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4월 3일

in zzan3 years ago

간추린 오늘의 역사.png

1905년 보성학교(현 고려대) 설립
대한제국 시절이던 1905년에 개교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전문학교.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1905년(광무 9년) 대한제국 탁지대신이었던 충숙공 이용익 선생에 의해 설립되었다.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은 고종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며 '널리 사람다움(인간성, 人間性)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보성전문의 초기 모표와 교기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한 이화장(李花章)을 사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며 직원 봉급도 흡사 황립학교처럼 황실 내탕금에서 지급하였다.

실제로 보성전문학교가 처음 설립될 당시의 학과 구성은 법과(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와 상과(현 경영대학, 정경대학 경제학과)의 2개 학과였다. 학과구성만 보더라도 조선의 전통 인문학이 아닌 서구 근대 실용학문을 계수하여 나라를 구하겠다는 취지가 드러난다.

교사(敎舍)는 처음에 서울 박동(현재의 수송동)에 위치한 관립 한성 아어(러시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다가 1906년 아어학교에 이웃한 김교헌(金敎獻: 조선시대 문신,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대종교 제2대 교주)의 기와집 200여간을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현재 조계사 터이기도 하다.

1906년 경의선(용산-신의주 499km) 개통
경의선은 서울에서 서북 지방의 주요 도시인 개성·사리원·평양을 지나 의주까지 연결되는 철도 노선으로 기획되었다. 1900년(광무 4) 정부기관인 내장원(內藏院)에 서부철도국을 두고 서울-개성 간 선로 측량을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서울-의주 간 군용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했다. 일본은 이 노선을 대륙침략을 위해 사용하려고 공사를 서둘렀다. 1904년 3월 용산-개성 구간의 노반공사에 착수했으며, 1905년 평양-의주 구간이 완공되어 용산-의주 구간 열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이 때 종착역 일대를 신의주라고 명명했다. 마침내 1906년 청천강·대령강 철교가 준공되면서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1908년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경부선과 서울에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을 이용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주파하는 한국 최초의 급행열차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압록강 철교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만주까지 철도로 연결되어 한국 최초로 경의선은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일부가 되었다. 신의주는 1914년 신의주부로 승격했으며, 1921년에는 의주에 있던 평안북도 도청이 이전하면서 명실공히 서북지역의 중심도시로 떠올랐다. 1943년에는 운송량이 급증한 평양-신의주 구간이 복선화되었다.

경의선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행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지금의 휴전선 위치에 해당하는 문산과 개성 사이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분단 이후 경의선은 이후 남쪽 구간인 서울-문산간과 북쪽 구간인 개성-신의주간으로 나뉘게 되었다. 남한은 서울-문산 간 46km를 운행했고, 북한에서는 경의선의 개성-평양 간 186.5km는 평부선으로, 평양-신의주 간 224.8km는 평의선이라고 명칭을 바꾸어 운행했다.

경의선 구간 중 서울-문산 구간 46.3km는 2009년 전 구간이 복선 전철 구간으로 개통되어 수도권 전철 경의선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수도권 전철 중앙선과 연결되어 운행하기 시작했다. 2014년 5월 부터는 용산-서울-문산-운천-임진강-도라산을 연결하는 관광열차인 평화열차의 운행이 시작되었다.

1938년 숙명여자전문학교 설립
개화기 이후 시작된 여성에 대한 근대교육은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교육의 질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맞닿아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교육목표 역시 기존의 가부장제 아래 여성이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6년 대한제국 황실 순헌황귀비의 지원으로 명신여학교가 설립되고, 이 학교의 재단이 이후 숙명여자전문을 설립하는 주체가 되고 또 운영하였다.

1939년 숙명여자전문의 설립을 앞두고는 당시 영친왕이 이왕직을 통해 막대한 기본재산과 학교 부지를 제공하여 순헌황귀비의 유지를 이었다. 일제시기 영친왕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바로 대한제국 황실에서 지원하여 설립된 학교들에 대한 지원이었으며, 이는 숙명여자전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시기의 황실의 여성교육이 일제시기에도 이어져 숙명여전을 설립할 수 있었으며, 일제말기 황민화 교육이라는 한계를 보이지만 여성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해방 후 영친왕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숙명여전은 구황실재산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것으로 하여 1948년 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48년 제주4ㆍ3사건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을 영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 극심한 흉년 등이 겹쳤으며,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경찰로 변신하고, 군정 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에 경찰이 시위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여 일반 주민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찰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결과, 제주 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 에 동참하였다.

