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담수첩] 태풍이 지나가도 벌초는 해야 한다. 큰집 장손 귀 따가우라고 올리는 글.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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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몇 시간 뒤면 나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409km를 달려야 한다. 어제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는 처서였고, 오늘은 할아버지의 제삿날이다. 그리고 내일은 조상님들 묘에 웃자란 풀을 베는 날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제사를 우리 집으로 모셔오고 나서는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지 않기에,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날은 연중에 벌초하는 날이 유일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는 어젯밤 꿈에 벌초하러 가기 싫다고 아버지께 어린아이처럼 떼썼다. 느낌이 좋지 않다. 안전 운전해야겠다. 벌초하기로 한 날은 이미 정해놓았는데, 무지막지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무지막지했는지 아닌지는 내려가보면 알 것이다. 다행인지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아니다, 지금 억수로 쏟아져야 하는데,,, 내일 내려가는 중에 태풍을 맞이한다면...앞차 조심, 뒤차 조심,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를 옆 차 조심. 그리고 나. 지켜주세요, 조상님들.

우리 시골의 선산은 네 군데로 흩어져있다. 네 개의 산을 타야 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적으면 8명, 많으면 12명의 남정네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인다. 매년 고정적인 8명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유동적인 일손들이 달라붙는다고 해서 끝나는 시간에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큰형으로서 동생들이 참여를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요하지 않는다. 알아서 와야지, 나처럼. 이거시 장손의 무게인가.

군대에서 예초기를 메고 제초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 후임들이 열심히 풀을 베어낼 때 나는 운행을 나갔었다. 벌초할 때도 예초기가 내 등위에 업힐 때는 이동할 때뿐이다. 동생들이 와야 할 이유이다. 재작년부터 조금씩 풀을 깎아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베어낸다고 표현하기엔 무덤 위와 주위로 자라난 풀과 손가락 마디만 한 나무줄기들이 억세다. 그런 것들을 깎아내려면 플라스틱 줄로는 어림도 없다. 억센 풀과 나무들은 어마 무시한 칼날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다.

아침 7시 무렵에 시작하는 벌초는 사이에 점심을 먹고, 한두시가 되면 얼추 마무리가 된다. 이번에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안 그래도 길이 험한데 태풍으로 사라져버린 길을 만들어가며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길을 내기 위해 전기톱이 동원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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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중에 지나가다 보는 이 정도의 숲은 양반이다. 편백나무가 유명한 지역이라 군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내일은 몇 봉이나 벌초를 하게 될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못해도 12-15봉을 하는 것 같다. 나로 하면 증조할아버지 밑에 손들이 모여서 벌초를 한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막내이시기에,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 두분과 할아버지 형제 세분, 그리고 우리 할머니 묘까지 치면, 6봉만 하면 된다. 그런데 큰집 놈들은 조상님들 벌초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장손의 권리는 챙겼지만, 의무는 다 하지 않는다.

작년에, 몇 해 전 돌아가신 큰집 아재의 아들이 찾아왔다. 나와 항렬이 같고 나보다 나이 많은 그놈은 배시시 웃는 낯짝으로 작은집 당숙들을 맞이했다. 전화로만 온다고 한지가 몇 년째였다. 쌓아둔 돈은 많았지만 지독한 구두쇠였던 아비를 닮았는지, 에쿠스란 이름을 달고 처음 나온 각이 진 오래된 차(한마디로 1세대 에쿠스)를 끌고 왔다. 처음왔으니 선산의 산세를 알 리가 없었다. 반바지에 샌들을 이쁘게도 신고 왔다. 그래도 따라나선다는 게 용했다. 아, 내가 진정 장손이었어야 했는데, 3대밖에 안되어 한이로다.

치과의사가 낫을 잡아봤을 리 만무했다. 험한 길을 부부끼리, 처음으로 따라나선 다는 것이 이제부터 장손의 도리를 다 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여태 너네 집 해준 벌초값만 받아도 수백은 되었을 것이다'를 속으로만 조잘되었다. 한데, 행보가 심상치가 않았다. 조상들 무덤에 절은 했지만 본심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 누구의 묘인지 보다, 정확히 어디인지가 중요해 보였다.

점심을 먹을 때가 되어 작은 할머니 댁에 모였다. 장손의 손에는 7-8센티의 두께는 되어 보이는 A4용지가 들려있었다. 캬아. 아비가 남긴 재산 확인하러 온 거구나. 그래서 표정이 그리 밝았나? 필지 하나씩 정성을 들여 인쇄도 했구나. 다시 한번 되뇌었다. 내가 장손이었어야 했다. 밥 먹다 체할 것 같아, 남은 걸 빠르게 입속에 욱여넣고 담배를 피러 나갔다. 내 것일 수도 있었을까. 속으로 조잘되어도 내 것일 수 없는 것임을 아니, 그놈이 더 괘씸했다. 땀은 내가 네 몫까지 흘리나 보다 했다.

