퀀텀소설 - body & soul




body &soul






2091년 9월 16일

원은 방금 영의 장례를 치뤘다. 원의 나이는 올해 백 열 여덟살이었다. 두 다리에는 인공관절이, 두 눈에는 인공수정체가 박혀 있고 보청기가 없으면 누군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알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귀가 먹은 상태였다.

원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고 스스로 느꼈다. 원은 절망했다. 원망할 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과 영은 84년을 함께 했다. 영은 심장마비로 죽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원 역시 죽음을 맞이할 것은 자명했다.

영이 죽은 후 매일 밤 원의 꿈은 영과의 추억이 변주되었다. 영은 아름다운 20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어느 날은 50대의 모습으로, 그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10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영은 우아한 자태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가끔 원은 낮잠을 자다가 꿈 속에 떠오른 영의 얼굴을 만져보기 위해 허공에 손을 뻗었다.

원은 가끔 옷장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영의 코트가 줄 지어 걸려있었다. 원은 마주할 사람 없이 아침을 먹고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때때로 얼굴의 패인 주름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달이 흘러갔다. 어느 날 원은 소유하고 있던 부동산, 주식, 스팀, 스팀달러를 모두 처분하고 이제 막 베타테스트를 끝내고 고객을 유치중인 시간여행회사에 찾아갔다.

여행사 직원은 원을 맞이했다.

“시간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직원은 영이 제시한 적지 않은 금액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고객님, 이 금액으로는 55분간만 원하는 과거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스모크라는 물질이 시간여행에 필요한데, 이 물질은 살아 있는 향유고래의 뇌에서 추출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면 이 지구상에 몇 마리 남아 있지 않은 향유고래의 뇌에서 추출한 스모크를 사용하게 됩니다. 지금 돌고래의 뇌에서 스모크를 추출하는 임상실험을 진행중입니다. 혹시 이 방법이 성공하면 1년 후에는 여행비용이 많이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차액에 대한 환불을 해줄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시겠어요?”

원은 그러겠다고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직원은 “정확한 시간을 입력해야하니까 시간과 장소를 먼저 정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원은 빛바랜 여행수첩에 접혀있는 부분을 펼쳤다.

“아! 여기 있군요. 2007년 6월 14일 낮 12시의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라 뒤레 앞으로 갑시다.”

원과 영은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간에 하필이면 영이 지갑을 도둑 맞았다. 그 다음날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고 지갑 안에는 마지막 하루치 쓸 돈만 들어있었다. 영은 라 뒤레 진열장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원은 그런 영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아서 소매치기 당했다며 화를 냈었다.

직원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아, 그러세요? 도착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고객님이 지정한 시간과 장소가 부정확해서 일어나는 일이니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습니다. 약관을 읽어보시고 서명해 주세요. 서명이 끝나면 선생님의 건강 상태를 체크한 후 바로 진행됩니다.”

원은 폐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건강한 신호를 방출하는 데이터를 구입해서 라이프 로그에 저장했으므로 -이 역시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 건강심사는 무사히 통과했다. 원은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시간여행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유럽연합이 붕괴된 후 폐기되었기 때문에 어렵게 구한 50유로짜리 지폐 10장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과거로 갔다.







2007년 6월 14일

원은 정신을 차렸다. 눈 앞에 라 뒤레 간판이 보였다. 원은 쇼 윈도우 앞에 영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으나, 영 대신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이 서 있었다. 그러면 영은 어디 있지? 문득 쇼 윈도우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영의 얼굴이었다. 원은 당황했다. 자기는 영의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 앞에 자신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타인인 원이 있었다. 그리고 잠깐 놀라서 허둥지둥대는 사이에 소매치기 3명이 다가와서 주위를 에워싸더니 면가방 안에 넣어둔 지갑을 훔쳐 달아났다. 과거의 원은 영의 몸인 원에게 화를 냈다.
“너 지갑 잃어버린 게 몇 번 째인지 알아?”
“잃어버린 게 아니야. 소매치기 당한 거야...”

영의 몸인, 원은 영이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며 울기 시작했다. 원은 그제서야 이 세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과거에 왜 영이 라 뒤레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는지 알게되었다. 영의 몸으로 원이었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 이제 막 펼쳐지고 있었다. 그 분량은 미래에 늙은 원이 타임캡슐 안에서 겪고 있는 55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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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소설은 5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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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거 읽은 적 있지 하고 다시 한 번 읽다가 다시 한 번 전율 ! 와우

고물님의 f만 봐도 왜이렇게 신나는지!

영의 몸인 원이 흘리는 눈물은 어떤 감정과 함께인 건지 생각하고 있어요. 아... 보얀님 이 이야기 너모 좋아요.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저도 눈시울이 붉어져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과거로 갔는데...

되돌이표 삶, 윤회, 인연, 업보... 많은 단어가 생각나네요.
제 옆에 잠자고 있는 남편 얼굴을 보이네요..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을까....?'

여러 인연은 그 때 그 때 무엇을 던져주고 가는 것 같아요. 그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요...✨

그렇죠.. 참 많은 인연을 만들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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