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늘의 역사 4월 1일

in zzan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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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년(고려 성종15) 오늘 처음으로 철전 주조
삼한시대부터 철편을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신라 때에는 금·은전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 사용했다고 하는 철편이나 금·은전은 자연경제체제하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체제나 품질면에서 통일성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고려 건국 이후 개경 중심의 유통체제 재편의 결과 유통경제가 급격히 발달하였으면서도 화폐기능은 아직까지 당전(唐錢)·송전(宋錢) 등 중국의 주화와 포화(布貨) 같은 물품화폐를 주로 사용하였다.

고려 자체에서 법정화폐를 주조, 유통해본 적도 없는 채 지방호족 예하 각 지역은 각각 다른 화폐나 물품화폐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성종이 강력히 시행하려는 중앙집권화의 장애적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왕실 주도의 법정화폐주조를 단행하였다. 996년(성종 15) 형원공방전(形圓孔方錢) 또는 4각공전(四角孔錢) 형태의 철전인 건원중보 배동국전(乾元重寶背東國錢)과 무문철전(無文鐵錢)이 발행되어 고려시대 최초로 정부에서 규격화한 주화가 주조, 유통되었다.

그러나 유통면에서 전반적인 호응을 얻지 못한데다가 귀족들의 집요한 반대로 1002년(목종 5)에 다주점(茶酒店)과 식당 등에서만 통용토록 하였다

1895(조선 고종32)년 오늘 유길준의 『서유견문』 간행
유길준은 1883년(고종 20) 한국 최초의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인 보빙사(報聘使)의 수원이 되어 미국을 시찰하게 되었다. 일행과 함께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그 부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4개월 뒤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885년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배를 타고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 집에, 뒤에는 서울의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그동안 〈서유견문 西遊見聞〉의 원고를 썼고, 1895년에 활자화되었다. 1892년 11월에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 었다.

전2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서양의 역사·지리·산업·정치·풍속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국한문혼용체로 근대 언문일치 문장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919년 유관순 열사 투옥
가족을 따라 지령리교회를 다니던 유관순(柳寬順, 1904~1920)이 13세 때 서울 이화학당의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한 것은 여성 선교사인 샤프 앨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충청도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열성을 바치던 사애리시 부인은 총명했던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3년 만에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1918년 4월 고등과에 진학하였고, 학교 옆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의 선배들은 1학년생을 배제했지만 유관순은 담장을 넘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유관순은 친구들에게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고, 헤어지면서 “독립된 뒤에 만나자”고 다짐했다.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도 ‘대한독립’으로 들린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 열망을 품었던 유관순은 고향에 돌아와 천안 일대의 만세 시위 준비에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 때 유관순은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부모님을 현장에서 잃고 본인과 오빠, 작은 아버지가 투옥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시위까지 주도했던 그였지만, 3년 형을 견디지 못하고 1920년 9월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방광이 파열되고 이를 일제가 방치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창간호. 전라도 지역의 부호였던 김성수가 설립하였다. 그래서인지 1980,90년대에는 "전라도 사람은 껌은 해태 껌을 씹고 신문은 동아일보를 본다"는 말도 있었다. "동아일보"라는 명칭은 창간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유근이 지었다.

사실 1980년대 이후 전두환 정부와 결탁한 조선일보가 급속한 성장세로 구독 부수 1위를 기록하며 신문 업계의 원톱이 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일보와 더불어 구독 부수나 매체 영향력 면에 있어서 쌍두마차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 신문이었고 사실상 신문 업계에서 2위 없는 압도적 1위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2020년 현재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이라 불리는 보수 우파 성향의 3대 신문사로 꼽힌다. 그렇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종이신문 산업 자체가 하락세를 타면서 동아일보도 유료부수나 신문의 열독률이 급격하게 감소하였고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매체의 존재감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1967년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 준공
구로공단은 1967년 4월 1일 준공됐다.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제1단지. 60만 평 땅에 수출 입국의 사명을 띠고 조성된 한국 최초의 공단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며 뿌듯해 했다.

구로공단의 주력 산업은 섬유와 봉제 가발 등 경공업이었다. 근로자의 절반 이상은 여성이었다. 남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한 10대 후반의 ‘누이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일등공신인 셈이다.

이들은 2.5평짜리 판잣집이 빼곡한 이른바 ‘벌집’에 기거하며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했다. ‘공순이’라는 비웃음을 감내하며 고향 집에 월급을 부쳤고,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야학을 찾아 졸린 눈을 비볐다.

구로공단은 대학생들의 의식화 현장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운동권 학생들은 위장 취업을 통해 스스로 ‘시다’가 되고 기계공이 되어 노동운동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적 여성 노동운동가인 심상정(민주노동당) 의원도 그들 중 한 명. 이문열은 소설 ‘구로 아리랑’에서 대학생과 여공의 교감과, 이를 대하는 공권력의 냉혹함을 담담하게 그렸다.

