겠지만 꼭 하나님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서 타인의 안녕을 고려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치가 됐든, 다른 어떤 사람이 됐든 간에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자기 및 타인의 삶을 조망할 수 있게 돕는 조력자로서의 신인 것이죠.

12단계는 중독을 의학적 질환으로 봅니다. 다만 성격의 변화가 뒷받침돼야 단주가 지속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성격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강조합니다. 알코올 의존을 지닌 사람은 문자 그대로 의존적입니다. 의존의 대상이 현재는 알코올이지만 단주 시기에는 담배를 비롯한 다른 물질이 될 수도 있고, 성이나 소비, 강박적 운동, 심지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타 여러 행위 중독에 빠져들 수 있죠. 어떤 대상에 강박적으로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충동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가 많아 사회적인 지지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의존을 갈구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의 지지를 이끌어내진 못 한다는 것이죠. 충동적 행동으로 인한 잦은 문제가 발생한다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 받기 쉽습니다.

조력자인 신의 도움을 받아 타인의 안녕을 고려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면, 제일 먼저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심한 어려움을 경험해 왔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도박 중독이든 알코올 중독이든 간에 중독은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의 인생까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무섭다고 할 수 있죠. 12단계의 5단계부터 10단계까지가 자기 성격의 문제점을 철저하게 검토하여 이를 개선하기 위해 힘쓰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잘 통과한다면 비로소 자기 문제에 관해 남탓하기를 그치고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가족을 비롯한 타인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됩니다. 그간의 행동 결과에 대해 잘못을 구하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확률이 높아지겠죠.

하지만 제가 12단계를 6개월 동안 진행도 해보고 참여도 해보면서 느낀 것은 우리가 알코올에 무력했음을 인정하는 1단계를 통과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설령 통과했다 하더라도 다시 통과 전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만성적인 알코올 의존으로 인해 간경화나 간암과 같은 심한 신체적 질병이 찾아온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경우들을 보며 그 환자 개개인의 나약함이나 취약성을 보기보다 나를 포함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인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12단계의 리더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며(물론 정신과에서는 의사나 정신건강전문요원이 진행의 주축이 되긴 하지만) 설령 진행을 맡고 있다 하더라도 진행자 역시 자신의 성격적인 문제를 들여다 보고 솔직하게 오픈하는 과정에 놓이게 됩니다. 저 역시 알코올 중독을 지닌 분들과 다를바 없이 많은 성격적 문제를 지닌 인간임을 생각해 보게 되는 과정이었죠.

짧게 쓰려 했는데 길어져 버린 감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알코올 남용 및 의존, 즉 알코올 사용 장애의 핵심은 알코올 사용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상태입니다. 알코올 사용 장애가 의심되는 경우 반드시 정신과 내원하여 정신과 의사의 처방하에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며, 제가 생각하기에 12단계와 같은 자조모임에 참여하는 것 역시 약물치료만큼이나 중요합니다. 12단계 치료 과정을 요약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조력자로서의 신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자신의 성격적 문제를 개선하여 궁극적으로는 타인의 안녕에 기여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중독은 의지만으로는 절대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내리막길에서 자동차 브레이크가 고장났는데 악셀레이터 밟으며 차를 멈출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ref)

  1. 임명호, 백기청, 이경규, 홍성도, 김현우, 이민규 (1997). 알코올사용장애의 유형별 특징. 신경정신의학, 36(5), 850-860.
  2. 하종은 (2000). 왜 우리는 술에 빠지는 걸까 (p. 317). 서울: 소울메이트.
  3. Amc.seoul.kr. (n.d.). [online] Available at: http://www.amc.seoul.kr/asan/healthinfo/disease/diseaseDetail.do?contentId=31898 [Accessed 10 May 2018].
  4. Witbrodt, J., Ye, Y., Bond, J., Chi, F., Weisner, C., & Mertens, J. (2014). Alcohol and drug treatment involvement, 12-step attendance and abstinence: 9-year cross-lagged analysis of adults in an integrated health plan. Journal of substance abuse treatment, 46(4), 412-419.
  5. 김한오, 박선희 (2013). 중독의 12단계 영적 치료. 중독정신의학, 17(2): 61-67.

*이 글은 교차 게시물(cross-posted material)로 http://slowdive14.tistory.com/1298732 에 동시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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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피드에 이렇게 나왔는데 아무래도 술 작작 먹으라는 경고 같습니다. ㅋㅋ

하하하하 현웃 터졌네요

정말이지 1단계에서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데 동의합니다. 오죽하면 정신분석 초기에 프로이트가 '저항'을 명명했겠어요. 인지행동 제3세대가 마음챙김, 수용을 트렌드로 잡게 된 데에도 이런 난점들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CBT가 정말 효과가 있을까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많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렌즈가 바뀌려면 대체로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게 분명한데 단기간에 그걸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더 의심스럽구요. 차라리 말씀하신 마음챙김이나 ACT가, 그것을 상담자 자신이나 내담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실천할 수만 있다면 보다 파워풀한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네요.

걱정이 정말 많이 되시겠어요. 전반적인 건강검진 차원에서 병원에 한 번 가보자고 말해 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저는 술을 못 마신지 몇달 되었는데, 그럼에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듭니다 ... 알콜을 조절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수없이 금주해야해서 슬퍼요 ^^;

저도 늘 캔맥주 한 캔씩 먹고 자고 싶은데, 와이프 눈치 보여서 눈물을 머금고 mylifeinseoul님처럼 강제 금주하게 되는 것이 슬퍼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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