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평등을 택할까.

in #kr-philosophy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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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동등은 다르다고 한다. 구별과 차별은 다르다고 한다. 다름과 틀림은 다르다고 한다. 미남과 추남은 틀리지 않고 다르다. 하지만 추남을 미남이라 하는건 틀린 표현이다. 개는 좋고 고양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미워하진 않으며, 길 가는 고양이를 발로 차지도 않는다. 하지만 개를 더욱 사랑한다면, 이건 차별이다. 추남에 대한 선입견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미남에 호감을 가진다면, 차별이다. 노인은 도움이 필요하다. 병자도 도움이 필요하다. 특정 계층을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잣대로 대한다면 그들의 삶은 어려워진다. 하지만 누군가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은 차별적이다. 차별은 구별에서 시작한다. 구별하지 않기 위해 일상에서 그들을 완벽하게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고,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상상해보라. 약자를 약자로 규명하고 약자를 돕거나, 약자가 스스로 약자를 자처할 때만 돕는다. 둘 모두 심각하게 차별적이다. 재능 있는 사람은 주목 받는다. 재능 없는 사람은 주목 받지 않는다. 재능 없는 사람은 노력이 부족했는가? 요즘은 노력도 재능이라거나, 노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들 한다. 당연히 나는 농구선수가 될 수 없었다. 아마 걷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 걷지도 못 할 때부터 농구공을 만졌어도 마찬가지다. 스포츠는 재능의 정수다. 그렇다고 프로 스포츠를 금지할 순 없는 노릇이다. 농구에 재능 있는 사람은 그럼 무얼 하고 살아야하나? '재능 없는 사람도 살 수 있는 사회'는 좋은 말이다. 근데 '재능 없는 사람'이라 구분 짓고 돕겠다는건 차별이 아닌가? 약자에 대한 배려는 하나의 역차별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약자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구분했기에 또 하나의 차별이다.

이처럼, 동물의 본성인 약육강식을 꺼내어 들지 않더라도, 평등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건 어렵다. 선입견을 본성으로 삼고 있는 두뇌를 가진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가치다. 선입견이 본성으로 삼고 있는 두뇌라는 표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겠다. 인간의 두뇌의 강점은 예측이다. 그리고 예측과 선입견은 동의어다. 우리는 부분을 보고 전체를 추측하고, 선입견을 만들어낸다. 만약 선입견이 없다면 우리는 아주 간단한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라지로 드릴까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예."하고 답하고 나는 카드를 건냈다. 나는 카페가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고 "라지로 드릴까요."가 어떤 음료의 라지 사이즈를 말하는건지 확인하지 않았다. 점원이 정확한 금액을 계산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카운터 너머에 있는 사람이 점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다. 점원은 내가 평소에 보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오늘도 어제와 같은 메뉴을 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소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재확인하지 않았다. 감정적인 부분까지도 마찬가지다. 나는 점원의 표정과 어투, 그리고 평소에 보아서 알고 있는 점원의 성격에서 "라지로 드릴까요?"라는 질문이 나를 빨리 처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익숙함, 친숙함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끊임 없이 오간 추측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모든건 자연스레 일어났다.

만약 추측이 선입견을 만들어낸다 하여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추측하는걸 금지한다면 우리의 삶은 지독하게 불편할 것이다. 구분은 하되, 차별은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 구분이고 어디부터 차별인지를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곁에 다가왔던 사람 중에 내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스스로 거의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 자부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타인으로 규명하지 않는다. 내 인간관계에 대한 철학은, 술이건 커피건 음료를 사이에 두고,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있는 상대라면 모두 동등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내 마음의 농도를 원치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과 친해지기 어렵다. 진심으로 대할 수 없다면, 내 표현에 분칠이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나를 아는게 아니라 내 분신을 아는 것이다. 자연스레 그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내 마음을 꺼내보일 수 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동등할 수 없다. 나를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나를 아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사람과는 코드가 안 맞아."와 같은 말을 흔히 한다. 많이 듣기도 했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토대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것이다. 나를 익명의 사람A가 아닌 나로 대한 것이다. 선입견이며 동시에 차별이다.

인간에게 개성이 사라지면 인류는 발전하기 어렵다. 제각각 다른 재능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서로에게 영향 받으며 인류는 발전한다. 인간이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건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문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도구다. 우리가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면 문자는 문명을 발달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아닌, 소통의 연장선에 머무른다. 일상적인 소통에 필요한 도구, 그 이상의 기능은 없다.

