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100] 패터슨 -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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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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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고편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을 쓰지 않는 일상이 궁금했다. 글은 편집본이다. 삶의 일부이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쉽지만, 그의 하루는 글보다 길고 복잡하다. 쓰지 않는 시간, 대체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사나, 정제되지 않은 일상의 감각을 듣고 싶었지만, 질문이 모자란 탓에 대답하는 그도 나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함이 오갔다.

영화 ‘패터슨’은 이 모호한 질문에 찰떡같이 대답해주었다.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으로 일상의 감각을 원래의 속도대로 생생하게 풀어낸다. 뉴저지주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기사 ‘패터슨’ 씨는 예술적 재능을 지닌 꿈이 많은 사랑스러운 아내 ‘로라’, 불독 ‘마빈’과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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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루는 똑같다. 로라와 한 침대에서 자다가 손목시계가 깨우는 고독한 마법 알림에 맞춰 오전 6시 반쯤 일어난다. 일터로 출근한다. 회사 동료 ‘도니’와 안부를 확인하며 업무를 준비한다. 버스를 운전한다. 점심에는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폭포 앞에서 먹는다. 퇴근한다. 저녁을 먹는다. 마빈과 산책하러 나간다. 동네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짬이 생길 때마다 머리로 손으로 시를 쓴다.

그의 하루는 매일 다르다. 뭐 하나같은 게 없다. 삶은 변주된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포즈도 일어나는 순서 아침 인사 방식도 모두 다르다. 집에 커튼의 문양은 매일 바뀌고 문짝의 색도 바뀐다. 어느 날 로라는 컨트리 가수가 되겠다고 하고 다른 날에는 컵케이크 사업으로 성공할 거라 말한다. 산책하는 마빈도 다르다. 술집을 심술궂게 지나가는 하루가 있는가 하면 얌전히 알아서 기다리는 하루도 있다. ‘도니’의 불평도 매일 내용이 바뀐다. 버스를 타는 사람이 매일 바뀐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바뀐다. 우연히 마주치는 인연이 바뀐다. 대단치 않은 사건 사고는 매일 일어난다. 결코 하루는 반복되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하루가 찾아온다. 그 모든 건 그의 시가 된다. 매일 다른 하루를 살기에 그는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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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는 영화이다. 간만에 사건이라도 생기나 호들갑을 떨기도 전 주변 사람들의 농담으로 어느새 사건은 갈무리되어버린다. 재미없고 밋밋한 실제 삶과 다르지 않다. 대단하거나 특별한 일 혹은 자극적인 일이란 영화 속에서나 있고, 이 영화 속에는 우연이라도 그런 과장이 없다.

그러나 나태주 시인의 ‘들꽃’처럼 면밀히 차분하게 일상을 바라보자면 하루하루가 신기한 일투성이다. 우연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분명한 표지들이 넘친다. 쌍둥이를 낳는 꿈을 꾼 날 이후로 매일 마주치는 쌍둥이들, 코끼리 꿈은 로라의 예술이 된다. 흑백을 사랑하는 로라는 흑백 스트랩의 흑백이 칠해진 기타를 치고, 흑백으로 장식한 컵케이크를 성공적으로 판매한 후 흑백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우연히 만난 꼬마 시인의 ‘물이 떨어진다(water falls)’는 시는 저녁 식사 자리 폭포(waterfall)로 변주되고, 패터슨의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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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는 늘 패터슨의 시가 아름답다고 말하고 패터슨은 그 시를 세상에 내줄 마음이 없다. 비밀 노트 속에 숨겨둔 시. 로라와 복사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마치 그의 뜻이 실현되듯이 외출한 밤, 마빈은 그의 노트를 잘근잘근 씹어 없앴다. 마빈에게 ‘네가 밉다’며 조용히 속상한 마음을 삼키러 산책하러 나간 패터슨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패터슨’을 손에 든 일본 시인을 우연히 만난다. 그때도 패터슨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는 패터슨에게 노트를 한 권 선물한다.

“때론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다시 월요일, 절대 같지 않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나지만, 결말은 정해져 있다. 패터슨의 일상은 모두 시가 된다. 그가 세상에 시를 보여주지 않아도 살아가는 한 그는 시를 쓴다. 그가 만나는 사람과 모든 우연 그의 일상은 결국 시가 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패터슨은 시를 쓰기에 시인이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도 결국 글이 된다. 일상과 예술은 구분되지 않는다. 일상인과 예술인은 다르지 않다. 아니 글을 쓸 때의 감각으로 일상을 살고, 일상을 변주해서 글을 쓴다. 시를 쓰는 도중 방해받더라도 짜증을 내긴커녕 미소를 띠고 온전히 그 사람에게 자신을 내주는 패터슨, 그렇기에 그의 일상은 아름다운 시 자체이다.

감독에게 영화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의 삶과 일상이 영화가 되고 영화에서도 일상은 분리되지 않아 이런 삶과 닮은 영화를 만들었겠지. 패터슨 씨가 사는 패터슨 시에 오래 머물러 그의 시를 읽고 싶다.



p.s. 문라이즈 킹덤 커플이 승객으로 깜짝 등장해서 '무정부주의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깜짝 선물 같다.

-2021년 5월 22일, by 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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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ears ago 

환영합니다! <위즈덤 러너> 2기에 등재되셨습니다. 즐거운 레이스 되시기 바랍니다.

우와 감사드립니다 :D 레이스 열심히 이어가겠습니다
혹시 많이 번거롭지 않다면 Star is born을 영화 카테고리로 옮겨주실 수 있으실까요?

 3 years ago 

넵!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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