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술] 롱티라고 다 같은 롱티는 아닙니다만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edited)

이태원 소방서 건너편에 있는 펍, 썰스데이 파티는 평소에는 한적하지만 주말이 되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늘 시끌벅적한 팝음악과 그 음악을 비집고 사이사이로 영어와 한국어가 들리고, 여기가 과연 한국인가 싶을만큼 다양한 외국인이 함께 어울려 춤추고 어울리는 곳이다. 다트와 비어퐁이 설치되어 있어 그 분위기가 더 이국적이다. 나와 내친구들은 썰스데이 파티를 줄여 늘 목(요)파(티)라고 부르곤 했다. 목파는 부산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체인을 낸 펍이라 대한민국 전역에 있고 내가 자주가던 지점은 이태원점과 홍대점이었다. 목파는 맥주부터, 위스키, 데낄라에 각종 칵테일까지 아주 다양한 종류의 술을 파는데 가장 시그니처 술은 롱아일랜드 아이스티이다. 롱티 레귤러와 라쥐 두가지 사이즈 중 나와 친구들은 늘 라쥐를 먹었다. 라쥐 사이즈가 어찌나 큰지 1리터는 족히 되는 컵을 들고 마시는 모습을 처음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목파를 다니던 초반에는 늘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직접 들고 핸드폰과 비교하며 찍은 사진이 한두장이 아니다. 가녀린 손목을 가진 사람을 손을 부들부들 떨만큼 정말이지 크다. 목파의 롱티 맛이 어땠냐고 묻는다면...달짝지근하면서 독하고 밍밍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다? 많이 마시면 금방 취하기는 하지만 맛이 어떻다 따지고 평가할만한 맛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을 알게 된 20대 후반 이후로 그곳을 들락거리며 마신 레귤러는 10,500원 라쥐 사이즈 롱티는 수많은 기쁨과 즐거움과 수치와 흑역사 선사했다. 만원의 행복이랄까...술을 마실 때 가성비를 많이 따지는 나로서는 비싸고 양이 적은 칵테일을 잘 즐겨먹지는 않았다. 목파처럼 저렴한 칵테일 외에는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사먹어야할 가치를 못느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 칵테일을 먹어야 할 순간이 오면 내가 늘 시키던 술은 롱아일랜드 아이스티이다. 진에 보드카, 럼, 데낄라가 들어가는데다가 이마저도 부족한지 오렌지 술인 쿠엥트로까지 총 5가지 술이 들어간 롱티는 칵테일계의 폭탄주로 유명하다. 이 5가지 술에 레몬주스와 콜라를 섞으면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로 술이 많이 들어가서 그 어떤 칵테일보다 빨리 취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이 레시피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고 바마다 비율이나 종류를 달리하며 고유의 칵테일을 제조한다. 목파의 롱티는 단맛이 많이 나서 시럽이 첨가되지 않았나 싶고 일반 롱티에는 데낄라를 넣지 않고 데낄라를 추가한 별도의 롱티를 판매한다.

동화 속의 마을처럼 아름다운 오흐리드는 한달 살기를 해보고 싶은 곳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마을은 전통적인 건축물이 가득했고, 버스를 타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마을이라 두발로 마을 구석구석을 훑을 수 있고, 물가도 저렴하거니와 마을은 바다로 착각할 법한 호수를 품고 있었다. 수심 290미터의 오흐리드 호수는 유럽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라고도 한다. 그 크기가 광대해서 사람들이 바다로 착각을 하기도 하고 오흐리드가 배경인 영화 비포더레인에서는 바다로 묘사되기도 했다고. 물에서 놀고 물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낮에 호수에서 수영을 할 수 있고, 밤에는 호수가 보이는 휴양지풍의 바에서 술을 한잔 마시는 게 그 무엇보다 좋았다. 오흐리드의 첫 날, 마을을 어슬렁 어슬렁 거리며 걷고 탐색하다 해질 녘 핑크색으로 물든 하늘에 이끌려 호숫가를 천천히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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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스름한 호수와 푸른 잔디, 구름 사이로 보일듯 말듯 은은하게 보이는 석양의 조화가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아름다웠다. 호수를 따라 한참을 걷고 요트와 갈대밭을 지나니 그럴싸한 바가 하나 나타났다. 야외 좌석과 비치베드에는 자유분방하게 누워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로 휴양지스러운 느낌이 폴폴 풍기는 곳이었다. 그 바의 이름은 쿠바리브레였다. 우리는 푹신한 쿠션이 있는 야외석에 자리를 잡았다. 가벼운 음식과 함께 고른 칵테일은 당연히도 롱아일랜드 아이스티였다. 맥주는 2,000원 선에 칵테일은 5,000원 선으로 가격으로 술도 음식도 가격이 참 착하다. 해가 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롱티를 한 입 마셨다. 어, 이게 롱티라고? 내가 목파에서 먹었던 롱티랑은 맛이 완전히 달랐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목파의 롱티 맛과는 달리 좀 더 재료들의 배합이 오밀조밀 어울려 감칠맛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그 바에 분위기에 취해 J와 나는 롱티를 몇잔이나 마시고 다른 칵테일도 마셨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컴컴하지만 분위기 있는 칵테일바로 자리를 옮겼고 또 다시 롱티를 시켰다. 분명 같은 롱티이지만 좀 전에 쿠바리브레에서 먹던 롱티와도 목파 롱티와도 맛이 달랐다. 좀 더 레몬맛이 강하게 났고 더 상쾌한 맛이었다. 그 때 처음 사람들이 왜 비싼 돈을 주고 칵테일을 마시는지 알게되었다. 칵테일은 단순히 달달하고 맛있는 술이 아니라 바텐더의 유려한 손길과 정성, 신념, 노하우가 들어간 하나의 작품이다. 얼음을 어떻게 젓고 쉐이킹을 어떻게 하는지, 어떤 순서로 술을 넣는지, 같은 레시피여도 타이밍과 노련함에 의해 그 맛은 천지 차이가 난다. 그 미묘한 한끗차로 맛이 달라지는 칵테일의 세계에 관심을 갖아 8주 정도 진행된 짧은 칵테일 클래스도 참여했었는데 손이 둔탁하고 느린 나는 맛깔난 칵테일을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을 유일하게 얻었다. 지금은 또 칵테일을 먹는 입이 고급이 되어서 다시 쿠바리브레에 가서 롱티를 먹으면 '맛있다.'고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오흐리드에 가서 한달을 살면서 쿠바리브레의 모든 칵테일을 마시고 싶다. 비치베드에 누워 햇볕을 쬐다가 중간중간 수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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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빠져들 정도로 잘 쓰시네요~!
술을 잘 못하지만 그 롱티 한 번 마셔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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