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4월 25일

in zzan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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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고종8)년 대원군 200여곳에 척화비 세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自國)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 중국이 겪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고,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굳세게 싸울 것과 그들의 문호개방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척화비이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은 귀부와 이수를 갖추지 않은 통비로서, 서울의 종로네거리·강화·경주·부산진·동래군·함양군 등 전국의 주요도시에 세워졌다. 비석의 높이는 서로 차이가 있으나(부산 180㎝, 서울 135㎝, 함양 120㎝), 넓이(40~45㎝)와 두께(25㎝)는 대체로 비슷하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日本公使)의 요구에 의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경복궁, 부산광역시 용두산공원, 경상남도 함양군, 충청남도 홍성군 등에 남아 있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으로 설립된 제중원(광혜원으로 개원했으나 2주후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개칭됨)을 모태로 1899년 한국 최초의 정규 의학교인 제중원이 설립되었다. 1904년 근대식 세브란스 병원이 준공되었고, 1909년 사립 세브란스의학교로, 1913년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17년 4월 H.G. 언더우드가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그해 5월 O.R. 에비슨이 재단법인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2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다시 설립인가를 받았다. 사립 연희전문학교는 1923년 연희전문학교로, 일제시대인 1942년 아사히 의학전문학교로 강제로 개칭되었다가, 1944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복구했다.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었고, 1957년 1월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을 통합해 연세대학교로 출발했다.

1923년 진주에서 백정인권운동단체 형평사 결성
이 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 백정(白丁)들이 그들의 권익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자구노력의 일환이었다. 창립식의 참석자는 80여명이었지만 열광적인 호응 속에서 진행됐다.

백정은 1894년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에 따라 법제상으로는 분명 해방된 존재였지만 사회적인 차별로부터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장가를 가도 상투를 틀 수 없었고, 이름에 인의예지(仁義禮智) 같은 고상한 한자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일반인과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도 못했다. 더구나 호적에 도살업자를 의미하는 ‘도한(屠漢)’이나 붉은 점이 표시돼 자식에게까지 차별이 세습됐다.

5월 13일 발기식을 가진 형평운동은 진주 백정 이학찬과 일본 메이지대학을 유학하고 온 장지필이 주도했다. 이학찬은 상당한 자산가였지만 자녀들이 차별당하자 형평운동에 뜻을 두었고, 장지필은 총독부에 취직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 자신의 등본에 '도한'이라는 출신성분을 발견하고 형평운동에 뛰어들었다.

진보적인 사회단체와 여론은 호의적이었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백정들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5월 24일 진주에서는 수백명의 농민들이 형평사 해산을 요구하며 이들이 판매하는 고기에 대해 불매·불식(不食)운동을 벌였다. 8월 14일에는 1만여 명의 농민들이 형평사를 지지한 청년회와 교육회 건물을 3일 동안 파괴해 전시상태를 방불케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창립 1년 만에 조직이 12개 지사, 67개 분사로 늘어나고 5년 뒤에 회원수가 9,600여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세력이 급성장했다.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전성기 때 회원이 3만 4,000명(형평사 측 추산 40만명)이 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조직 내 급진파와 온건파의 내분으로 1931년 제 9회 정기대회에서 해소 건의안이 제출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튿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해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우, 선전부장 김참 등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알려진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제3인터내셔널이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함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해방 뒤인 1945년 9월 12일 재건되었다.

1926년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 승하
이름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고종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店)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 1875년(고종 12) 2월 세자가 되었으며 1897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융희1)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특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즉위하였다. 같은 해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인의 한국관리 임용을 허용하여 사실상 국내정치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8월 1일에는 다시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하였으며, 12월에는 황태자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1909년 일본은 한국의 민정(民情)을 살펴가며 국권탈취공작을 추진하여 7월에 군부(軍部)를, 10월에는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하여 정치조직을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하였다.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본국으로 간 뒤, 소네 아라스케[曾禰 荒助]를 거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후임으로 오면서부터 더욱 야욕을 드러내자, 각지에서 나라가 망함을 통탄하고 조정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하여 암살을 기도하기 시작, 동년 10월 안중근에 의하여 이토가 암살되고 12월 이완용이 습격을 당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피탈되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은 순종을 창덕궁(昌德宮)에 머물게 하고, 이왕(李王)이라 불렀다.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죽었으며, 순종의 장례 때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유릉(裕陵)이다.

1963년 동아방송 개국
호출부호 HLKJ, 주파수 790KHz, 출력 50kW. 특히 사회적 큰 반향과 인기를 모았던 프로그램으로는 '오늘도 푸른 하늘', '유쾌한 응접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큐멘터리 한국독립투쟁비화', '앵무새' 등이 있었다.

