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옷소매 붉은 끝동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닌데, 한 번 빠지면 몰아쳐서 본다. 1화당 70분짜리 드라마 총 17화를 어제 오늘 정주행하고 기록용으로 적는 리뷰. 이 모든 시작은 라디오스타로.. 얼마나 드라마가 재밌으면 2회분이나 라스가 방영하지 호기심이 생겼다. 마침 IPTV에 무료 보기가 가능했고..그렇게 영업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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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mbc드라마 홈페이지

이 드라마의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다. 무슨 로맨스 드라마가 이래. 인생의 희노애락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유분수지 그래도 멜로 드라마 아니오? 마치 인생처럼 기쁜 환희의 순간은 아무리 잘 쳐줘야 10%쯤이나 될까. 드라마 대부분의 시간은 마치 현실처럼 삶처럼 일 하나가 해결되었나 싶으면 다른 일이 터지고, 이거 보다 더한 일은 없겠지해도 바로 깊은 수렁이 나타나고, 이렇게까지 현실적일 필요 있냐고.

선덕여왕을 보면서도... 권력이 이렇게까지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건만... 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답답한 자리인지 권력이란 게 뭐길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회의감이 일었다.

물론 드라마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정조와 궁녀 성덕임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겠지만 사실상 드라마의 지분 중 로맨스에 할애하는 부분 역시 많이 잡아야 10%쯤 될까. 정치스릴러 장르라고 보는 게 지분상 맞을지도. 너무 오랜만에 본 드라마라 그런건지 요새는 다 이런지 멜로 드라마치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로맨스가 없다. 그런데도 시청률이 높았고 나 역시 빠져들었던 것 보면 시나리오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연출도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좋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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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mbc드라마 홈페이지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이산보다도 '성덕임'이라고 생각한다. 첫 회부터 이들의 관계 설정과 앞으로의 전개방향이 여실히 드러났고, 끝까지 일관성있게 둘의 모습이 잘 그려졌다. 이산은 강해보이지만... 다소 두부 멘탈의 의로운 성장캐라면 성덕임은 어린 날부터 엄청 쎈캐 멘탈갑으로 언제나 산이를 구해주고 보살펴주는 구원자 역할을 맡게 된다. 실제로 위험에서 구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위로되지 않는 팔자 드센(?) 정조 대왕의 유일한 숨쉴 구멍이 되어준다.

아무리 성덕임을 인생에서 밀어내고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해봤자 성덕임의 작은 신호라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이미 헤어나올 수 없이 성덕임의 존재가 각인되버린 정조의 찐사랑은 예견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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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mbc드라마 홈페이지


의지를 지니고 삶의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본다면 살아남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며 견딘 정조보다도 성덕임이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드라마와는 다르게 죽는 날까지 덕임은 연모보다는 늘 자신의 선택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면서 연인을 앞에다가 두고 당신보다는 내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다음 생에 다시 만난다면 옷깃만 스치고 모르는 척 지나가라고 말할 여주가 또 어디있겠냐며. (...내가 정조라면 서러워서 울었을지도)

물론 상대방에게 대놓고 표현하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특히 덕임은 여러 번 정조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의심할 바 없지만. 어쩐지 이는 남녀간의 사랑보다도 주군에 충성, 전우애, 인류애로 더 와닿는다. 물론 남녀로서의 매력을 느끼기도 했겠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정조의 입장에서도 덕임만큼은 아무 이득 바라지 않고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인간적으로 대우해주는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 드라마는 유독 과거 사극에서는 묻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설정에 대한 의문이 많다. 다른 사극 같으면 생략할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니면 이전 사극을 내가 헛 본 걸지도) 그 시절의 예도와 법도를 무조건 따라야하기에 발생하는 개인적인 고뇌와 절망은 없었을까? 궁녀가 왕에게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는 건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왕에게도 한 사람으로서의 행복할 권리와 자격은 없는 것인가?

이 드라마의 심층 주제는 '선택'이다.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의지에 따라 자신의 '옳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정조는 왕이라서 때론 원치 않아도 누군가를 죽여야하고, 정치적인 계산을 해야하고, 명분이 없으면 원하는 선택을 할 수도 없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수천 가지 질문을 하고 거기에 답을 내리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사실상 거기엔 권한보다는 책임이 따르다. 한 사람으로서의 선택이 아닌 어진 왕으로서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고, 옳은 답이 존재한다.그것은 자유로운 삶인가? 왕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왕으로서의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기울어지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것인가?

그런 정조가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고 곁에 두고 싶다 선택한 덕임에게 후궁이 되어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건 덕임의 선택이기에 덕임의 삶을 존중한다면 그 거절을 존중해주어야 하지만 그건 곧 자신의 좌절을 의미한다.

어린 날부터 왜인지 후궁의 삶을 넌지시 질문받은 덕임은 결정한다. 그저 궁녀로서 자신의 자리로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자신의 동무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아무리 왕을 연모하게 된다 해도 자신은 전부를 주어야 하지만왕의 전부를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사랑받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다고. 왕의 삶에 종속된 궁녀의 삶 속에서도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주체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쓴다. 덕임은 선택 앞에서도 단 한 번도 우유부단 망설였던 적이 없다. 우선순위는 늘 한결 같았고 선택에 대한 책임도 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생이 삶의 선택을 제한적으로 만들 때, 변화를 주게 되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즐기던 것들을 희생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할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꼭 신분 차이가 아니라도 인생에서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질문이다. 덕임은 뜻하지 않게 정조의 선택을 결국엔 강요받게 되었고, 그 안에서도 원망도 미움도 없이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말이다.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다. 궁 밖에서라면 귀이 쓰일 재주지만, 궁 안에서는 네게 독이 될거야.'

유독 이 드라마를 보면서는명백한 흑과 백이 존재하지 않고, 한 가지를 누르면 반발심이 생겨나는 대극의 원리를 뚜렷하게 보게 되었다. 또한 해결되지 못한 열등감과 그림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한 나라를 비극으로 몰고 가는지도. 그 안에서도 결국 누군가를 살게 한 건 동료와 진정 어린 관계 속 사랑 뿐이고 정조도 덕임도 그를 알고 소중히 여기고 있었기에 삶을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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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mbc드라마 홈페이지


한 줄 요약: 무슨 멜로드라마가 마지막 회 초반부터 30분 넘게 초상만 치르냐고요.. 이거 멜로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도 성덕임은 짱이에요...! 시청률이 잘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2022년 1월 28일, by 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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