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작가 응모작 – 수필] 머리 검은 짐승

in zzan3 years ago

스마트 폰을 열었더니 부재중 전화가 줄줄이 떠있다.
집에서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하신 전화다. 카톡에도 어머니의 흔적이 있다.
아침에 비오는데 출근길 조심하라는 말씀과 바람이 불면서 기온이 떨어지는데 옷 잘 입어라,
어두워지면서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었으니 특별히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할머니는 카톡이 안 되시니 부재중 번호만 떠있다. 할머니 전화번호를 보면 꼭 할머니를 보는 것 같다. 밥 먹었니? 춥지 않니? 힘들지 않니, 뭐하고 있니 등등 할머니의 물음표는 끝이없다.

오늘도 나는 받기만 했다.
어렸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혼자 지내게 되면서도 그런 할머니나 어머니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화를 받으면서 귀찮아 한 적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는 받기만 하면서도 감사한 줄 모르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기브앤테이크가 상식이 되어 있으면서도 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받는 일에만 익숙해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만 해도 그 사이에 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좀 더 편한 시간에 해야지 하며 지나갔다. 만약 그 전화가 친구에게 온 전화였어도 당장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관심과 사랑을 떼어먹는 일에 익숙해 있다.

지금도 유혹이 밀려온다. 기왕 늦은 거 저녁 먹고 샤워하고 천천히 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내 어깨에 손을 얹은채 웃음 띤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내가 짐승이기를 권하는 웃음이 달콤하다. 나는 어느새 머리 검은 짐승이 되고 있었다. 이제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할머니께 전화를 드린다. 전화선을 타고 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 따뜻하다. 그리고 같은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힘들지 않니? 밥은 먹었니? 어서 집에 가서 밥 먹고 푹 쉬어, 내일 또 나가려면. 그래 잘 있어라.

눈앞에 희끗희끗한 점으로 어지럽다. 발 끝에 힘을 준다. 불빛에 번들거리는 길이 조심하라는 할머니 말씀처럼 빛을 내고 나는 둥지를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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