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구덩이 by 루이스 새커 ㅡ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당신에게

in #kr-book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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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났다지만 아직도 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더위로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그저 에어컨이 켜진 건물만 찾아다니며 늘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메마른 땅바닥을 하루 종일 삽으로 파내야 한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지는 일이다. 이 책은 주인공 스탠리가 바로 그 개고생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덩치만 컸지 속은 여린 중학생 스탠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둑으로 몰린다. (하지만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의 고조할아버지가 남의 집 돼지를 훔치다가 들켜서 저주를 받은 후부터 스탠리 집안은 대대로 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판사는 그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초록 호수 캠프(Green Lake Camp)’라는 청소년 교화센터로 보내게 된다. 가난해서 평생 ‘캠프’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스탠리와 가족들은 이것도 나름 ‘캠프’니까, 라면서 위안을 삼아 본다. 한데, 막상 도착한 곳은 초록색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메말라 버린 드넓은 호수 바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탠리는 땅에 구덩이를 파야 했다. 그냥 작은 구덩이가 아니라, 깊이도 5피트(대략 1.5m), 사방도 5피트가 되도록 깊게, 넓게 파야 했다. 매일매일, 18개월 동안 말이다. 아, 내가 말했던가? 스탠리가 사는 이곳은 태양이 뜨겁기로 유명한 텍사스다.

도대체 이 청소년 교화센터의 소장은 왜 텍사스의 땡볕 속에 땅에 구덩이를 파는 게 아이들의 삐뚤어진 성격을 교화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혹시 땅을 꼭 파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뜨거운 땡볕, 맛없는 음식, 냄새나는 잠자리,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날마다 날마다 파야하는 구덩이. 남의 집 돼지를 훔치다가 스탠리 집안에 저주를 불러온 100년 전 고조할아버지는 자기가 받은 저주 때문에 스탠리가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걸 알까? 울화통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스탠리는 고조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이게 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돼지 도둑 고조할아버지 때문이었다! (It was all because of his no-good-dirty-rotten-pig-stealing-great-great-grandfather!)" 그런데, 그 고조할아버지는 정말 남의 돼지를 훔쳤던 걸까? 세상에 정말 저주라는 게 있을까?


출처: 교보문고

별로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는데, 읽어보니 굉장히 재미있다. 무더위 속에 하염없이 구덩이를 파게 된 스탠리 이야기와 고조할아버지가 나오는 100년 전의 이야기가 교차해서 나오는데, 서로의 얼개가 맞아가면서 짜임새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재의 스탠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이 나올 때면 마치 타임슬립 소설을 보는 듯한 쾌감도 있다. 저자의 말로는 자기 인생이 저주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느끼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가끔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정말 저주에 걸린 건 아닐까 하고 푸념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언제나 자기만 억울하고, 나만 불행하고, 불운은 나만 따라오고. 하지만 부모 탓, 조상 탓을 하면서 불평을 늘어놔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You are here on account of one person. If it wasn't for that person, you wouldn't be here digging holes in the hot sun. You know who that person is?"

"My no-good-dirty-rotton-pig-stealing-great-great-grandfather."

...

"No," said Mr. Pendanski. "That person is you, Stanley. You're the reason you're here. You're responsible for yourself. You messed up your life, and it's up to you to fix it. No one else is going to do it for you."

"네가 여기에 있는 건 한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네가 이 더운 뙤약볕 아래에서 구덩이를 파고 있지 않았겠지.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돼지 도둑 고조할아버지요."
...(중략)
"아니야." 펜덴스키 씨가 말했다. "그 사람은 바로 너야, 스탠리. 네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바로 너 때문이야. 너에 대해서는 네가 책임을 져야지. 네가 인생을 망쳐놨으면 그걸 고치는 것도 너한테 달린 거야. 어느 누구도 널 대신해서 해줄 사람은 없어."



과거는 참 좋은 핑계다.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바꿀 수도 없으니까. 나는 그저 거지 같은 내 운명을 탓하며 피해자인 척 투덜거리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좋아지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실마리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현재를 바꿀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어렵더라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길을 찾을 수도 있다.

Nothing in life is easy. But that's no reason to give up.

삶에서 쉬운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게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지.

이 책은 <홀즈(Holes)>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영화평도 좋다. 책의 저자가 시나리오 작업도 직접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아동도서를 쓴 작가에게 수여하는 뉴베리 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중고등학생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어른이 읽어도 너무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다.


한국어판 제목: 구덩이
영어 원서 제목: Holes
저자: 루이스 새커 (Louis Sachar)
특이사항: 뉴베리 수상작. <홀즈>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Disclaimer) 본문에 실린 인용은 제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한국에 출간된 번역본과는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책을 영어 원서로 읽고 있기 때문에 한국 출간본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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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멋지네요.

Nothing in life is easy. But that's no reason to give up.

멋진 글귀입니다......

그렇지요? 저도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읽으면서 많이 찔렸답니다.

밖이 더운걸 태양탓, 지구공전궤도탓을 하고 싶습니다...

더울 때 시원한 나라로 여행 떠나지 못하는 내 지갑 탓을 해봅니다. -_-;

책 소개부터 스탠리가 왜 땅을 파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이유를 들을 때부터 참 재미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00년 전, 고조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겹치는 것에서도 흥미롭구요~ 서점에 한번 가게되면 꼭 사서 읽어 보고 싶어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청소년에게도필요한 부분이지만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ㅎ 좋은 책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청소년에게 좋은 책은 사실 어른들에게도 좋은 책이 많죠.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아재들도 생각할걸요?
내 인생은 왜 이럴까 하고요 ㅎㅎㅎ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실마리는 내 안에 있고 내가 행동해야만 현재를 바꿀 수 있는 것이겠죠 ^^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읽고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이들이 읽어 좋은 책은 대부분 어른들이 봐도 혹은 봐야 하는 책들이 많은 거 같아요. 어른들은 때로 가장 기본적인 걸 잊고 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앗, 실천력 짱이십니다! 나중에 읽으시면 독후감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 :)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넵. 알겠습니다. :)

" 너에 대해서는 네가 책임을 져야지. 네가 인생을 망쳐놨으면 그걸 고치는 것도 너한테 달린 거야. " 격하게 공감하는 글이네요. 책 리뷰 감사합니다.

그렇지요? 폐부를 찌르는 말입니다.
공감하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무척 재미있는 책일 것 같아요!ㅎ.ㅎ
무작정 땅을 판다는 것이 왜 이렇게 흥미롭게 들리는지ㅋㅋㅋ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이에요!

그렇군요. 사실 땅을 파는 이유가 있긴한데... 스포일러가 될까봐 썼다가 지웠어요. 전 웬만해서는 독후감에 스포를 안 쓰자는 주의라서요. ㅎㅎ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누명 쓴 것도 평소 본인의 탓이겠죠. "100년 전 고조할아버지가 도둑질을했으니까 도둑의 고손인 니가 도둑"이라고 누명을 씌우진 않았을 테니까요. 읽어보고 싶은 책이군요.

네, 재미있고 통쾌한 이야기에요. 아주 잘 짜여진 그물 같은. :)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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