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남해
남해
왜 남해였을까? 고등학교 시절 땅끝마을이란 이유로 해남에 한 번 가보고 싶긴 했는데, 남해는 있는지도 몰랐다. 독립책방 덕분에 남해를 알게 되었지만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긴 휴가가 있으니 이왕이면 먼 남쪽으로 가야겠다 생각했다. 제주도는 사람이 많을 것 같고 거제나 통영을 생각하다가 남해를 발견했다. 남해라 검색하고 가장 처음 나온 포스팅을 한 번 쭈욱 본 이후 바로 말했다. '남해 가자.' 분명히 좋아할 거야!
남해에선 유독 넋 놓고 하늘을 많이 봤다. 한국의 하늘도 예쁘다는 건 작년 겨울 발견했다. 높은 빌딩이 가리고 있고 바빠서 볼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남해에는 고층빌딩이 없다. 산이 있고 밭이 있고 바다가 있고 섬이 있고 파스텔 풍의 마을이 있다. 그 모든 걸 모퉁이 돌아갈 때마다 번갈아 가며 볼 수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청명한 하늘이면 사진이야 동화처럼 예쁘게 나왔겠지만, 하늘의 모습은 이처럼 다채롭지 않았겠지. 온갖 구름에 정신줄 놓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오늘 본 채도가 낮은 파란빛 하늘은 푸른 수묵화 같아서 저렇게 그리고 싶어도 그릴 수 없었겠지. 인간의 눈이 얼마나 뛰어난지 사진을 찍으며 매번 감탄한다. 보는 것 만큼 예쁘게 나오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남해 바다 보고 에너지 듬뿍 받고 오란 말에 고마우면서도 그게 될까 싶었다. 내내 딴 생각을 했는데 막상 여행에 오니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거 가능하네. 평소 오지 않던 연락에 메시지가 오고 할 일은 쌓였고 L도 휴가 끝나고는 죽었다 생각하고 일처리 할 게 산더미지만, 바다 보고 하늘 보면 그저 좋다.
드라이브하며 보는 하늘과 바다 섬 패키지 너무 좋아. 이 풍경은 여기 밖에 없겠지? 이 느낌은 영원히 그리울 거야. 한적하고 좁고 꼬불꼬불 정겨운 바다와 맞닿은 해안 도로
평소 통제 당하는 걸 못 견디지만, 여행에 오면 좀 자유롭게 놓아두고 현실에 수긍하는 편이다. 날씨는 어쩔 수 없고 오히려 생각보다 이동 중 비가 많이 안 와서 다행이었다. 남해는 예쁜 만큼 불편한 동네였다. 유럽처럼 일찍 일찍 문을 닫고 자영업자들도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재료가 떨어지면 몇 시라도 문을 닫는다. 없는 메뉴도 많고 커피집도 그리 많지 않고 건물도 띄엄띄엄, 여유로운 만큼 조금만 불편하면 된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삶이 어울리는 동네
날씨가 맑고 휴무일도 빠짐없이 챙겼는데 오늘은 L이 점심 쯤부터 단단히 체했는지 컨디션이 영 안 좋다. 아파도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둔탱이, 많이 아픈지 참을만한지도 헷갈린다. 계획에 없이 모든 동선을 바꾸고 사천까지 가서 타이 마사지를 받았다. 빵과 맛없는 김밥과 우동 몇 입 빼고 종일 나까지 굶었다. 오늘 먹어 볼 음식도 모두 패스, 하필 숙소 바꾸는 날이라 들어가서 쉴 곳도 없다. 가는 날이 장날, 일찍 숙소로 돌아와서 내일까지 푹 쉬기로 했다. 아픈 건 서러워.
그러고보면 L의 아픔의 바로미터는 장난이다. 평소에는 쉴 새 없이 말도 안되게 유치하고 귀찮은 장난을 끊임없이 내가 화낼 때까지 치는데 아픈 L은 진지하고 과묵하다. 아픈 건 딱하지만 그 모습은 좀 좋다.
여행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나는 이제 L이 아니면 다른 누구가와 생활인으로서 파트너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꼼꼼하고 살뜰하고 배려넘치는 L의 습성에 중독되었다. 어린애처럼 곤란한 상황이 되면 'OO해조'라고 말한다. (마지막 힘을 짜내 현X해조는 휴업이란 농담을 하고 자고 있다.)고작 3년 사이에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이상하다. 한 때는 배낭 여행도 끄덕 없었는데. 이건 마치 어릴 적 읽었던 신발 신던 여우와 같다. 난 L이란 신발을 신어버려 더 이상 벗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시간이나 익숙함의 문제가 아니라 동반자로서 생활인으로서 L은 나보다 몇 배로 훌륭하고 재주도 많기 때문에 엉망진창인 나의 나머지 생활을 듬성듬성 채워주고 있다. 가끔 L에 비하면 기능인으로서의 나는 전혀 쓸모 없는 여행지에서 충동 구매한 예쁜 인테리어 소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입버릇처럼 귀여우면 최고야 하지만 사실 난 실용주의자기도 하다.
영화에서 보고 흠칫한 말이지만 누가봐도 L쪽이 정원사이다. 까다롭고 예민한 꽃을 잘 가꾸는 고기능 정원사
감정은 취사선택 할 수가 없잖아.
책도 안 읽고 단어도 혼동해서 쓰면서 왜 언제나 내 말을 요약하고 정리해주는 건 L이냐는 말이지. 바다를 보면서 마음이 쿵- 떨어지고 신경이 쓰이다 슬퍼지거나 화가 나는 비합리적인 감정을 헤집어보았다. 그때 깨달았다. 애정이나 의미를 남긴 채 미움이나 불편함만 쏙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실실적으로 관계 개선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별 소용 없다. 감정은 같은 확률의 패키지 꾸러미와 같아서 통째로 넘겨버리거나 통째로 받아들여야 한다. 흘려보내지도 모두 간직하지 못해 괴로운 마음을 남해 바다에 두고 가야겠다. 남해 바다는 따뜻하고 아주 넓고 아름다우니까 나의 자잘한 묵은 감정이야 아무렇지 않게 해소해버릴 것이다.
꽤 색이 강했고 여러가지 자잘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다정하고 아기자기한 동네로 남을 것 같다. 이렇게 휴가다운 휴가를 보낸 게 얼마 만인지 괜히 고맙기도 하고. 아직도 잘 모르지만 난 남해가 참 좋다. 날씨가 좋은 봄 가을에 다시 한 번 오고 싶다. 그때까지 잘 있길, 남해 안녕 -
2021년 8월 18일, by Stella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네요 ㅋㅋ
역시 전생에 나라를 구해놓은 것 같습니당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