미군정은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극우 단체인 서북 청년단 단원을 대거 동원하였다. 이로부터 4·3 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2,500여 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 도내 12개 지서와 우익 단체들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 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 중지, 남한 단독 선거 및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을 촉구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중산간 마을에 대대적 진압 작전이 실시되었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 · 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 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하였다.

1954년 한국산업은행 발족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은 1906년 설립된 '농공은행'을 1918년 합병한 '조선식산은행'이다.
한국산업은행은 산업의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주요 산업 자금의 공급과 관리를 주 목적으로 해 '조선식산은행'을 승계해 1954년 설립됐다.

일제 강점 하 일본 금융권의 일부분으로 존립했던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은 광복을 계기로 고립의 위기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금융기관은 전문적 분담 기능을 상실한 채 단기 상업 금융 업무만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정부는 전재 복구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산업 금융 기관의 설립을 위해 1951년 5월 당시 임시 수도 부산에서 한국산업은행법안의 기초에 착수했지만 전쟁 때문에 잠시 보류됐다 1953년 11월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가 1954년 의결 기관인 이사회와 집행 책임자인 총재를 정점으로 하는 직제 구성과 정부 출자금 1000만원 납입을 완료해 한국산업은행은 발족하게 됐다.

이렇듯 한국산업은행은 목적을 국책에 순응하여 산업의 개발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중요 산업 자금을 공급, 관리하는 데 두고 있다. 즉, 그 성격과 기능이 보통의 금융기관과는 다르다. 1962년 외자 도입에 대한 대내 지급 보증 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했고 1967년 외국환은행 업무를 본격적으로 취급했다.

이후 2008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2009년 10월 설립된 산은금융그룹(KDB금융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됐다. 민영화 이후 KDB산업은행의 주요 업무는 기업 금융, 투자 금융, 국제 금융, 수신 및 개인 금융 등이며 2010년 대우건설을 인수하기도 했다.

1967년 국가배상법 발효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인한 개인의 손해에 대하여 근대국가의 초기에는 이른바 국가무책임의 원칙이 지배하였고, 사실상의 행위자인 공무원 자신의 민사책임만이 문제되었다.

그러나 행정기능이 증대되고 개인에 대한 권리침해의 위험성이 커짐에 따라 시간적으로 선후의 차가 있고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근대국가가 실정법 또는 판례법으로 배상책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국가배상청구권의 발생요건은, 첫째 공무원 또는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에 규정된 공무원 이외에 공무를 위탁받아 집행하는 자의 권력작용이나 관리작용이 있어야 하고, 둘째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법령위반의 위법성이 있어야 하며, 셋째 직무상 위법행위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 경제적·정신적·적극적·소극적 손해를 불문한 제반 손해발생이 있어야 한다.

공무원이 그의 불법행위에 관하여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을 때, 또는 영조물의 설치 및 관리상의 하자로 인한 손해의 원인에 대하여 책임을 질 자가 따로 있을 때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그 공무원 또는 책임을 질 자에게 배상이나 상환을 요구할 수 있다.

1972년 세계최고의 고려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 발견
한국은 금속활자를 쓴 세계 최초의 나라로 공인받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전부터 이 사실이 밝혀지긴 했으나 세계적으로 공인돼 있지 않아 그 후에 발명된 독일의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세계최초의 것으로 세계 모든 문헌-문서-서적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유네스코가 현재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열고 있는 ‘책의 역사’ 종합전에 새로 발견해 낸 고려때 책자 ‘직지심경’(우왕 3년=1377년 인쇄)을 전시함으로써 공인된 것이다.

유네스코의 관계관과 파리 국립도서관의 동양서적전문가 마리 로즈세규이 여사는 “한국이 구텐베르크보다 75년 가량이나 앞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창안 실용화한 것은 세계문화사에서 중요한 새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우리는 이번 국제전(展)을 계기로 모든 세계의 문헌-교과서-백과사전을 정정토록 통보, 조처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세계 관계기관에의 통보와 더불어 모든 기록도 정정하게 된다. 현재 세계의 모든 문서에는 1452년에서 1456년 8월 이전에 구텐베르크에 의해 출간된 42행 성서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공인,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232년(고려 고종 19년)에 상정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구텐베르크보다 2백20년가량 앞서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진본 ‘상정예문’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아 세계적으로 공인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공인자료가 된 ‘직지심경’은 ‘한국고서자록(韓國古書自錄)에도 게재되어 있지 않아 국내학계에 전혀 몰랐던 새 진귀본이다.

1974년 긴급조치 4호 선포 (민청학련 사건)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4월 3일 밤 10시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구체적인 내용은 민청학련과 관계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관련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사형, 무기, 5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한다는 전대미문의 야만적 내용이었다. 당시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은 시위 유인물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조직체였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도화선으로 반독재-반유신체제 운동이 본격화되자 이에 앞장 선 대학생-지식인-종교인 등의 활동을 무마시킬 필요에서였다.

