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와룡봉추들에게는 기회가 있을까.

in #kr-philosophy6 years ago

pg.jpg
주군을 모시지 않고 초야에서 지내던 제갈량과 방통을 일컬어 와룡봉추라 부른다. 그들은 자신이 섬길 군주를 찾은게 아니라, 군주가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에게는 프라이드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는 군주를 기다렸다. 자신의 위치와 관계 없이, 자신의 가치를 믿을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와룡봉추와 같은 사람은 살아남기 어렵다. 능력 있는게 다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지칭하는 능력이 어떤 것인가는 화자에 따라 다르겠으나, 하고자 하는 일의 핵심이 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작가에게 필요한 능력은 필력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능력 이외의 무언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사회에서는 인맥과 배경이 중요하다. 능력을 내비칠 기회라도 얻기 위해서는 인맥과 배경을 가져야 한다. 간혹 운이 좋아서 능력을 내비칠 기회를 얻는 사람도 있지만, 행운은 행운일 뿐이다. 정치력이 없고 순수하게 능력만 가진 사람이 성공하기에는 각박한 사회다. 백번양보해서 인맥을 만드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는걸 인정하더라도 배경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맥을 만드는 난이도의 차이가 크다. 물론 태생부터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는건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과는 다르다. "당연히 세상이 그런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순간, 제갈량과 방통이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우연히 기회를 얻더라도 그들은 철저히 착취 당할 것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기에 그들의 업적은 모두 상급자의 공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작가들은 필력을 늘리는 것에 전념하지 않고 "이 작가 글 좋아요."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인맥을 쌓거나, "제 글 좋아요."라고 포장할 수 있을 능력을 쌓아야 한다. 아니, 이 선에서라도 머물러 주면 다행이다. 글의 가치가 아닌 작가의 이미지가 중요한 세상에서 "나는 대단한 사람이에요."라 내비쳐야 한다. 비단 글 뿐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에서도 타인의 능력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아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도 쉽지는 않다. 자신 밑에 들어온 신입사원이 자신보다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여도, 이를 적극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우연히 능력을 내비칠 기회를 얻어야 하며, 그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보호할 필요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능력을 제대로 인정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와룡봉추들에게는 기회가 없다.

제갈량과 방통의 자리를 현대사회에서 찾자면 행정관에 가까울 것이다. 행정관은 능력만으로 인정 받는 자리인가? 행정관 또한 행정능력보다는 조직 내에서의 정치력이 중요하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다른 어느 조직보다도 더욱 조직 내 정치력이 필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행정관이 될 수 없다면, 그들은 초야에서 행정학을 연구하는데라도 매진할 수 있을까? 교수도 학문적 성취보다는 인기가 중요해지는 세상이다. 아마도 그들의 학문적 사유의 깊이와는 관계 없이, 그들의 사유는 인정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착역은 골방철학자다.

현대사회에는 수많은 와룡봉추들이 있다. 재능을 갖고 있지만 재능을 발산할 곳을 찾지 못 하고 떠돌고, 자신을 굽혀가면서까지 기회를 얻으려고 하진 않는 프라이드가 있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사회는 그들에게 "순진하다.",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평가를 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영원히 '세상물정을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길 원한다. 그들이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순수한 사람들로 여겨지는 세상이 오길 원한다. 그리고 순수한 사람들의 가치가 인정 받는 세상이 오길 원한다.

과연 이 곳은 와룡봉추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까? 창작자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포장하는 법을 배우는게 아니라, 능력을 키우는 것과 창작 자체에만 전념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

Sort:  

잘읽었습니다! 되새김하게 되네요.

최근에 중드 신삼국지를 보면서 @kmlee 님과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회사를 다니면서, 제 상사인 주제에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못 알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에도 비슷한 감정이었습니다. 결국 2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제일 상급 부서에서 감사를 왔다가 제 업무를 발굴해가더라고요. 그리고 보고서로 위에서부터 지시가 내려오니, 바로 위 상급 부서에서는 이런 걸 왜 그동안 제대로 보고 안했냐,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님, 님한테도 제가 직접 한 번 말씀 드렸었거든요? 확 짜증이 났었죠ㅎㅎ

속이 시원해집니다! 그 분 문책 한 번 당했으면 ㅋㅋㅋ

늦게라도 인정 받으실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니네 직원이니 포상을 너희가 해줘야지/ 너희가 발굴했으니 너희 차원에서 포상해줘야지~ 서로 미루다가 인사이동 일어나고 저는 아무것도 득된게 없다는 점이 또한 함정이죠ㅎㅎㅎㅎㅎㅎ 그리고 전 퇴사했습니다.

아이고...

더 좋은 곳에서 더 중요한 직책을 맡으시길 바랍니다!!
이사람들이 말이야 사람을 몰라보고!!

여기가 와룡봉추들의 놀이터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kmlee님이 여기서 그런 한역할을 하시는 듯 합니다. ^^
저도 세상물정 잘 모르는편인데
사는데는 별 지장 없더라고요..
영원히 '세상물정을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ㅎㅎㅎ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겠죠. 현덕이 와룡을 삼고초려했던 것 처럼, 큐레이터들이 찾아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대한민국의 와룡봉추는 아마도 성인이 되자마자 굶어죽을것~ 이라는 댓글이 생각나네요ㅋㅋ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세상사는게 편한지 불편한지 그들어에게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와룡봉추한 사람들이 행복한곳 스팀이
아닐지...

마음에 훅 들어오는 글입니다. 자기PR시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사회는 킴리님이 진단하신 그대로지요. 이곳 또한 사회와 다르지 않아 글만 써서는 합당한 보상을 받기 힘들지요. 소통은 즐거움을 주지만, 소통과 자기 PR의 중간 그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삼국지를 빌어 적확한 비유로 와룡봉추나 경계 어디쯤에서 헤매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시는 기분이 듭니다.^^

그 순진이라는게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고지식하고 다소 완고하고 너무 자만한 것까지 포함하는 넓은 스펙트럼이라 치더라도, 정치력을 배제하고 평가하고 받을 수 있는 곳은 꼭 필요하죠. 사람들이 하는 것인 이상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적어도 세상에서처럼 아예 외면받는 이들이 넘쳐나는 곳은 아닌 듯도....아니, 앞으로 더더욱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가치를 인정 받는 세상
창작자들이 본인의 능력을 백분 발휘하는 그런 공간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와룡봉추에게 기회를 많이 주시는 많은 큐레이터 분들이 계시니까요.
지금 스팀잇이라는 공간은 인맥과 자본주의가 어느정도 존재하지만 순수하게 글을 보고 큐레이터를 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빛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5
JST 0.029
BTC 63117.29
ETH 2601.03
USDT 1.00
SBD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