한국 최초로 일간신문사에 의해 겸영된 상업 라디오 방송으로서 방송국의 행사, 프로그램의 편성방향, 보도방송의 논조에서 〈동아일보〉의 창간이념에 따라 그 사명을 깊이 자각하고 언론의 자유와 편성의 자주성을 견지하며, 방송의 권위와 공신력을 드높여 문화발전과 산업경제번영 및 사회순화에 기여한다는 원칙에 입각해 건전·공평·명랑·품격을 표방했으며, 자유와 정의의 편에 서서 어떤 독재에도 반대한다는 주의로 일관했다.

동아방송은 정치의식이 높은 수도권 주민들을 대상으로 했고 동아일보사에 의해 겸영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치지향성이 강했고, 보도방송에 힘을 기울였다. 이 방송은 〈동아일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송보다 뉴스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뉴스 해설에는 〈동아일보〉의 논설진을 동원했다.

이 방송은 한국 상업방송 최초로 1966년 1월 25일 대북방송을 개시했으며, 1971년 2월 17일에는 삿포로[札幌]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북한 대표선수 한필화와 서울의 오빠 한필성과의 전화대화를 보도함으로써 만인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1964년 6·3사태 때는 '앵무새'라는 프로그램에서 정부를 풍자했다. 당국은 곧 이 프로그램이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작가·제작자·방송부장·제작과장·편성과장을 구속한 사건 등에서 많은 탄압을 받았다.

〈동아일보〉·동아방송의 기자들은 1974년 10월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놀란 정부당국은 동아일보사에 광고탄압으로 맞서 1974년 12월부터는 〈동아일보〉의 광고, 1975년 1월부터는 동아방송의 광고가 무더기로 해약되었다. 국민들은 이런 광고탄압에 대응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격려광고를 냈으며 동아방송의 일부 출연진은 무료로 방송 출연을 했다. 1980년 12월 1일 동아방송은 KBS 제4라디오인 '라디오 서울'로 개편되었다가 1990년 정부의 방송구조개편계획에 따라 신설된 민영방송 서울방송(SBS)에 넘겨졌다.

1995년 팔당대교 개통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과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팔달리를 잇는 다리로 길이 935m, 폭 24m, 4차선으로 1986년 5월 착공하여 1995년 5월 완공되었다. 다리 높이는 12m, 경간은 18개로 경간 사이가 가장 넓은 곳은 52m이다.

양쪽 입구에 나들목이 설치되어 있으며 길이 500m, 너비 7m의 차량진입 램프웨이 4개소가 있다. 건설 중이던 1991년 3월에 상판 콘크리트가 붕괴되어 교량 형식이 사장교에서 연속S.T.박스 거더교와 연속P.S.C박스 거더교로 변경되어 건설되었다.

국도 6호선과 서울외곽순환도로가 통과하여 서울에서 가깝고 접근이 쉬워 많은 통행량으로 정체가 잦았으나 2009년 경춘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개선되었다.

1996년 경주 감은사 터 삼층석탑 동탑서 금동사리함 발견
감은사 터 금당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682년(신문왕 2)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석탑으로서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운 것으로 높이는 각각 13.4미터이다. 동탑과 서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다.

1959년 12월부터 1960년에 걸쳐 서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몸돌에서 건립 당시 설치했던 정교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치는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로 이름 지어졌으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었다.

서탑 옆에 있는 동탑은 1996년 4월에 해체, 보수했는데 3층 지붕돌에서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다.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2002년 12월 7일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되었다.

1997년 국회 한보특위 김현철씨 청문회 개최
김현철씨는 25일 열린 국회 한보조사특위에서 몸과 목소리를 낮췄다. 한 두차례 항변도 있었으나 답변내내 흥분하거나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또 청문회 장면이 생중계되는 TV를 지켜보는 여론을 의식,겸손한 자세로 일관했다.

현철씨는 지금의 심경을묻는 질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용서를 빌 뿐이다』고 「참회」하는 자세를 보였다.그리고 『제 문제로 인해 이렇게 국정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사회적 물의를 빚은데 대해 국민 여러분과 아버님께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말했다. 현철씨는 김덕룡 의원과의 관계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이르러는 몇차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닦기도 했다.

