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pen 공모전] 내 안의 그늘그늘한 그늘들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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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내 안의 그늘그늘한 그늘들.
그곳을 다시 지나가려면
눈 감고 건너야 할 것 같아

  1. 나는 보드게임을 좋아한다. 삼촌이 카탄을 가져왔을 때부터 보드게임을 했으니 초등학교 2학년부터 시작한 셈이다. 삼촌은 카탄밖에 하지 않지만, 나는 간간이 친구들과 함께 다른 보드게임도 즐기게 됐다. 저번에는 텀블벅으로 보드게임을 하나 샀다. 룰은 간단한 게임이었다. OX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낸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O인지 X인지 맞춘다. 끝. 역시 심플 이즈 베스트다.

  2. 플레이어의 과반수가 맞추면 질문자는 점수를 얻지 못한다. 플레이어의 과반수가 틀리면 1점이다. 대학교 후배들이 한 질문을 예시로 쓰고 싶지만, 여기에 썼다간 NSFW를 붙여야 하니 그만둔다. 혜지야 너 그러다 진짜 대자보 붙어.

    설날 때 가져가서 가족들과 해 보니 남동생이 질문을 잘 낸다. '여자친구와 연애한 지 6개월이 지났다'는 문제로 모두를 틀리게 해서 1점을 획득했다.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걸 어떻게 맞추니? 내 동생이지만 너무 숭악한 놈이다.

  3. 이 게임의 핵심은 O인지 X인지 헷갈리는 문제를 내는 것이다 . '르캉은 우울한 성격이다' 문제를 내며, 가족들이 맞출 수 있을까 궁금해한다. 이모와 남동생은 O를, 여동생과 엄마, 삼촌은 X를 냈다.

    1점 획득.

    내게는 가족들도 모르는 그늘이 있다.

  4.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놀고, 행복하다가도 그늘이 나타난다. 그늘은 오늘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너를 싫어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귀를 막지만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를 곧 떠나갈 거고, 네가 원하는 건 하나도 갖지 못할 거야- 항상 그랬었잖아.

    나는 그늘이 틀렸다는 걸 확인시켜주려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늘이 이기는 날도 있고 내가 이기는 날도 있다. 그늘은 분명히 내 안에서 나왔지만 왜 그늘을 쫓아내려면 다른 사람의 확인이 필요한 걸까.

    해결책은 오직 그늘과 싸워 이기는 것뿐인 걸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이빨이 아플 때 치과에 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귀찮고 무서우며, 돈도 드니까 진통제를 먹고 건강치약 따위를 쓴다. 본질적인 문제는 직접 마주치기 무섭다. 나도 그렇다. 진통제를 먹듯 누군가에게 확인을 갈구한다. 그렇게, 문제에서 도망친다.

  5. 마음속에는 두 마리 늑대가 산다. 한 마리의 색깔은 흰색이고, 이름은 기쁨과 행복, 사랑이며 감사다. 다른 한 마리는 검은색이고, 의심이며 절망, 그늘이자 슬픔이다. 두 마리는 항상 싸운다. 둘 중에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당신이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나는 언제나 그늘에게 먹이를 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늘에 먹이를 준 적도 있었다. 검은 늑대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대로 뒀다면 아마 슬픔에게 물려 죽었겠지.

    그러나 예전, 나 대신 기쁨에게 먹이를 준 사람이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그곳을 들락거렸고(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2년간 딱 하루 빼고 매일 드나들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던 기쁨은 천천히 기운을 회복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시간들은 부드러웠고, 기뻤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이런 감사한 일도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6. 안타깝게도 2년의 시간동안 기쁨을 돌보는 법은 배우지 못했었다. 누군가가 떠나고 오랫동안 헤맸었고, 나 대신 기쁨에 밥을 줄 사람을 찾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 일기를 쓰고서야 느낀다. 평생 기쁨을 돌볼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몰래 고백하자면, 근 2년간 드물게 그리고 대충 일기를 썼었다. 고통의 뿌리를 뒤져보는 건 더 큰 고통이었으니까 대충 내 마음을 읽고 대충 글을 썼다. 그래서 슬픔들은 더 커지기만 했었다.

    실체를 모르던 슬픔들은 씀으로써 명확해진다.

  7. 마음 늑대 기르기 가이드 머릿말 - 행복한 일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찾아들 것이오, 우울한 일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우울한 일들이 너를 찾을 것이다.

  8.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다. 그러나 무너진 모래성 앞에서 영원히 울고 있을지, 아니면 눈물을 닦고 일어나 걸어갈지 선택하는 건 나 자신이다. 오늘부터 피둥피둥 살이 찐 그늘이를 다이어트 형에 처하고, 흰 늑대에게 먹이를 줄 생각이다. 미안해 기쁨아. 오랫동안 너에게 밥을 주는 걸 잊고 있었단다. 날 용서해 줄래, 오늘은 같이 자자꾸나.

  9. 어제 밥을 먹다 송곳니가 깨졌다. 오늘 아침에 바로 치과에 갔다 왔다. 몸의 고통은 이렇게나 뚜렷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알기 어려운 법이다. 그래도 몸의 고통에 직면해서 다행이다. 치과 치료를 받듯, 내 마음도 나을 수 있길.

