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m TV #9. 한 전쟁영화광의 크리스마스

in #kr-movie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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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좀 멀었다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으레 손이 가는 영화가 있다.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의 Stalag 17(제 17 포로수용소, 1953)가 그것인데, 고전 영화 중에서도 2차 대전 소재를 유독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이상적인 엔터테인먼트도 드문 편이다. 제 17 포로수용소의 장르는 코미디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순전히 재미를 기준으로 봐도 좋아할만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드물게도 개인주의자 캐릭터가 주인공인 점 역시 매력적이다. 나아가, 그런 인물이 참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자세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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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듯한 장면.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대표하는 사진은 아니다.

제 17 포로수용소는 2차 대전이 종전한 후 약 10년 정도 되어 영화화된 작품이다. 원래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창작자들이 오스트리아의 포로수용소 17B에서 실제로 겪은 일들을 가지고 만든 것이었다. 실화를 토대로 해서인지, 캐릭터 하나하나로부터 실존 인물에서나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개성을 느낄 수 있다.

광대 노릇을 도맡아 하는 두 명, 전쟁통에 정신이 이상해져버린 명문 법대생, 성대모사를 잘 하는 이야기꾼, 금수저 출신 대위, 아내가 외도중인 것이 분명하지만 눈치 없는 순진한 남자, 유명 여배우 '덕후', 정의감이 넘치는 마초형 캐릭터 등등의 수용소 내 일상들이 펼쳐지는 와중에, 영화는 한 커다란 갈등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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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요 캐릭터들이 담긴 프로모션 사진

원작 뮤지컬 시절부터, 제 17 포로수용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전쟁 포로의 생활을 희화화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실제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이다. 제 17 포로수용소는 인간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진부하다면 진부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는데, 실화에 기초해서인지 그 방법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 자체가 진부함을 넘어서게끔 해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아픈 역사란 웃으면서 볼 수 있을 때 치유와 소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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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점호를 하러 오는 독일군 슐츠를 맞이하는 수용소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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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댄스 파티를 여는 수용소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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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나가버린 법대생에게 부모님의 편지를 읽어주는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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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포로수용소의 메인 포스터

이 영화는 세 명의 배우를 탑 크레딧에 내세웠는데, 주연 윌리엄 홀든(William Holden)은 개인주의적이고 껄렁껄렁한 캐릭터를 자주 맡았던 배우이다. 콰이 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에서도 그랬고, 로맨스에 속하는 피크닉(The Picnic)에서도 그랬다. 윌리엄 홀든은 제 17 포로수용소에서 맡은 J.J. 세프턴 병장 역으로 그 해의 남자 주연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런 것을 떠나서도 세프턴은 홀든이 연기한 가장 매력 있는 배역이었다고 생각한다.

세프턴 병장은 수용소 내에서 암시장을 장악한 인물로, 그냥 담배도 아닌 시가를 항상 펴도 될 정도로 재어놓고 있으며, 각종 물건들을 교환하는 것이 그의 작은 사업의 큰 부분을 이룬다. 심지어 수용소에서 알코올을 제조하고 쥐를 사육해서 도박거리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그런 대가로 담배 등을 받고 장사를 해서 부를 불려나가는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을 도와주는 조수 쿠키가 영화의 나레이션 역할을 맡고 있다. 쿠키 입장에서도 세프턴은 그리 친숙한 사람은 아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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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재산권과 개인 권리를 주장하는 세프턴과 그를 수상하게 생각하는 몇 명의 동료들

물론, 장사를 잘 해서 독일군으로부터 더 나은 음식이라던가 오락거리를 제공받는 세프턴을 아니꼬워 하는 동료들도 있다. 이들은 유독 애국심과 정의감, 전체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인물들이다. 이에 대해 세프턴은 '이곳에 있는 동안 최선의 편의를 누리다가 나가겠다'고 응수한다. 수용소에 도착한 첫 날 물품을 도둑맞은 후로는 앞으로 어떻게 생활할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으며, 각자 능력껏 이득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아마 그 정도에 머물렀다면, 세프턴은 자신과 사상이 다른 몇 명의 강경한 동료들과 거리를 두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전시에 군인이 지켜야 하는 원칙 중 하나에 따르면,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도 가능한 대로 적군을 방해해야 한다. 그래서 수용소 수감자들은 끊임없이 탈출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제 17 포로수용소도 예외는 아니므로, 두 명씩 짝을 지어 탈출 시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세프턴이 속한 막사에서는 탈출에 번번이 실패하였고, 결국 막사 동료들은 그들 중 누군가가 독일군에게 정보를 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숨겨두고 듣는 라디오를 압수당한다거나, 여러 모로 누군가가 첩자 짓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계속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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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에 실패해서 주검으로 돌아온 동료들을 바라보는 소년

그러다가 던바 중위가 막사로 들어오게 된다. 금수저에다가 세프턴과 같은 고향 출신인 던바에게, 세프턴은 유독 까칠하다. 장교로 입대하는데 있어 중위의 집안 배경이 작용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던바는 수용소에 들어오기 직전, 작전을 통해 독일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힌 사실이 있다. 그를 영웅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프턴만이 삐딱한 태도를 취한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지만, 수용소 동료들의 의심대로 막사 내의 첩자는 존재한다. 던바는 결국 수용소 최고 관리자인 셰어바흐 대령에게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게 된다.