그래서 개성이 없어서 차별도 없는 인간사회는 후보군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런 인간사회는 발달가능성이 없는 모델이기에. 하지만 인류가 초지능을 만들어낸다면, 인간사회가 유지, 발달하기 위해 인간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인간의 개성을 모두 거세하고 재능을 획일화 시킬 수 있다. 자, 차별을 뿌리 뽑기 위해서 인간에게서 성별을 제거하고 자연생식기능을 제거한다. 인간은 모두 똑같이 생겼고 같은 수준의 지성을 지닌다. 동일한 교육을 받고 동일한 개성을 가진 인간들은 운송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우리가 자는 사이에 우리도 모르게 자동으로 전세계에 재배치된다. 그래도 차별은 남을 것이다. 가령 길을 나서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 그 사람과는 하루 뿐이지만 특별한 인연이 된다. 100명을 뽑아서 50명에게 초록 티셔츠, 50명에게 빨강 티셔츠를 입혀놓으면 같은 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끼리 무리 짓고 자신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찾아낸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간은, 원래 그런 종이다.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인간들이라 볼 수 있을까? 그것도 아슬아슬한데, 아슬아슬할 정도로 인간성을 포기한 상태에서도 인간은 차별을 극복하지 못 했다. 비록 하루 뿐인 차별일지라도.

예전에 앎에서 차별이 시작된다고 했다. 블레이드 러너와 사가에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More human than human(인간보다 인간답게)"라는 슬로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레플리컨트. 레플리컨트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렵지만 인간은 그들이 레플리컨트라는 사실을 알기에 차별한다. 사가에서도 그렇다. 외형적 특징을 노출하지 않으면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 없는 랜드폴인과 리스인은 서로의 외형적 특징을 확인하면 반목한다. 앎에서 추측이 시작되고 선입견이 형성되고 차별로 이어진다. 빨간 티셔츠를 차별하는데, 인조인간을, 외계인을 어떻게 차별하지 않겠는가.

멸종위기종도 더 귀여운 종이 주목 받는 사회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게 우선이다. 가벼이 만들지 말자. 우리가 평등에 다가가고 있는 양 떠들지 말자. 인간성에는 차별이 포함된다. 인간성을 포기할 수 없다면 평등은 영원히 이룩할 수 없다. 평등의 이름으로 나서는 이들은, 평등을 무시하는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는가? 그들의 지성을 폄하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그들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그들은 평등을 무시하고 차등을 정당화하는 이들을 모욕한다. 심지어는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는 나를,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지녔다 하여 비난하기도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지성을 키우는 일이다. 선입견과 차별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고 스스로를 억누른다. 위약 효과는 그 약이 위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구분이 차별로 이어지는 순간에 대해 끊임 없이 경계한다면, 구분 자체가 하나의 차별로 기능할 수 있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확연히 낮은 레벨의 차별로 남을 수 있다. 작은 수준의 평등이라도 성취할 수 있다.

나는 꽤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지만,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자신도 없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 사사건건 아는체 하며 말을 끊는 A가 하는 "점심에 커피나 마실까?"와 내가 하는 말을 항상 듣고만 있는 B가 "점심에 커피나 마실까?"를 동등하게 취급할 자신이 없다. B는 내 말에 전혀 공감하지 않지만 소심해서 겉으로 표하지 않은 것일 뿐이고,A는 내가 꺼낸 주제가 너무나도 반가워서 내 말을 끊어가며 이야기를 했을지 모를 일이다. 평소에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내가 A가 내 말을 끊는걸 여러번 묵인했기에, A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기에 가만히 말을 멈추고 들어왔던 내가 A를 내 말을 자주 끊는 사람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B의 연락을 A의 연락보다 반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A를 최대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A의 연락을 무시하진 않는 것이다. 나를 보고 싶어서 나에게 연락하는, 최소한 나쁜 목적은 없는 A를, 거짓말로 약속을 지어내어 거부하진 않는 것이다. 나는 그 이상을 할 자신이 없다. 내가 더 좋아하는 음식, 덜 좋아하는 음식이 있듯 더 좋아하는 사람, 덜 좋아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먹어보기 전에는 음식을 평가하지 않는게 고작이다. 그리고 일단 먹고 나면 차등을 둘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차별주의자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이유로, 같은 취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이유, 심지어는 같은 장소에 우연히 있게 되었다는 이유로 동질감을 느끼는 인간이 어떻게 차별주의자가 아닐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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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면으로는 친구와 친구간의 관계가 있고 부정적인 면으로는 정경유착과 청탁이 있죠.
감정이 결여된 사람이 아닌 이상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건 당연한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다면 약육강식도 당연하지요.

