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자유와 구속, 그리고 미래] 2-2. 십자군 전쟁, 성전 속의 약탈

in #kr-histor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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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J.R.R. 톨킨의 「Lord of the Rings」를 필수로 한 많은 중세 판타지를 통해 중세 생활에 환상을 품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이어지는 연회와 아름다운 성에서의 화려한 생활. 나이트와 레이디의 아름다운 로맨스, 요즈음엔 대장간 일 조차도 하나의 환타지적 요소가 되어서 소설로 나오더군요. 못 만드는게 없는 전지전능(?)한 대장장이 말이죠.

뭐, 겪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가진다는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전에 자기가 잘 나갔을 때라던가, 혹은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 좋게 포장하는 심리적 경향이 있으니까요. 일본의 다이쇼 로망이나 유럽의 벨 에포크, 미국의 디젤펑크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창작물이 나온 것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는 어땠을까요? 초기 중세, 유럽의 장원에서 살아가는 농노와 장인, 심지어는 귀족들까지도 그리 행복한 삶을 구가하진 못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몇몇 대토지를 지닌 영주 계층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든 재산을 잃다시피 했고, 그 혼란스러운 사회를 정리할 사회 체계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2세기와 14세기를 기준으로 유럽은 두 차례의 대 도약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번영이 중세를 환타지 배경으로 끌어들인 근본적 이유이며, 이 도약에는 화폐 경제가 근간에 있었습니다. 실제 14세기경 유럽 경제사를 연구한 A.Madison은 그의 연구에서 14C 북부 이탈리아의 GDP는 이집트와 일본의 2배가 넘는 소득 수준에 도달 해 있었다고 연구한 바 있습니다.


압도적인 차이가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근대 시대에 접어들어서야 서양이 동양을 추월했다는 근거없는 생각에 많이들 빠져 계십니다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엄청난 경제적 도약은 12세기에 있었던 카롤루스 대제의 화폐 유통을 통해 다시 조그맣게 싹튼 상업과 공업의 발달에 있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경기 특수였습니다.

아브라함계 종교의 양 축인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모두 예루살렘을 성지로 여기며, 예루살람 참배를 최고의 속죄이자 최고의 축복받은 시련으로 여깁니다. 당연히 순례객들을 위한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죠. 이 지역이 그 유명한 '레반트'지역입니다. 그런데 11세기부터 야금야금 세를 불려온 셀주크 제국은 어느샌가 레반트 일대를 죄다 장악하고 동 지중해 길목 길목마다 요새를 세우더니 급기야 상선들에게 세금을 삥뜯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순례객들의 악성 민원(...)과 더불어 자신들의 주 수입원이던 순례 산업에 타격을 입었습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운송된 차와 도자기, 향신료 교역이라는 육로 무역 루트를 콱 틀어막힌 영주들도 피곤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시대부터 꾸준히 수입되던 향신료 시장에 이슬람 세력이 자리잡고 세금을 거두는 것도 가뜩이나 불쾌하기 짝이 없었는데,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이집트가 중간에서 해먹기까지 했으니까요.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정치공학적 이유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비잔틴 제국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을 때는 비잔틴이 적당히 양 쪽을 조율하면서 상대적으로 별 문제없이 타협하며 살 수 있었는데, 문제는 엉뚱한데서 터집니다. 니케아를 점령한 후, 당시 서유럽 관습으로는 점령한 도시에 대해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었습니다. 뭔 헛소리야 싶겠지만 당시 전쟁의 규칙 같은거였습니다. 마치 5분 러시 안하기로 하고 스타 하던 것처럼요.

비잔틴 입장에선 원래 자기 땅이었는데, 여기다 대고 약탈을 하니까 곱게 보일리가 없죠. 무너진 후 이런 균형이 깨어지게 됩니다. 당시 유럽은 중앙 상비군이라는 제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던 시기라, 여전히 일부 기병(영주)과 대부분의 농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런 저질 병력이 모두 모여 덤벼봐야 셀주크의 철갑기병한테는 견적이 안 나왔거든요. 여튼, 니케아 점령은 투르크에게 엄청난 위기감을 주었습니다.