안 그래도 세프턴을 의심하던 동료들은 이때부터 확신을 가진다. 의심은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바뀌고, 결국 밤에 그의 입을 막고 집단폭행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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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프턴이 던바를 팔아넘겼다고 확신하고 그를 폭행하러 다가오는 동료들

그때부터, 수용소 내의 정치나 동료들의 탈출 성공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던 세프턴의 생활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의 사유 재산은 이제 아무나 막 가져다가 쓸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는 그것을 막으려는 시도조차 포기한 상태이다. 이제 그의 목적은 단 하나, 그에게 이렇게 피해를 입힌 진짜 첩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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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자의 흔적을 눈여겨 보게 되는 세프턴

그리고 세프턴은 결국 첩자를 찾아내게 된다. 사실 애초부터 문제는 첩자를 찾는 것보다는 조용히 그를 없애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대놓고 고발해봤자 첩자는 그냥 독일군에게로 도망갈 것이고, 독일군은 그를 다른 수용소에 심으면 그만인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세프턴은 이 문제 역시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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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바 중위 구출 작전 직전에 첩자의 정체를 폭로하는 세프턴

결과적으로, 가장 개인주의적이었던 세프턴은 스스로의 신조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중위를 구출하는 가장 영웅적인 일을 해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세프턴 캐릭터가 개인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게 된 면도 있지만, 사실상 자신에게 피해가 오면서부터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각성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방식이 결국은 이겼다고 볼 수 있다.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평소에 정의나 애국을 입으로 하지 않았던 캐릭터 세프턴은 동료들을 떠나면서 말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에서 네놈들을 거리에서 마주치면, 아는 척 하지 말자고. 마치 현재의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란 표현에 해당하는 듯한...

그러나 세프턴이 진짜 원망과 미움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수용소라는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서로 부딪쳤을 뿐이다. 남을 챙기지 않았을 뿐 피해도 주지 않던 세프턴은 전쟁 전이나, 후에나 같은 인물로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제 세프턴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가 한 일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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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를 총지휘하는 세어바흐 역할의 오토 프레민저(Otto Preminger)

덤으로, 세프턴을 연기한 윌리엄 홀든 외에 메인 크레딧에 올라간 두 배우 역시 이 영화의 흥미점이다.

우선, 살인의 해부학(Anatomy of a murder), 로라(Laura), 엑소더스(혹은 영광의 탈출, Exodus)로 유명한 감독이 셰어바흐의 역할을 맡았다. 미국으로 귀화했으니 영어식으로 읽으면 프레민저, 또는 프레밍거는 원래 배우 지망생이었다지만, 그가 연기하는 장면은 매우 드물다. 영화 초반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임 당한 주검을 앞에 두고, 미국의 작곡가 어빙 벌린(Irving Berlin)이 독일의 수도와 이름이 겹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미국인 포로들을 비꼬는 장면이 특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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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례와 비슷하게 유명 감독이 독일군 고위 간부를 맡은 사례로는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의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이 있지만, 사실 폰 슈트로하임은 감독보다 연기를 훨씬 많이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돈 테일러(Don Taylor)는 던바 중위의 역할을 했다. 전형적인 배우형 미남자에다가 약간의 턱살을 덧붙인 그는 금수저 던바의 역에 잘 어울린다. 이 영화를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테일러는 감독으로 눈을 돌렸다. 혹성 탈출 3(Escape from the planet of the apes, 1971), 그리고 오멘 2(Damien: Omen 2, 1978) 정도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익숙한 제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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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한 전쟁영화광의 약간 이른 크리스마스 영화 소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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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sndbox: This is my introduction to my personal Christmas film, Stalag 17. To me, it's about the things that count in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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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옥의 크리스마스
그 끝에 미미형이 서있다.

뭐라는거여 ㅋㅋㅋ

애꿎은 미미별님한테 왜 그럼?

미미별형이 나한테 미파땜에 힘들지 않냐고 심각히 고민 상담함ㅎㅎㅎ
미미별형이 착해 ㅇㅇ 그만 괴롭혀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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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태그 달아도 오는군요 ㄳㄳ

자막버젼이 있을려나요 ㅎ

음...전 한국에서 라이센스로 출시한 디비디를 사서 한글 자막이 있네요, 쓸 일은 없지만...그래서 아마 그 디비디를 복제해서 올린 사람이 있다면 웹상에 있을 것 같아요.

유투브에도 있긴 한데...이게 흑백이라도 엄청 화질이 좋게 복원된 영화인데도 유투브에 올라와있는건 화질이 너무 안 좋네요- 자막이 없는 것도 그렇고. ㅎㅎㅎ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 떠오르는 포스팅 이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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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도 수용소 소재 영화조. 어릴 때 후론 못봤는데 나름 생생하네요.

한 3년전에 본 것 같은데 마지막에는 가슴 아파서 잔상이 많이 남더라고요.

더 옛날에 나온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애들 눈으로 본 관점 영화였죠. 홀로코스트 주제로는 쇼아라는 다큐가 참 인상적인데 굉장히 길어요.

인생은 아름다워는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ㅠ.ㅠ
시간나면 쇼아도 한번 봐야겠네용

픽사베이 낚시꾼 ㅋㅋㅋㅋㅋ

아닛! 왜 낚시죠. ㅋㅋㅋㅋㅋ

야야님이 고발에 앞장 서 주세요!!!ㅎㅎㅎ
아...픽사베이는 모든 이미지 허용인가ㅎㅎㅎ

앙마 뉴님만 믿어요!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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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맨이 왔다.

아 뭐야 각설이처럼 다시 왔넹

흑백 고전 영화를 좋아하시나보네요~

넵, 뭐 컬러도 고전 중에 워낙 많아서 좋아하고...무성영화도 좋아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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