여야 할 것 없이 잔뜩 벼르던 모습과는 딴판이엇다.25일의 김현철씨 청문회에서 여야의원들은 한보 국정조사특위 활동의 핵심인 김씨에 대해 비교적 깎듯한 예우를 해줬다. 다만 김씨를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의 아들 방원에 비유, 김씨가 차기나 차차기 대통령을 노린게 아니었냐고 질책하는가 하면 대통령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어렵게 만든 신중치 못한 처사에 대한 「훈계」가 주류를 이루었다.

현철씨는 의원들이 거론한 광화문 언론대책반, 광우회, 동숭동캠프나 재벌2세들의 모임인 경영연구회 멤버들과의관계에 대해서도 존재사실은 시인했지만 자신과 관계가 없고 단순한 친목단체로 알고있다고 강조했다. 박경식원장과 관계도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였을 뿐이라고 친분설을 일축했다.

2003년 북한, 사스(SARS)로 금강산 관광 중단 통보
금강산 관광을 주관하는 현대아산은 “북한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확산을 우려해 금강산 관광을 당분간 중단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다음날 속초항에서 금강산으로 떠나려던 유람선 운항이 취소됐고, 5월초 열릴 예정이던 평양 정주영체육관 개관행사도 무기한 연기됐다.

현대아산은 이날 “북한 아태평화위원회가 24일 오후 ‘보건당국이 사스감염을 막기 위해 외래자들의 평양방문은 물론 공화국 전 영역에 대한 왕래를 일절 금지해 금강산관광도 당분간 중지할 수밖에 없다’ 는 팩스통지문을 보내왔다” 고 밝혔다.

북한은 사스를 이유로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북한의 직업총동맹이 평양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남북노동자대회도 연기를 요청했다. 북측은 25일 오전 양대 노총에 “사스로 인해 우리 보건당국이 평양과 금강산에 대한 내왕 중단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해 와 부득이 행사를 할 수 없다” 며 “사스가 진정되는 대로 행사를 치르자” 는 내용의 팩스를 보내왔다.

이밖에 대북지원단체인 ‘굿네이버스’ 관계자 10명도 베이징이 아닌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방북하려 했으나, 북한의 연기 요청으로 25일 귀국했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본부 관계자들도 지난 22일 방북 연기 요청을 받았다.

2014년 오바마 미대통령 대한제국·조선왕조 유물 반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도착했다. 이날 대한제국 국새와 어보를 포함한 9개의 인장을 반환할 예정이다. 국새는 외교문서나 행정에 사용했던 집무용 인장이고, 어보는 개인용 인장을 말한다. 이들 인장은 한국전쟁 참전 미군이 덕수궁에서 불법 반출했다가 지난해 11월 미국 수사국에 압수됐으며 한·미 양국이 조사한 결과,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인장으로 밝혀졌다.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해 인장 9점이 반환된 것은 특히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들고왔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이번 반환이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문화재 15만여 점의 반환에 적잖은 영향을 줄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문화재 반환 행사에서 "한국전 당시 한국의 인장과 옥새를 미국의 해병대 병사가 가지고 돌아갔다. 그 병사가 이 문화재의 역사적 중요상을 몰랐었나 보다" 라며 "해병대원이 세상을 떠나고 그 부인이 이 문화재의 역사적 중요성을 깨닫고 돌려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경위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미국이 한국과 한국 국민을 존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반환되는 문화재는 모두 인장으로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장이 대한민국 국새인 '황제지보'이다. 역대왕조는 중국에서 국새를 하사받았지만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그동안 쓰던 국새를 폐지하고 자체 제작하면서 만들어졌다. 황제지보는 대한제국 성립과 함께 1897년 9월 19일에 만들어진 국새로, 국가문서에 직접 사용한 국권의 상징이기도 하며 고종황제의 자주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문화재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국새는 1897년께 10과가 제작됐고, 고종의 비밀 외교를 위해 1과(황제어새)가 1900년대 초에 만들어졌다. 국새 11과 가운데 대한국새, 황제지새, 황제지보 3과 중 2과, 칙명지보 2과 중 1과, 시명지보 등 6과는 일제가 강탈한 뒤 미군정청에 반환했지만 6·25 전쟁 도중 다시 분실됐거나, 애초부터 분실 과정이 불분명한 상태로 현재 찾지 못하고 있다.

이 가운데 황제어새는 2009년 재미동포가 구입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또 나머지 3과는 6·25 전쟁 때 분실됐지만 1954년 경남도청 금고에서 발견됐으며 칙명지보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제고지보와 대원수보는 국립전주박물관에 각각 보관 중이다.

문화재청은 6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우리 왕실의 유물들을 조만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이 반환한 조선, 대한제국 황제지보, 국새, 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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