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03(토)역사단편114,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건국연대(建國年代)에 대하여(2)
1박2일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기온이 더 올라갔으니..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대한 고찰을 이어간다.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그 신하들과 대화를 이어가는 기사에서
고구려건국 900년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1편>https://steemit.com/hive-143843/@neojew/2024-8-01-114
그 다음 내용을 본다.
廣開土王碑文(광개토왕비문)에
"傳至(전지) 十七世孫(십칠세손)
廣開土境好太王(광개토경호태왕)"이라 한바,
『삼국사기』의 세대로 따지면
광개토왕이 시조 주몽의 13세손밖에 안 되며,
나의 「부를 囚(인)수한 次大王(차대왕)」의 논문 가운데 기술한 바와 같이
차대왕을 태조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광개토왕이 始祖(시조)의 14세손밖에 안 되니,
광개토왕의 비는 그 자손 제왕의 설립에 係(계) 하여
祖系(조계)를 착오할 리가 만무한즉,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傳至(전지) : 전해서 도달하다
世孫(세손): 임금의 맏손자
囚(인): 가두다
次大王(차대왕): 이름은 수성(遂成), 태조대왕의 친동생으로 기록
係(계): 계통, 전해진 순서
祖系(조계): 조상의 계보
형제가 왕위를 이은경우 '세손'에선 빠져야 한다.
교과서에는 '영락대제(=광개토왕)'이
고구려 19대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몇대왕이라고 별도 표기하지 않으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된 왕의 순서를계산하면
19번째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옮기면)
廣開土王碑文(광개토왕비문)에
"대를이어 내려와 17번째 손자인
넓은영토를 개척한 훌륭한대왕"이라 한바,
『삼국사기』의 세대로 따지면
광개토왕이 시조 주몽의 13세손밖에 안 되며,
나의 「부친을 감금한 차대왕」의 논문 가운데 기술한 바와 같이
차대왕을 태조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광개토왕이 始祖(시조)의 14세손밖에 안 되니,
광개토왕의 비는
그 자손 제왕들이 왕이된 계보를 따지는 것인데
조상의 계보를 착오할 리가 없으니,
단재의 해석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추모왕을 1세로 해서, 부자지간으로 계승된 연대를
정리한 것이다.
단재의 지적대로 13세손이 '영락대제'이다.
그런데, 묘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된 것이다.
뭔가가 누락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광개토왕 이전 3세를 脫漏(탈루)함이 명백하며
3세지간에 꼭 부자가 상속하기 어려운 일이요,
혹 형제의 전수도 있었기 쉬운 일이니,
여하간 고구려 초엽의 史(사)에 대수로 3세 이상,
연조로 100년 이상을 탈루(脫漏)하였음이 無疑(무의) 하다.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脫漏(탈루): 빠져나감
(옮기면)
『삼국사기』에
광개토왕 이전 3세를 빼먹은것이 명백하며
3세지간에 꼭 부자가 상속하기 어려운 일이요,
혹 형제의 전수도 있었기 쉬운 일이니,
여하간 고구려 초엽의 역사에 대수로 3세 이상,
연조로 100년 이상을 누락시켰음이 분명하다.
계속 읽어본다.
그런즉 가충언은 비록 당시 적국의 정탐이며,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후세 본국의 史家(사가)이나
사실의 진실을 찾기 위하여
불가불 본국 사가의 붓을 버리고
적국 정탐의 말을 믿을밖에 없다.
차부라.
본국 사가의 기록한 연대가
적국 정탐의 보고만도 못하니
얼마나 본국의 史家(사가)를 위하여 통곡할 일이냐.
<출처: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연대에 대하여>
정탐: 드러나지 않은 사정을 몰래 캐내는 일
차부라: 사전에 없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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