Nice post.I respect you very much because you contribute to steemit.I will do activities like you.I would like to extend the steemit.

생각해볼수록 인간은 참 심오한 존재인듯 합니다. 때론 평등으로 때론 차별로..어쩌면 상황에따라 각자가 유리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동물 ㅎ

남의 말에 끼어드는 A와 항상 경청하고 고개 끄덕이는 B의 일화를 보고 있자니 문득 제자신을 떠올리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소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말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많이 늘여놓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눈빛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그가 굉장히 대화를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요즘 술자리에서 너무 말이 많아졌습니다. ㅜㅜ

많이 떠들고도 말 잘 하는 사람이란 소리 듣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저도 노력 중입니다.

보상조정 목적으로 댓글에 보팅함.

봇 같은 컨셉이네요.

댓글보팅이 보상을 공정하게 할려고 하는 컨셉이라 좀 건조하죠.
주로 이건 좀 아니다 싶을 때 플러스 보트 목적으로 합니다.

저도 자기 이야기만 하는 친구보다는 제 얘기에 공감해주는 친구한테 더 자주 연락하게 되더라고요. 어쩔수 없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조금더 좋아하고 조금 덜 좋아하는 것의 차이가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그것에 '차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요.
생물학적으로도 상이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를 떠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과정들이 많습니다.
신으로 부터 독립되어서 인간이 우뚝 섰지만,
그 인간에 대한 개념을 제시한것이 계몽주의였다는 사실에서 본다면
그들이 가졌던 철학적 한계 때문에라도
우리는 좀더 유연한 판단을 위한 개념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고의 틀이 제시되고 수용되는 때가 온다면
지금의 관점으로는 어색할 그런 세상으로 변해 가겠지요.
현재기준으로 잔혹한 결론이 정상으로 받아들여 질지도 모르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살아서 새로운 세상을 보는게 꿈입니다.

추측이 선입견을 만들고 선입견을 완전히 배재할 수 있는 인간은 없는거 같습니다.
저역시 처음 봉사활동을 다닐때 '노인'은 더럽다 라는 편견을 가지고 청소해드리는것이 싫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그것에 대해 무뎌젔네요. 결국 저도 차별주의자긴하지만..(무슨말을하는거지..)
요즘 하락장으로 모두가 힘들어해서 스티밋 응원영상을 만들었습니다kmlee님 이거 보시고 힘내세요

도대체 얼마나 생각을 해야 이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겁니까...사고의 깊이를 헤아려보고 싶네요.

'나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한다'라고 말할 때 당당하게 '나는 차별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것이 대단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솔직한 것이겠네요. 모든 가식과 가면을 벗어던져야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라 생각합니다. 공자님마저도 좋아하는 제자는 따로 있엇을 지경이니...그 누가 모두를 평등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감사한 말씀입니다. 공감에도 감사드립니다.

다 안으로 굽지요 ㅎㅎ 즐거운 주말되세요 ㅎㅎ

다른 걸 다르게 대하는 게 공정이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가즈앗!!! ㅋ

각 개인마다 타고난 능력이 다르기에... 또한 어떤 능력이 고평가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다르기에... 어쩔수 없이 생길 수 밖에 없는거 같습니다. 단... 그것을 가치없다고 짓누르면 안될거 같습니다... 저도 어쩔수 없이 강사일 하다보니....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이렇게 구분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능력이 다 다르기에... 가르치는 입장에서보면 저렇게 어쩔수 없이 분류가 되더라구요 하나 못한다고 해서 왜 못해 이런거 보다는... 학업에 한정해서 그 아이에 맞는 방법을 고민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은 합니다.... 저도 어쩔수 없이 차별을 하는거 같아요.... 단... 그 사람들의 각자의 특성으로 받아들일려고 노력하는 약한 인간일 뿐인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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