P.S 마음의 고통을 알기에는 일기가 제격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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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을 이렇게 재밌게 쓰시다니. ㅋㅋㅋ
내면의 이야기 이런거 안좋아하는데도 재밌게 봤어요.
흰색 검은색 너무 이분법적이에요. 황금색 골든 이트리버도 키우고 크림색 퍼그도 키워요.
딱히 기쁘다고 그게 기쁨이 아닐 수도 끝없는 슬픔도 슬픔 혼자만은 아닌거 같아요.
마음 속 다양한 동물농장을 가꾸면서 저랑 술도 한잔하고 합시당 ㅋㅋㅋㅋ 전 르캉님 만날땐 개미핥기에게 밥 주고 나갈께요. ㅋㅋ

기승전 술한잔 역시ㅋㅋㅋㅋㅋ

좋아요!!!! 저는 오리너구리한테 밥 주고 나갈게요 사실 완전히 까맣고 완전히 흰 게 어디있겠어요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있는 새가 없듯 슬픔도 기쁨도 다 짬뽕돼있는 거겠죠 (오리너구리 박제가 맨 처음 등장했을 때 학자들이 동물 여러마리를 꿰매 놓은 줄 알았대요) 술 한잔 증말 하고싶네요 환님도 살룬님 보고싶어해용 저도 그렇구 ㅋㅋㅋㅋㅋ 아 사모예드 키우고 싶다! 동물들 관리좀 잘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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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룬님이 끝까지 읽었다면 정말 재밌는 글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살룬님 고급진 분이시라 글도 가려 읽으신다구...!

네 ㅎㅎ 살룬님은 특히 가려 읽으세요..ㅋㅋ

사실 잘 살펴보면 그늘이 100%이라고도 얘기할수 있겠죠. 항상 상황은 변하니까요. 좋을때도 변하고 나쁠때는 더 나쁘게 변하고, 간혹 나쁜게 좋은 상황으로 변하기도 하지요. 물론 좋은 게 더 좋게 변하기는 하지요. 그렇지만 영원하지 않지요. 사라져버리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지만 그 고통을 계속 보고 성찰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마음의 고통을 알기 어려운게 아니라 알려고 시도를 하지 않는 거겠죠. 결국은 자세의 문제이겠지요. 흰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그 마음을 항상 부여잡고 있어야겠지요. 쉽게 재미나게 쓰신글을 꼬아서 댓글달아서 죄송합니다.

저도 기쁨이에게 간식 하나 주고 가요 ~^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리 기쁨이 배꼽인사하자! 고마워요 에드워드님ㅋㅋㅋㅋㅋㅋ

O/X는 확률이 50:50이죠. ㅎㅎ

답만 피해가는 날도 있다죠. ^^

저도 우울하고 힘들때만 일기를 쓰는 사람이라 일기장이 되게 맛으로 치자면 쓴맛인데, 남의 일기는 역시 우중충해야 제맛이군요~ㅋㅋㅋ
르캉님 그늘그늘한 일기 이상하게 중독성 있고 맛나요!!
발냄새 나는데 중독성 있는 두리안 같다고 해야할까... > <♥

무엇보다 제목 라임이 너무 좋네요-
내안의 그늘그늘한 그늘들.

그늘그늘한 그곳들 그 기억이 스며 있는 곳 지나갈 때면 바라볼 수 없어서 눈 감고 지나가구...
기쁨아 주희누나가 간식 주셨다 인사해 !!

아이고. 송곳니 참사부분에서 격한 슬픔이 전해집니다. 치아는 평생가니 잘관리하시기입니다! 더불어 시련을 이겨내고 기쁨과 친해질 그 마음에게도요..^^

감사합니다 밸류업님 진짜 송곳니 깨져가지고 멘탈도 바사삭 해서 그날 술자리 망쳤어요 ㅠㅠㅠㅠㅠ 앞으로도 열심히 관리해야겠어요... 마음도 잘 관리하고. 밸류업님도 기쁨이와 즐거운 시간 되세요!!!

마음의 고통은 알기 어려운 법이라는데 공감합니다. 제 안의 기쁨이와 슬픔이는 누가 더 살이 쪘는지 찬찬히 바라봐야겠어요

찬찬히 바라보고 둘 다 쓰다듬어 주세요 두 마리 다 키우지 않으면 큰일나는 친구들이랍니다

역시 고수는 마지막에 나타난다더니! 르캉님 필력 엄청나네요.
저도 힘들어서 검은 늑대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오늘부터 흰 늑대, 키워볼께요.

고수라니 과찬의 말씁입니다(쑥스럽). 감사합니다. 흰 늑대 밥 주면서 검은늑대도 쓰담쓰담 해주세요. 두 마리 다 건강하게 키워야 해요.

레캉님의 이런 일기 너무 좋은데요...

실체를 모르던 슬픔들은 씀으로써 명확해진다.

대공감!!!!

아이고 저는 르캉이라니까요 르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아요 실체를 모르던 슬픔들은 쓸수록 명확해지는 법이에요 에너자이저님의 슬픔도 쓰여져서 알 수 있다면 좋겠네요

ㅋㅋㅋ 네~ 르캉님! 르캉님! 알고 있었는데... 아! 이건 데쟈뷰... 혹시 제가 이전에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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