구로공단은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굴뚝산업은 중국 등지로 떠나고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이 들어섰다. 음울한 이미지를 벗으려 했음인지 지하철역 이름에서도 ‘공단’은 지워졌다. 도시의 변신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의 억척스러운 누이들을 기리는 무엇인가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1968년 향토예비군 창설
우리나라 국방 사상 민방위의 새기틀을 마련하는 향토방위군 창설식이 1968년 4월 1일 오후2시 대전 공설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서 박대통령을 비롯한 시민 약 15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

같은 해 1월 21일 청와대에 무장공비가 급습하고 이어 23일 미국 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게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예비역 장병들을 조직, 평시에는 사회생활을 하고 유사시에는 향토방위를 전담할 비 정규군 조직 예비군인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향토예비군의 건군정신은 우리의 생명ㆍ우리의 단란한 가정 그리고 내 고장ㆍ내 직장을 ‘내 힘’으로 지킨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바로 이것이 진정한 향토애이며 조국애의 구현인 동시에 우리의 국방철학이었다.

향토예비군의 임무는 ‘첫째, 국가비상사태하에서 현역군부대의 역할을 대신하다. 둘째, 무장공비 침투지역에서의 무장공비를 소멸한다. 셋째, 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무장소요를 진압한다.’ 등이었다.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예비군이나 직장예비군으로 편성하며 향토예비군에 관한 사항은 국방부장관이 관장하도록 했다.

1970년 성호 이익 문집 7백권 발견
「성호사설」은 이익이 쓴 책으로, 주로 사상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는 책이다. '성호(星湖)'는 이익의 호이고, '사설(僿說)'은 '자잘한 이야기들'이라는 뜻이다. 즉 「성호사설」은 '이익이 쓴 자잘한 이야기들 모음'이라는 의미이다.

저자가 40세 전후부터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이 있거나 흥미 있는 사실이 있으면 그때 그때 기록해 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을 기록한 것들을 그의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책이다.

그 내용은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의 다섯 가지 '문'으로 크게 분류하여 총 3,007편의 항목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이후에 성호 이익이 살아 있을 때 그의 제자였던 안정복이 이러한 내용을 다시 분류하여 정리할 것을 자청하여「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성호사설」의 필사본이 있었으나 인쇄되지 못하다가 1915년 조선 고서 간행회에서 안정복이 다시 정리한 책인「성호사설유선」을 상ㆍ하의 2책으로 인쇄하였다.

그 후에 이 책을 다시 1929년에는 문광서림에서 정인보가 다시 분류 작업을 하여 선장본(5책)과 양장본(상ㆍ하 2책)으로 동시에 출판하였는데, 이 때의 대본도 「성호사설유선」이었다. 문광서림본에는 성호 이익이 직접 쓴 자서와, 변영만이 쓴 서문, 그리고 정인보의 서문이 덧붙여졌다. 부록으로는 「성호사설」의 요약집이라 할 수 있는「곽우록」이 추가되었다. 그 뒤 1967년에 이익의 후손 집에 소장된 30책 원본의 「성호사설」을 경희 출판사에서 상ㆍ하 2권의 책으로 출판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나라 학계에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시대에 사람의 손으로 다시 옮겨 쓴 필사본으로는 국립 중앙 도서관ㆍ재산루ㆍ규장각, 그리고 일본의 도요문고ㆍ와세다 대학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국립 중앙 도서관에 있는 것은 내용의 일부가 다른 것과 약간 다르며, 또 내용의 일부만이 전하는데 국립 중앙 도서관측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을 성호 이익 자신이 직접 쓴 자필 원고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 독립문 이전 복원
중국과의 주요 교통로인 의주로에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조문이 있었다. 영조문은 세종 즉위년(1419)에 홍살문의 형태로 처음 세워졌으나 이듬해 중국사신에 의해 영은문(迎恩門)으로 명칭이 바뀌게 됐다. 임진왜란으로 모화관(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과 영은문은 손상됐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인정받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다시 내각을 구성했고 서재필의‘독립신문’의 창간을 지원했다.

이후 정동클럽의 관료들은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공원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해 이를 추진했다. 독립문은 영은문 자리에 세워졌다. 국민모금행사를 통해 모인 기금으로 만들어진 15m 높이의 문은 파리 개선문을 본뜬 모습이었다. 독립문 앞 두 개의 돌기둥은 영은문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이다.

광복 이후 1947년 11월 16일 서울시에서는 서재필의 귀국을 맞아 독립문 건립 5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광복 이후 독립문의 도안은 우표, 화폐, 교과서 등에도 활용됐다. 특히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활용된 사례가 많다. 화폐의 경우에는 광복 후 최초로 발행되는 지폐부터 독립문의 도안이 등장했다. 1954년에 발행된 백환권은 앞면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이, 뒷면에는 독립문이 도안됐다.

1960~1970년대 서울은 인구증가와 시역 확대에 따라 도로 정비와 확충이 빠르게 진행됐다. 독립문은 주변도로 확장으로 섬처럼 고립됐다. 1979년 2월 27일 독립문 이전이 확정되고 그해 3월 19일부터 12월 24일까지 독립문은 해체·이전·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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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아이들이랑 유관순열사 애니메이션을 봤었는데... 오늘이 투옥되신 날이었군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열사라로 부르고 있지만
당시 나이 14살 소녀였습니다.
고문을 받으면서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여성으로써 치욕과 울분을 어떻게 견디었을지
감정이 이입되면서 고개가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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