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pen] D-1 일 그만둔지 4시간, 배낭 메고 떠나다

in #camino6 years ago (edited)

기차 안이다. 잠을 청하려 여러 음악을 들어보지만 먹은게 없어서 그런가. 영 잠이 오질 않는다.

지난 사흘간 불규칙한 스케줄로 10시간도 자지 못했다. 마지막 출근과 곧 시작될 여정에 설레서 더 그랬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날은 셀 수도 없다. 난폭하고 비겁하며 우리의 팁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셰프 덕분에 조금 더 쉽게 마음을 정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고한 날, 나는 모두를 배신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셰프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나에게 딜을 해왔다. 웃으면서 거절했다. 일을 관두는 날까지도 그는 나를 설득하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했다. 많이 미워했던 셰프였는데, 그저 꼭 안아 주었다. 마지막 서비스를 마치고 동료들과 애써 쿨하게 헤어졌다. 나를 여동생처럼 생각한 지브리가 있는 힘껏 안아줄 때는 조금 울컥하기도 했지만.

집에가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매일 밤 정각마다 하얀빛으로 반짝이는 금빛 에펠탑이 오늘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안녕, 그동안 나를 위로해주어서 고마웠어.

밤 1시가 넘어 집에 왔는데 동생들이 안자고 기다리고 있다. 내일 일찍 떠나니 미리 인사를 했다. 이 원룸에서 네 명이 북적거리고 잘도 살았다. 짐을 싸고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왔다. 내가 맨 것은 사실 배낭도 아니었다. 오래 전 동네 행사에서 참가상으로 받은 메이커도 없는 책가방에 양말과 쪼리 한켤레, 여분의 반팔 티와 반바지, 속옷 한쌍, 칫솔과 선크림, 스포츠타올, 침낭과 카메라, 1회용 렌즈와 선글라스, 그리고 이 노트 한권을 챙겨 넣었다. 스타킹 끝을 잘라서 레깅스처럼 신은 뒤 그 위에 9부 정도 되는 스포츠 레깅스를 입었다. 상의로는 히트텍 목폴라, 그 위에 얇디 얇은 잠바, 마지막으로 초경량 패딩을 입었다. 남미여행을 책임졌던 트레킹화와 알록달록한 스카프도 잊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몽파르나스역으로 한참을 가고 있는데 문득 체크카드를 집에 두고 온 것 같았다. 현금은 200 유로밖에 없는데.. 순례길을 마친 뒤에도 한달 간 서핑과 여행을 할 계획인데 30만원으론 택도 없다. 지금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면 기차는 무조건 놓치고 말 것이다. 차갑게 식어 땀에 젖은 두 손으로 옷 주머니와 가방을 뒤졌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이 날만을 기다렸는데. 시간도, 승객도 멈춘 듯한 고요한 지하철 안에서 숨죽인 채 초조하게 부산을 떤 끝에 가방 속 주머니에 꽁꽁 숨은 카드를 발견했다. 긴장이 풀릴.. 틈도 없이 기차 탑승시간이 코앞이다. 지하철 역에서 기차 역까지 한참을 걸어가야하는 줄 몰랐다. 잠도 못잔 빈 속에 냅다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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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으로 기차를 잡아 타서 앉았는데 바로 출발한다. 며칠 간 잠을 못자고 길을 떠나게 되어,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보다 쌓인 피로의 무게가 크다. ‘자고싶다..’ 라는 생각만 할 뿐, 까미노 길을 향한 경건한 마음을 다질 여유가 없다. 남미여행을 위해 페루에 첫 발을 내딛였던 날도 이랬다. 새벽 1시에 공항에 도착해 새벽 3시 버스를 타고 바로 길을 떠나지 않았던가. 뭐가 그리 급한걸까. 스스로를 턱없이 유유자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전쟁통같은 주방에서 일할 성격이 못된다고 한숨만 내쉬던 날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여행할 때의 나는 다르다. 무엇 하나 놓치는 것이 아깝다. 프랑스 남부를 향해 달려가는 차창 밖으론 빠리 시내에선 볼 수 없었던 프랑스의 전원풍경이 펼쳐지고 있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되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를 눈과 마음에 담았다. 이 또한 아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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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인 생장 피에드 포드역으로 가려면 바욘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환승까지 2시간의 여유가 있다. 배가 고프지만 기차역 근처는 어수선하니 시내로 성큼성큼 들어가 본다. 빠리 시내가 눈에 익은 내게 바욘은 동화같은 마을이었다. 큰 배낭을 짊어진 이들은 아마도 순례자겠지. 그 중에는 개를 데려온 이도 있다. 한 때는 성이었지만 지금은 학교가 되었다는 건물이 보이는 노천 테이블에 앉아 이 지역 명물이라는 바욘 햄, 잠봉이 들어간 오믈렛을 시켰다. 생햄으로 먹는 것이 나을 뻔 했지만 이렇게 현지의 여유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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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이 나서 본의 아니게 혼자 마을 구경을 하게 된 것이 마치 시애틀을 둘러보던 그 때 같다. 엄마의 사고 소식에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던 그 날,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창 밖에 떠있는 별만 보았다. 그 기억 뿐이다. 내내 별을 본 기억, 그리고 경유지인 시애틀 시내를 하염없이 걸어 다니던 기억.