올해도 왔으면 좋겠다. 일은 못해도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렇게 땀 흘리며 당신네 집 것까지 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 뭐 작은 집이라도 우리 조상도 맞으니 하는 것이 도리이겠지. 그럼 돈이라도 주던가. 챙겨 먹을 것만 챙겨 먹고 뱉어낼 것은 모르는 작태라니.

이제는 보내주어야 할 조상님들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데 아버지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보다. 아버지는 누구의 묘인지 몇 대조 인지 꽤 차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외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증조할아버지, 거기까지면 나는 족하다는 생각이다. 그분 아래 손들이 매번 이렇게 모이고 있지 않는가. 어떤 곳은 이제 묵어서 땅인지 무덤인지 분간이 되지도 않는다. 그런 곳들은 대게 손이 없는 양반들이다. 그래서 비석도 없다. 길도 없는 그곳을 아버지는 헤집고 가 조금은 무덤처럼 보이게끔 하고 오신다.

장손 욕하다가 이렇게 글이 길어졌다. 못 오면, 고맙다고 전화라도 해주고, 넉넉히 돈도 챙겨줘라. 많이도 물려받았잖아, 이놈아!


벌초하러 가는 길은 즐겁다. 남도의 먹거리를 맛볼 수 있고, 남도의 소주, 잎새주를 원 없이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작은 고모 내외는 시골에서 식당을 한다. 그곳에서 모두 매번 모였었다. 사촌들끼리 라 그랬나, 챙겨주면 모르고, 조금 덜 챙겨주면 서운하다 해서, 작년에는 고모부가 다른데 가서 드시라 했다. 그래야 이제껏 얼마나 잘 챙겨줬는지 알거라면서. 맛도 맛이고. 맞는 말이다. 가족들끼리 오히려 더 하다. 옆에서 봤을 때 덜 챙겨준 것도 없다. 더 챙겨줬으면 모를까.

작년에 벌초를 마치고 실컷 먹고 마시고, 식당에서 자고 일어나 홀로 나와 낯익은 얼굴을 뵈었다. 한승원 선생님이 앉아 식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곁눈질로 고모에게 맞아요?라고 물으니 끄덕끄덕하셨다. 이미 그분이 그 동네 사신다는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한강 작가가 유명해지고 얼마 안 되어 실제로 뵙게 되니 더 반가웠다. 부녀의 작품을 아는 것이 없어 아는 채는 못했다. 단골이시라니 이번에도 뵐 수 있으려나. 그러나 나는 아직도 책을 읽지 못했다. 내년 벌초 때는 꼭 읽어 우연히 뵙게 된다면 인사를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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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랏, 형이 간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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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공감되는 글입니다.
장자고 장손이고 당숙이고 대도시 살면 안오기 쉽상이고
와도 구경만 하다 서둘러 자가용에 오르지요.
태어나면서 예초기 돌릴 줄 아나요?
해보면 다 하지... 그 어려운 게임도 척척 하면서...
암튼 얄밉기 이를데 없다는....

한승원 샘이 그 지역에 사시는군요.
<장마>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꼭 싸인 한장 받아 놓으세요. ㅎㅎ

장손만 하라는법있나요.
집안이 다모여서 해야지요.

장손만 안와서 문제에요. 재산만 물려 받고...
다 같이 모인다는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장손의 권리는 챙겼지만, 의무는 다 하지 않는다.

집안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정말 얄미울것 같아요!
저도 몇년째 벌초하러 못갔는데... 에구!! 올해는 꼭 참석해야 겠네요~

둘 다 어린나이였으면 한 대 쥐여박고 싶더라구요.
작년 스팀잇 가입하고 벌초했다는 글을 올렸는데 일년 금방이네요 ㅎㅎㅎ

지금쯤 풀깍고 계시겠네요.
친지가 많으면 뒷짐 지고 있는 분들 꼭 있어요..ㅎㅎ

벌초는 내일 일찍 일어나서 해야죠. 아침부터 부지런 떨어야 대낮에 땡볕을 피할 수 있습니다 ㅎㅎㅎ
제주이신 저희 아버지가 일하시는데 뒷짐지는 동생들이 있을리 없어요. 큰집 장손이 문제지요...

하늘이 진짜 아름답네요...
태풍갔으니 한동안 좀 깨끗한 공기좀 .......
줬음 좋겠어용

음...요 고양이는 되게 약아보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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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엔 새끼 베고 집사를 선택했어요 ㅎㅎㅎ
오빠가 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꾸뻑 꾸벅이네요.

에이.. 정말 얄밉네요... 하늘에 계신 그 장손 부모님들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산 4개를 타야하다니.. 게다가 이 날씨에 말이에요..
남도에 가신다 하시더니 이것 때문이셨나 봅니다.^^
내일 벌초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

벌초 힘들죠 ㅜㅜ 기계 돌리다가 돌튀기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던데..위험!! 산올라가다가 벌레도 조심해야하고..

묘역 관리 힘들죠. 저희 집은, 얼마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희 어머니 아버지 선에서 더는 관리 못하겠다고 모두 화장장으로 옮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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