4월 25일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공산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조총련계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돼 있다며 1,024명의 체포자 가운데 54명을 군법에 회부, 구속기소했다. 구속된 54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8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1975년 4월 9일 새벽에 갑작스레 처형됐고, 민청학련 관련자 29명은 1심에서 사형 7명, 무지징역 7명, 징역 15~20년을 선고받았다가 2심과 대법원을 거치면서 감형돼 단계적으로 풀려났다.

당시의 재판은 발언 제지, 경고, 휴정, 퇴정 명령, 항의 소동 가운데 사상 유례 없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으며 재판과정에서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 도중에 법정 구속되는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의 암살과 더불어 유신체제가 종언을 고한 뒤 이 사건으로 처벌받았던 사람들은 복권되었다.

2013년 북한이 개성공단 진입금지 조치
북한이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입북을 금지하고 현재 체류 중인 근로자들의 남한 귀환만 허용하겠다고 통보했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진입 금지 조치로 인해 개성공단 기업들은 생산에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3일 개성공단 관련 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이날 아침 정부에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진입을 금지하고 기존 체류 근로자들의 남한 귀환만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날 남한에서 개성공단 진입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기로 예정된 인원은 484명, 차량은 371대였다. 진입 예정 인원과 차량들은 평소처럼 북한에 진입하기 위해 오전 8시경부터 군사분계선에서 대기했지만 오전 10시가 넘도록 승인이 나오지 않았고, 결국 통일부로부터 북한의 진입 금지 통보만 전달받은 채 단 한 명도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했다.

이날 오후 3시 30분 현재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환한 인원은 17명, 차량은 12대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개성공단에는 123개 국내 기업이 입주하고 있으며 남한 측 근로자 844명과 외국인 근로자 7명이 체류 중이다.

개성공단기업협회와 중소기업중앙회 등은 북한의 이번 진입 금지 조치로 인해 입주기업들이 정상적인 생산활동을 하지 못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은 대부분 섬유·의류나 시계 등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1차 가공업체들인데 남한으로부터 원자재와 부품 등을 조달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북 금지 조치로 개성공단 근로자들은 기본적인 식량 문제 등에서도 곤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근로자들은 물과 국 등을 제외한 쌀과 반찬, 기타 부식 등을 모두 남한에서 조달받고 있어 이번 진입 금지 조치로 인해 사실상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게 됐다. 현재 개성공단에 있는 근로자들은 약 한 달 정도를 지낼 만한 분량의 물자를 비축해 둔 것으로 파악됐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북한의 이번 조치로 인해 기본적으로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필수 인력의 수송이 막히게 돼 사실상 개성공단의 가동 중단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조속히 진입 금지 방침을 바꾸지 않을 경우 결국 현재 개성에 있는 근로자들도 귀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9년 통신3사(SKT KT LGU+) 세계최초로 5G이동전화 서비스 개시
세계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5G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3일 오후 11시, 이통 3사가 동시에 각 사 별 1호 가입자를 대상으로 5G 이동통신 스마트폰을 개통함으로써 5G 서비스를 공식 개시하였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작년 12월 1일, 5G 전파발사와 동시에 이통 3사가 동글 단말을 통해 기업고객을 대상으로 한 5G 서비스를 우선 개시하였고, 이번에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5G 스마트폰을 출시하게 됨에 따라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 기반 5G 상용화를 달성하게 되었다.

업계에서는 5일부터 5G 서비스가 개시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5G 스마트폰 출시, 서비스 이용약관 마련 등 상용화 준비가 예상보다 조기에 완료되어 당초 계획보다 이틀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

이통 3사는 초기 4G와 유사하게 서울, 수도권과 일부광역시 등 주요도시의 인구밀집지역을 위주로 5G 서비스를 우선 개시한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5G 네트워크 구축을 확대해 올해 말에는 전국 85개시의 인구밀집지역에서 5G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5G 스마트폰 사용자는 5G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당분간 4G LTE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

한편, 과기정통부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세계 최초 5G 상용화의 의미를 되새기고, 5G 기반의 융합서비스를 시연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행사에서는 국가 차원의 산업 전략인 “5G+ 전략”이 발표될 예정이다.

Sort:  

제주 4.3 사건 날이었네요
제주도 주민에게 들은 이야기가 잊혀지질 않습니다 ㅠㅠ

그 많은 사람이 죽고 실종되었으니
거의 모든 집이 피해가정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너무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21
TRX 0.14
JST 0.030
BTC 69629.04
ETH 3375.52
USDT 1.00
SBD 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