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4월 2일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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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고종33) 고종 특명전권대사 민영환 한국인 첫 세계일주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아관파천의 수치를 겪은 고종은 민영환과 윤치호 등을 러시아 특사로 파견해 일본을 견제할 힘을 빌리려고 했다. 1896년 3월 10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축하사절로 참가한다는 명분으로 민영환 일행은 긴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제시간에 중국에 도착하지 못한 민영환은 유럽행 배를 놓치고 서둘러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다시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민영환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미국으로 입국하고 미대륙을 철도로 가로지른 후 뉴욕에서 런던행 배를 타게된다.

런던에서 독일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한 민영환 일행은 대관식에 참석하고, 다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6개월 2일 만에 대한제국으로 돌아왔다. 지구 한 바퀴를 완전히 돌면서 중국,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 11개국 이상을 거치게 되었고, 힘없는 대한제국을 위해 헌신했던 국가부흥 여정은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이 되어 버렸다.

이 여정을 기록한 여행기 '해천추범(海天秋帆)'을 보면 발달한 서구 문물을 직접 본 민영환이 받은 감동과, 그 발달을 조국에 들이고 싶은 안타까운 열망을 잘 알 수 있다. 대한제국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 지사인 민영환의 본의 아닌 세계 일주에는 조국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큰 절실함과 걱정, 아픔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가 되었지만 조국을 생각하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던 슬픈 여정이었다.

1906년 서울 중동학교 설립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1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이다. 1906년 4월 2일 오규신, 유광렬, 김원배 선생이 한어, 산술 양과의 야학을 설립하였다. 1907년 1월 22일 중동야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09년 5월 10일 중동학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16년 4월 5일 주학을 병설하였다.

1919년 1월 11일 사립중동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중동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48년 7월 31일 재단법인 중동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51년 8월 25일 중동고등학교 인가를 받았다. 1974년 11월 20일 학교법인 수송학원을 흡수하였다.

1982년 10월 23일 야간고등학교를 폐지하였으며, 1984년 3월 1일 강남구 일원동 618번지 신축교사로 이전하였다. 1994년 6월 1일 삼성그룹에서 학교를 인수하였다. 교훈은 ‘정직(正直), 근면(勤勉), 청결(淸潔)’이며, 교목은 은행나무, 교화는 목련이다.

1989년 문익환 목사-허담 북한평화통일위원장 9개항 공동성명 발표
문익환 목사가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접견하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공동명의로 발표한 ‘4.2공동성명’이다.

4.2선언에서 핵심적인 것은 세 가지다. 당시 쟁점이 됐던 것은 남북관계에서 정치.군사 문제가 우선인가, 교류협력이 우선인가? 북은 정치.군사 문제 우선이라고 하고 남은 교류협력 우선이다. 문 목사가 김 주석과 토론해서 ‘같이 할 수 있다’는 김 주석의 답변을 받는다. 이게 4.2선언에서는 정치.군사 문제와 교류.접촉을 같이 한다고 돼 있다.

문익환 목사와 김 주석 사이에 합의돼서 허담과 4.2선언으로 발표된 게 남북고위급회담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할 수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남북 간의 통일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려 놓고,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야당 총재에게 통일논의 4자회담을 제의했지만 감옥행을 면치 못했다.

병보석으로 잠깐 출소하기도 했지만 결국 93년 3월에서야 자유의 몸이 된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합의했던 내용들을 비로소 국민들에게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당시 통일운동진영의 보편적 주장에서는 수용되기 쉽지 않은,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만한 주장들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를 추진함으로써 문 목사는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섰다는 것이다.

2003년 국회 이라크파병 동의
국회는 2003년 4월 2일 본회의를 열어 ‘국군부대의 이라크전쟁 파견 동의안’ 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566명(특전사 소속 경계병력 60명 포함) 규모의 건설공병단(1개 대대)과 100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선발대와 본대로 나눠, 선발대는 4월 말에, 본대는 5월 중순까지 각각 현지에 파병하기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회 국정연설을 통해 “명분을 앞세워 한·미관계를 갈등관계로 몰아가는 것보다 미국을 도와주고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 이라며 국회의 파병안 처리를 당부했다.

한·쿠웨이트 간 SOFA가 체결되면, 2002년1월 한·키르기스스탄 SOFA에 이어 정부가 외국에 군대를 파견해 체결하는 두 번째 SOFA가 된다. 이날 민변ㆍ참여연대ㆍ녹색연합ㆍ천주교인권위원회 등과 같은 재야단체에서는 파병안 통과에 대한 반대 성명을 발표, ‘지구적 시민 행동의 날’ 을 맞아 12일 전국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할 것, 맥도날드, 코카콜라 사먹지 말 것 등 7대 국민행동 지침을 발표했다.

2007년 협상시작14개월만에 한미FTA 타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우역곡절 끝에 타결됐다.
한국과 미국 양국 정부는 지난달 26일부터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통상장관급 회담을 열어 핵심쟁점에 대한 주고받기 협상을 벌였으며 협상시한을 연장, 지난 2일에 극적으로 협정을 타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같은 날 밤에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해 “오늘, 한미FTA 협상을 마무리지었다”며 “작년 2월 협상개시를 선언한 이후 14개월만이고, 정부 차원에서 준비한 지 4년만의 일”이라고 덧붙였다.

농업분야와 관련, 노 대통령은 담화에서 “농업부문 보호는 협상결과에 대부분 반영됐다”며 “정부는 농업인들에 대한 보상과 지원을 최대한 보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소식에 가장 큰 피해가 우려되는 농업계가 들끓고 있다. 특히 농업인단체들은 한미FTA 타결내용이 주권포기, 농업말살정책과 다르지 않다며 국민투표 실시를 요구하고 나섰다.

농대위는 특히 “국회비준도 책임지지 못하는 임기만료 대통령과 미국사람이나 다름없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체결한 한미FTA는 인정할 수 없다”며 국민투표로 협정체결 여부를 결정짓자고 제안했다.

농대위는 정부의 농업피해대책과 관련해서도 3일 성명을 통해 “정부가 발표한 피해대책은 실체도 없고 의지도 없는 여론무마용, 국민기만용 대책에 불과하다”며 “확실한 농업대책은 한미FTA 폐기”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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