많은 역사서에는 1차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측의 승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기실 헝가리에 도달할 무렵 투르크의 강한 반격에 모든 병력이 궤멸한 뒤였습니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은, 새로 조직한 기사단과 비잔틴 제국의 군대였죠. 역시 예나 지금이나 물량 앞에 장사는 없었습니다. 물론, 병력의 질이 달랐고 언제까지 성전을 외칠 수 없었던 교황은 결국 십자군 원정을 종료하긴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죠.


에밀 시놀이 그린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입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들은 약탈할 것을 찾아 헤매는 야수였습니다. 금과 돈에 굶주렸던 십자군은, 이슬람 교도들이 금화를 삼켰다는 소문이 돌자, 배를 갈랐으며 몸 속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금을 찾아 유대교인들을 모두 솥에 삶는 끔찍한 기행을 저질렀었죠. 이 때 예루살렘을 탈환한 기사단이 그 유명한 '성전 기사단Knights Templar'입니다. 훗날 만들어진 성 요한의 기사단이나 튜튼 기사단 또한 이를 보고 만들어진 세력이죠.

이들은 위험한 성지 순례길에서 무장 가이드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교황에게 정식으로 인가받으면서 기독교 세력의 주요한 무력세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특히 입단을 원하던 이들에게 재산을 받아 재정을 확보, 그 확보한 돈으로 금융업을 벌이면서 막대한 부를 쌓게 됩니다. 최전성기에는 키프로스 섬 전체를 소유할 정도였다고 하죠.

교황과 왕실로부터 돈을 받은 템플러는 그 돈을 자본삼아 무기와 군마를 확보해야 하는 새 십자군에게 대출을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 군단이 있는 곳 마다 출장소를 설치하여, 유럽과 중동 지역에 1천여개에 달하는 분점을 세우는 거대 국제 금융 조직으로 탈바꿈합니다. 템플러는 실제 물건을 나르는 상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빌려주거나 돈을 환전하는 것에 눈을 뜨죠.

프랑스 왕실은 병사들에게 줄 월급과 영주를 손봐줄 자금이, 수도원은 빚을 갚을 돈이 필요했습니다.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고, 돈을 모으면 죽은 뒤 템플러의 묘지에 안장될 수 없었던 신앙에 기초한 기묘한 규칙은 명성과 더불어 신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금 교환증이 최초의 태환 화폐라고 하지만, 기실 십자군의 이런 현금 증명서야 말로 조금 더 태환 화폐에 가까웠습니다. 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일반 상인들까지도 템플러의 송금체계를 함께 이용하게 되었거든요.
재미있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본인이나 위탁인의 아니면 절대 인출 할 수 없는 제도가 있었다는 건데요. 루이 9세가 납치당했을 때와 영국 대법관이 체포되었을 때 각각 프랑스의 대신들과 영국 국왕은 루이 9세가 맡긴 돈과 영국 대법관이 맡긴 돈을 사용, 몰수하려 했습니다. 물론 당연히 템플러는 배를 쨌죠.


대략 이런 느낌의 증명서를 상상하시면 편합니다.

십자군의 시작에는 군소 영주들을 전장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땅을 징발하며,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동방에 대한 약탈품이 있었습니다. 돈을 위해 시작한 전쟁에서 돈으로 만들어진 템플러가 있었으며, 그 템플러의 멸망은 역시 돈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13C 후반, 템플러가 보유한 장원과 영지는 약 9천여곳에 달했고 연간 수입은 6백만 파운드를 넘겼습니다. 영국 왕실의 연간 수입이 3만 파운드에 불과했던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죠. 템플러의 금융업이 저축에서 송금, 신탁, 환전, 대출로 확대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긁어모았던 것입니다. 그 뒤에는 빚으로 묶인 왕권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보호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몰락은, 이 균형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교황권은 급속도로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교황은 클레멘스 5세였는데, 그는 프랑스 왕 펠리페 4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전임 교황을 살해한 뒤 교황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펠리페 4세는 템플러를 잡아들이고 클레멘스 5세를 협박해서 교황령으로 템플러를 부수게 합니다.

12세기의 유럽 부흥에는 전쟁을 통해 발생한 피비린내 섞인 최초의 은행과, 그들의 몰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비린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14세기에 발생했던 대참사. 아이러니하게 그 대참사는 사회의 재편과 더불어 새로운 희망을 낳았습니다. 중세 유럽에 제 2의 도약을 가져다 주었던 검은 저주이자 축복은 바로 흑사병이었습니다.

