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번의 여름] 33. 에필로그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6 months ago

스물두 번의 여름

33.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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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낯익은 어둠과
새로 발굴될 미지의 어둠을
환하게 비추는 그날까지
계속 소울필터를 켜 둘 거야

흐린 날에도 맑은 날에도
그 모든 계절을 보내주며 묵묵히 길을 걷자
매일 기쁘고 행복할 거야
현실이 꿈속일 거야
시간과 존재는 영원할 거야

매일 밤
등대에서 쪽잠을 청하며
항구를 안내하는 등대지기처럼
매일 아침
깨어나 나를 바라보며
느낌을 조율하고 소울 필터를 켜 둘 거야

사랑의 길을 걷다 보면
막막하고 희뿌연 시야 속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어 막막한
미지의 모든 답을 결국 알게 될 거야

그게 무엇이든
그게 무엇을 말하든
그건 의미 있는 일이었을 거야

모든 무의식과 화해하고
그림자를 통합하고
좀 더 크고 부드러운 나를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 두려움 없이 사랑만 해야지
소울 필터를 켜고
사랑과 기쁨을 만나서
지금 선택한 운명의 길을 씩씩하게 걷자





라다크에서 보내는 일상에 적응한 어느 봄날, 젠젠 님과 함께 작업을 하러 한 카페에 들렀다. 그녀는 노트북을 챙겼고 나는 안경과 책 한 권을 가져갔다. 그녀들은 라다크에서 이미 가본 적 있는 카페와 음식점에 단골손님이 되는 쪽을 선호했다. 내가 여정에 합류한 이후, 새로운 카페나 음식점을 검색해 찾아내면 그래도 그녀들은 기꺼이 그곳에 동행이 되어 주셨다. 맛있는 카페라떼가 먹고 싶었던 그날은 젠젠 님과 둘이 아직 가본 적 없는 그 카페에 갔다.

기대했던 만큼 카페라떼는 아주 맛있었다. 평소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는 젠젠 님께도 나의 권유로 카페라떼를 마셨다. 우리는 진심과 삶이 담긴 글을 서로 읽었던 적은 많지만, 직접 마주 보고 1:1로 본질대화를 나눈 적은 아직 없었다. 어쩌다 보니 노트북과 책을 덮어버리고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소회와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것은 치유도 한풀이도 아니었고 확인이나 뭔가를 인정받기 위한 과정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삶에 대한 고백과 기쁨으로 피어오르는 교감의 순간이었다.

만족감과 충만함으로 부푼 가슴에서 둥둥거리며 들려오는 심장 박동 소리를 BGM삼아 창밖을 바라봤다. 건너편 건물 간판에 열쇠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열쇠를 찾으러 라다크에 온 건 아니었는데 열쇠가 보였다. 나는 멍하니 열쇠를 바라보았다.




라다크에서 초모와 함께 춘자 팀은 오라클을 만났다. 오라클은 신탁을 전하는 사람이다. 모두의 앞에서 궁금한 걸 질문하면 답을 준다고 했다. 그때 묻고 싶은 건 단 하나였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고 싶어요.’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이란 건 알고 있었으나 그 질문 말고는 궁금한 게 없어서 그냥 그걸 했다. 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오라클이 처음 의식을 시작할 때 접신하는 과정, 그 모든 행동과 에너지는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진지한 태도로 삶을 바쳐 이 일을 기쁘게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질문을 받은 그녀가 돌려준 말은 예상대로 너무 뻔하고 진부하고 틀에 박힌 대답처럼 느껴졌다.

‘종교를 믿어 보는 건 어때? 지금 네게 주어진 이 삶은 너무나 소중한 기회야. 인간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거지. 너는 아주 복 받은 사람이야.’

그래도 종교를 믿고 싶진 않았다.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답을 원했던 건 아니었기에 그녀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무언가를 염원하며 서로의 마음이 오고 갔던 그 현장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오라클은 내가 찾는 답, 정확히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는 것을. 나에게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운명이고, 운명은 나의 근원인 영혼과 연결되어 있을 때만이 확인하고 믿을 수 있는 종교였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미래는 모르겠지만,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 안의 사랑을 밝히는 것, 사랑을 발견하는 것, 사랑으로 피어나는 무언가를 모두 해보는 것. 그렇게 내가 믿는 운명의 길을 걷고 계속 걷는 것이었다. 그때 오라클은 내가 간절히 찾던 답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단지 그때의 나로서는 그 답을 바로 해석할 수 없었을 뿐이다.




종종 글을 쓰며 물었다. 만약 더 높은 나선형 계단을 오르기 위해 한 번 더 영혼이 죽은 것 같은 고통을 겪고 길을 헤매어야 한다면? 사랑의 그릇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지금보다 더 오래도록 소울필터가 꺼진 채로 멈춘 시간을 견뎌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거야?

오래 고민할 필요 없이 대답은 언제나 YES이다. 몇 번이고 YES이다. 어떤 날은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하겠지만, 그것 역시 여정의 과정이 될 것이다. 생이 주는 모든 운명의 나선형 계단을 끊임없이 기꺼이 즐겁게 오르겠다. 부서지더라도 계속, 무너지더라도 계속, 고통스러워도 계속 사랑을 찾겠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말한다. 오늘도 운명을 살아갈 기회가 왔구나.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나를 조율하고 내 안의 사랑을 채우고 소울 필터를 켜는 일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라클의 말처럼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Despite knowing the journey and where it leads... I embrace it.
-영화 컨택트(Arrival, 2017)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내가 되기 위해 지나온 그 모든 여름을 사랑해. 그 여름을 맞이하게 해 준 봄, 가을, 겨울도 사랑해. 앞으로 맞이할 다가올 여름을 사랑해. 얼마든지 덥고 습하고 뜨거워도 좋아. 이젠 여름이 주는 강렬한 태양의 열정을 품을 수 있으니까. 여름에 생동하는 원시적인 생명력에 감탄할 수 있으니까.

나는 여름에 태어난 여름의 아이야. 여름을 사랑할 운명이었어.






저의 두 번째 운명기록, 스물두 번의 여름을 읽어주신 당신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시 운명을 만나면 지금처럼 스팀잇에 적게 되겠죠. 스팀잇은 저의 운명 아카이브이니까요.
마침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에요. 눈도 내렸고요.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D


2023년 12월 25일, by 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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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
행복한 성탄절 보내세요!

 6 months ago 

림님 메리크리스마스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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