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초록 물고기(1997)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3포 세대’라는 말이 등장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처음엔 결혼과 출산, 육아를 포기해서 3포였는데 그 사이 주택과 인간 관계까지 포기하는 5포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꿈과 희망까지 포기하는 6포가 되었다. 포기할 게 너무 많아 아예 ‘N포 세대’라고까지 부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의 질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지 못하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만이 남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운이 상당히 좋았다. 집안은 비록 도시 빈민이었지만 1980년대 호황기에 청소년기를 보내 밥 굶을 걱정은 면했다. 과외가 금지된 덕분에 학원 한번 안가고 대학에 갔고, 취직이 너무 잘 되던 19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나와 시험 한번에 언론사에 입사했다. 계속 매체 활동을 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는 데 유리한 이것저것 상징 자본을 적지 않게 획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디 학교에 교수직 하나 얻지 못하고도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로 10년 이상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내가 21세기에 얻은 모든 혜택은 사실상 20세기를 발판으로 삼고 있다. 그때는 여하튼 기회의 평등이 어느 정도 보장되던 시기였고, 과외 안 받고 교과서만 파서 공부만 잘하면 좋은 대학 간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자라나는 세대에게까지 네가 하기 나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식의 성공 여부가 부모의 재력에 달린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게 됐다. ‘3포 세대’라는 말이 출현한 것은, 신분제도도 아닌데 신분제처럼 삶의 조건이 자식 세대에게 고스란히 유전되는 상황이 고착된 것과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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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건대, 1997년에 나온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 물고기’는 아마도 N포 세대의 출현을 예고하는 징후적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20세기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 더 이상 기회는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열리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징후. 평등과 공정이 속이 텅 빈 정치적 수사에 그치고 삶의 질은 한 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시대의 예고. 상승의 에너지가 멈추고 하강으로 돌아서는 변곡점의 상징.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막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막동이(한석규)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미애(심혜진)와의 인연으로 그녀의 스폰서이자 나이트클럽 사장인 배태곤(문성근)을 만난다. 막동이는 배태곤의 눈에 띄어 주차장 관리 일을 맡았다가 점점 위험한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그는 이게 위험한 길이라는 걸 눈치 챌 정도로 영악하지 못하다. 배태곤이 상징하는 바,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나이트클럽 사장의 자리로 올라섰기 때문에, 막동이에게도 삶의 수직 상승이라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환상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의 언저리에는 때로는 궂은 일도 마다치 않아야 한다는 룰이 불문율처럼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 룰은 결국 파멸의 길이다. 궂은 일을 다 처리하고 나면 쓸모없어졌다고 판단된 순간 간단하게 제거되고야 마는, 더 큰 세상의 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태곤은 막동이에게 자주 묻는다. “너는 꿈이 뭐냐?” “너는 이 다음에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막동이의 꿈은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배태곤 처럼 상승해서 어떤 지위를 획득하는 게 아니다. 지금은 재개발로 옛 흔적이 거의 사라져 버린 일산의 남은 집에서 그의 형제들과 작은 식당 하나를 차리는 것이다. 사실 그거 하나였다. 그리 거창한 꿈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모두 각자 먹고 사는 일에 바쁘고, 그렇게 각자도생하는 와중에 막동이도 자신에게 주어진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 것을 사실상 강요 받은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각자도생의 길은, 먹고 먹히는 정글 속에 외떨어진 후미진 자리일 뿐이다. 대개, 그 자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난 뒤의 상황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태곤의 노예처럼 사는 미애처럼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벗어나려고 발악만 하다가 다시 붙들리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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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동이에게 주입된 배태곤의 꿈은 기만일 뿐이다. 배태곤은 여하튼 꿈의 실현이 가능한 시대를, 남의 뒷통수를 때리고, 벼슬아치들에게 청부폭력이든 성이든 상납하면 그래도 일이 잘 풀리는 시절을 살았기에 눈 딱 감고 저지르고 버틴만큼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막동이는 처음부터 막다른 골목이다. 벗어나려고 해도 탈출구가 없다. 친구는 있지만 동지가 없다. 가족은 있지만 남보다 못하다. 그의 손을 잡아 이끌어줄 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래서 나는 막동이를 꿈과 희망조차 포기해야 하는 N포 세대의 징후적 상징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막동이는 21년의 시간을 넘어 이창동의 2018년 영화 ‘버닝’의 종수(유아인)와도 연결되어 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디서부터 상황이 꼬인 건지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막연함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창동이 바라본 20세기와 21세기의 청춘이 처한 상황은 똑같거나 더 악화되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마도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일 것이다. 막동이가 없는 자리에서 막동이의 꿈이 이루어진 장면. 부재와 평온이 공존하는 그 아름다운 장면은 묘하게 슬프다. 그러나 그건 감독 이창동의 의지적 질문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왜 처음부터 이렇게 못했는데? 꿈과 희망이 있다면, 왜 지금 당장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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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영화제
10월 2일부터 매주 토/일 오후 4시 장충동 20세기 소년에서 20세기영화제가 열립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화상 연결해 GV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많이들 와주세요.^^
프로그램과 일정표는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https://20thcenturyboy.org/?page_id=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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