(계속)


금요일과 토요일 연재를 했어야 했는데, 몸이 여러가지로 축나서 쉬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힘내서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스팀 가격이 지옥으로 간다 해도 스팀잇에 읽을 글 하나쯤은 있어야잖아요. 내일 스팀이 망한다 하더라도 타자는 오늘 스팀잇에 하나의 뻘포스팅을 쓰겠습니다... 이게 아닌가?

분량 조절을 위해 부득이 또 짜릅니다. 이놈의 역사 이야기를 하다보면 한도끝도 없이 연결되서 문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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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별 문제없이 타엽하며 살 수 있었는데

타협 말씀이시죠? 잘 읽었습니다. 보팅합니다.

오홋... 역시 기사는 합법 도적이로군요 ㅋㅋㅋㅋㅋ 괜히 기사도를 외치게 만든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ㅋㅋㅋ 돈을 빌려주는 금융업까지 손댈정도면 금권과 무력의 조합을 가진 강력한 권력 집단이었을 것 같네요.

당시에 전쟁은 ... 그냥 게임이었습니다. 농노는 딸려오는 점수-_- 같은거고요

흑사병이 저주이자 축복이었다니 .. 다음이야기 기대되요 !!:)

힌트는 인구의 조절입니다 :) 이게 웃지 못할 이야기죠...

아...인구의 조절이라니 ... ㅜㅜ

부르셔서 와봤습니다....
저는 좀 다른 계열이지만 말입니다 ㅋㅋ
내용 너무 재밌네요 다음편 기대되요 ;D

으어엌ㅋㅋㅋㅋㅋ

근대이전에 동양의 경제력은 지금도 그렇지만 막강한 중국의 물량빨이긴했죠 ㅎㅎㅎㅎ

저 동네 자료가 많이 훼손되었는데도 이렇습니다 orz. 이미 경제적으론 못 이기는 레베루...

역시 인생은 돈 놓고 돈 먹기...(?)


그러다가 12세기와 14세기를 기준으로 유럽은 두 차례의 대 도약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됩니다. 번영이 중세를 환타지 배경으로 끌어들인 근본적 이유이며,

단순한 이유인데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네요. 우리나라도 강대했던 고구려를 대상으로 그려낸 태왕사신기라던지... (...)

중간에 성전 기사단이 템플러로 단어 바꿈되어 잠시 혼란을 느꼈습니다. 본문에 있었지만 (Knights Templar) 저의 무식이 탄로났네요. ㅎㅎ

아무튼 이렇게 다크 템플러의 어원을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

성전 기사단, 템플 기사단, 템플러 다 같은이야깁니다 ㅎㅎ

중세 통화의 발달이 르네상스의 한 요인이라 생각했지만,
템플기사단의 재력이 중세 금융의 중요한 한 획이 되었다는 뜻이죠?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인가요?ㅎㅎ 그정도 일 줄은 몰랐네요...ㅎㅎ

교황의 비호 아래 으마으마하게 삥뜯었죠 (-_-) 아직도 템플러의 보물을 찾는 사람까지 있으니까요

역사이야기는 계속 연결되는 맛이지요. 다음글 기다립니다. ^^*

매듭짓기가 너무 힘들어요우..... 막장드라마 작가들이 존경스러워집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글 잘 보고 갑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로 서양이 앞서가기 시작했다는 근거는 아마 포메란츠의 책 <대분기>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합니다. 그가 비교한 바에 따르면 아메리카에서 착취한 금이 대 인도,중국 무역에서의 적자를 매웠고, 이로써 산업혁명의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GDP나 인구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제가 이 책을 실제로 본게 아니라 다른데에서 인용된 문장을 본것이라 정확히는 말을 못하겠습니다만, 말씀하신 내용과 반대되는 연구 결과가 있어 말씀드려봅니다.

@noctisk님이 말씀하신 것은, 십자군 전쟁이 일종의 순례자 관광사업 및 무역을 위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추론 같아서 자료를 찾아보고 싶네요.

그 시대를 살아간게 아니라 단편적인 추론밖에 못하는게 너무 아쉽습니다. 타임머신 급구(...

십자군 원정은.... 그 시작부터가 성자 피에르를 이용한....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있던 거라... 당연히... 저런식으로 약탈할 수 있다가 아니었으면..... 이루어지지 않았겠죠.... ㅎㅎ

인생이고 역사고 죄다 어뷰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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