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마 블루

in #kr-pen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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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조금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은 간단하다. 등심 한장, 양상추, 파프리카를 미리 간편하게 1인분을 꺼내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 놓았다. 간단하지만 든든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식물들에 물을 주며 하늘빛을 본다. 눈으로 보고 난 후에는 앱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오늘은 내 눈이 정확했다. 외출하기에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집에서 나와서 물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필사적으로 무어나를 골똘히 생각을 했었는데,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던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걷다보니 물가에 도착했다. 어김없이 거위들은 항상 있던 자리에 있었다. 아침에 나무 데크에서 빵을 던져주는 사람들이 많으니, 거위들은 아침이면 사람이 없어도 꼭 나무 데크 주변에 모여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위들이 있는 자리에서 빵을 던져주는지, 거위들이 사람들이 빵을 던져주는 자리에 모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물가를 따라 이동하는 거위들을 보폭을 맞춰 걸으며 잠시 따라다녔다. 그러다 뒤를 돌아 집으로 왔다. 평소보다 훨씬 적게 걸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틀어놓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는 도서관을 가기 위해 다시 나왔다. 당연히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도서관에는 내가 추천 받은 책이 없었다. 대신 지난 번에는 대출중이라서 빌리지 못 했던 책이 있어서 금방 고르고 나올 수 있었다.

일어난 일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이유는 나에게 떠오른 어떤 생각의 발단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행적을 더듬어 보아도 어디서 시작된 생각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 생각이란 어머니와 나누었던 대화와 Love, Death & Robot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Zima Blue에 관한 생각이다. 얼마 전에 어머니와 생명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힘이 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동물이기에 갖고 있는 욕구와 갈등 없이 암석처럼 존재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어쩌면 비슷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어머니는 Zima Blue를 보고는 무위자연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당신의 말씀처럼 갈등도 욕구도 없이 고고하게 존재하는 암석처럼 지마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척도를 나눈다고 할 때 최상의 만족감을 1이라 하자. 어떤 존재가 아는 아름다운 것이 한가지라면 그것을 볼 때의 만족감은 1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가 아는 아름다운 것이 두가지가 되면 그 둘 모두가 1이 될 수 없다. 욕구가 한가지라면 그 욕구가 충족될 때의 만족감은 1, 욕구가 여러가지라면 절대로 1이 될 수 없다. 어쩌면 그리 다르지 않은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면적인 복잡한 생명체이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만족감도 1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마처럼 나를 분해할 수 있다. 1에 도달하지 못 하는 사람의 삶을 지켜보는, 나 자신의 관찰자로서의 나의 만족감은 1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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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이브닝! 저는 코박봇 입니다.
보클했습니다 :)

아니 너무 오랜만 아니십니까... ㅠㅠ

그러게요...

지마 블루는 러브데스로봇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발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생각할 거리가 많은데 심지어 생각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뵙니다.

오랜만에 뵈서 너무 좋습니다. ^^

감사합니다.

호불호가 꽤 갈릴 시리즈의 상당히 좋아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저는 '죽음은 더이상 죽음이 아니다'는 느낌이 들더랍니다.

감사히 보고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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