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자전거 도둑(1948)
20세기 소년에서 '20세기의 가을'을 장식할 '20세기 영화제'가 10월부터 열린다. 앞의 문장에서 20이라는 숫자가 세 번이나 반복됐다시피 20세기 소년에게 '20'은 의미 있는 숫자다. 그래서 이번 영화제를 위해 모두 2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모두 영화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작품들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선정 기준은 전적으로 20세기 소년의 기억과 관련이 있다. 어디 영화사 책에서 뽑혀져 나온 리스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20세기에 생물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성장을 거쳐온 '나, 최광희'라는 인물의 개인사적 목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20세기 영화제는 영화사에 대한 참가자들의 지식과 교양을 넓히려는 시도가 아니다. 20세기 소년이라는 필터를 통해 소환되는 영화들이 한 구체적 인물과 어떤 정서적 상호작용을 했는지 추체험해보고, '20세기적인 것'에 대한 퍼즐을 다시 맞춰 보려는 시도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작인 '자전거 도둑'(1948)은 내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가장 먼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작품이다.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본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일하던 작은 누나의 집에 놀러갔는데, 거기 고전 영화 비디오 테이프들이 꽤 많았다. 아마도 누나는 고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누나는 이 작품을 골라 플레이어에 꽂아주고는 "정말 걸작이다."라는 말로 호기심을 부추겼다. 누나는 내 성장기의 문화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지 1년 남짓 된 무렵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 내게 이 영화는 아버지의 추레함에 대한 작품으로 각인되었는데, 생전의 아버지를 보며 느꼈던 가난의 무게, 책임감의 무게, 막막함의 무게가 이 영화의 아버지에게서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시 그런 무게를 이고 진 아버지들을 많이 봤다. 지방 출신의 도시빈민이 밀집한 서울 봉천동에서 자랐기에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그들의 아버지들은 아파트 경비원이거나, 청소 용역이거나, 건설 현장에서 노가다를 뛰는 분들이었다.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품은 저마다의 가난은 나 혼자 불우한 것은 아니라는 묘한 유대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축 쳐진 천정으로 밤마다 쥐들이 우르르 달리는 소리는 가난을 물질적으로 형상화해 내개 엄습했는데, 그 불우감을 떨쳐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가난이라는 추레한 현실이 영화적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데서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게 영화란 별 세계의 실현 불가능한 모험과 휘황찬란함을 전시하는 매체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운동 삼은 이동 수단 쯤으로 인식되는 자전거가 전후 이탈리아에서는 가진 게 몸뚱아리밖에 없는 이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나 보다. 어렵사리 일자리를 얻은 이 영화의 아버지는 아내가 저당 잡힌 침대보 값으로 먼저 저당 잡혔던 자전거를 되찾아 야심차게 새 직장에 취직한다. 그러나 야심은 하루에 머물렀다. 그가 벽보를 붙이는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그의 자전거를 훔쳐 갔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영화는 그와 어린 아들이 자전거를 찾아내기 위해 로마 시내를 헤집고 다니는 절박함의 연대기로 관객들을 이끈다.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멸감의 문제이기도 하며, 소외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필연적으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물질적 결핍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에 생기는 정신적 궁핍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적 요건 가운데 하나인 이타성의 상실, 즉 타인의 상황을 헤아리는 능력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훔치거나 빼앗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주인공의 자전거를 훔친 이 역시 그와 처지가 다르지 않은 가난한 자일 게 틀림 없다.
그들이 도둑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법한 노인을 추격했을 때, 노인은 겨우 스프 한 그릇을 얻어 먹기 위해 교회 미사에 참석하고 있다. 이때 신부는 역설적이게도 "고통과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고통과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인을 잡으려는 주인공이 소동을 일으키자 교회의 사람들은 그를 교회 바깥으로 내쫓으려고 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개인의 구조적 가난 앞에서 시스템의 선의가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기도문은 스프 한 그릇과 등가의 교환 가치를 갖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자전거를 찾지 못하면 내일부터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될 주인공의 처지를 교회 혹은 사회는 감당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이 걸작인 이유는 가난한 자의 절박한 하루를 통해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화학자들이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의 진수라고 평가한 대목이다. 영화 감독은 사각의 카메라 프레임에 어떤 장면을 담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예술가다. 훌륭한 영화 감독은 살아 있는 인물의 개연성 있는 해프닝을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가 드러나도록 프레임을 설계한다. 이 작품에는 그 촘촘한 설계도가 놀랍도록 정교하고 웅대한 건축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 들어 있다.
이 영화를 중학생이었던 내게 소개해준 작은 누나와 나는 15년 전 가족의 관계를 끊었다. 전남으로 시집간 그가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을 떠나 어린 딸과 함께 무작정 상경했을 때, 말년의 어머지와 형제들은 그의 신경증적인 패악질을 감당해야 했다. 젊은 시절 내게 서예 학원비를 대주고,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을 보여주던 누나는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그게 다 가난 때문이었다. 가난 때문임은 알지만 돌이킬 수 없는 관계도 있다. 그녀의 정신적 궁핍이 가족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의 자전거를 훔치듯 가난은 도미노처럼 사람들을 쓰러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