부슬비도 내렸다 말았다 하는 흐린 날인데, 이끼풀처럼 미끄러운 색을 하고 있는 강이 차뵈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큰 마을이지만 텅빈 것 같이 조용하다 싶다가도 이내 들려오는 사람들 소리에 반가움을 느낀다. 골목길 한편에는 복실한 개 한마리가 꿈쩍도 않고 앉아있다. 누굴 기다리는 걸까. 그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나야말로 누구를, 아니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2015년 9월 15일. 길 위에서
@spring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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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그만두고 네시간 만에... 저보다 더 스펙타클하신 분이 여기 계셨군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많은 위로받으셨길 바랍니다. 기대할게요!!

그래퍼님! 모니터에 먼지가 붙어서 '얼' 그만두고 네시간 만에.. 로 읽고 ㅋㅋㅋ 얼~~~~ 네시간만에~~~인 줄 ㅋㅋㅋ 위로는 산티아고에서, 칭찬은 스팀잇에서! 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

잌ㅋㅋㅋㅋㅋ 모니터에 먼지도 좀 닦으시구... ㅋㅋㅋㅋㅋ SI 프로젝트 선정도 축하드려요 :)

와 1등!! (왠지 댓글쓰다 1등 놓칠거 같은 위기감도..덜덜..) 역시 스프링필드님의 여행기는 너무 좋네요..아련함도 느껴지고..(제 프랑스 여행기 때려치길 잘한거 같아요..그냥 스프링필드님꺼 볼래요ㅋㅋㅋㅋ)

우와 쪼야님이 1등 댓글 달아준 거 처음인듯 ㅠㅠㅠ 엉엉. 쪼야님은 1등 댓글이 아니어도 언제나 반갑고 환영이지요. 모두가 자는 시간에 썼더니 글에 새벽갬성이 들어가서 조금 아련해졌나 봅니다. 즐겁게 읽어주셔야 하는데 ;ㅁ;

1등 댓글 다는 동안 너무 떨렸어요!! 등록 누르면 2등 되어있을까봐ㅎㅎㅎㅎㅎㅎ 1등 댓글은 늘 놓치지만 제 마음속 1등은 언제나 스프링필드님입니다~^^ 오글오글

쪼야님 이미 양다리 다 들켰어요 ㅋㅋㅋㅋ 저야말로 쪼야님 팬클럽 회장 >ㅁ<

이거 르바님이 보면 안되는데...안절부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르바님 못본 듯! ㅋㅋㅋㅋ (속닥속닥)

아까 산티아고 카미노 하시던 분 스팀잇에 있었는데 두분 서로 만나시면 대박이겠당! 번개 밋업 하시구 포스팅하면 대박나지 않을까요? ㅎㅎ

안녕하세요 @justinelee 님. 산티아고 길을 걸으신 분들은 몇 분 뵈었는데 지금 걷고 계시는 분은 못보았네요. 저도 다녀와서 쓰는 글이랍니다. 말씀하신 분이 누군지는 궁금하네요. 아이디라도 알려주시면 좋을텐데..

앗 그렇네요 @silviue 님이에요 산티아고 순례길 3일차. 라는 글을 남겨주셨어요! 혹시 만나면 재미있겠당~

앗 지금 걷고 계시는 분은 아니고 이미 다녀오신 분이네요. 어쩐지 ㅎㅎㅎ 길을 걸으며 스팀잇을 하는 것은 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하고 싶지도 않을 거구요 :-) 그래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날짜를 제대로 안 봤네요! ㅠㅠ

역시 스프링필드님은 저랑 틀리시군요ㅠ 이전기억을 더듬어가듯 하는 세부적인 묘사에 생각이 추가된게 좋네요. 근데 짐을 너무 가볍게 싸신건아닌지ㅠ 평온한 마을아네요 바욘은...
본격 산티아고 순례길 포스팅 다음편도 기다리겠습니다^^

천재님 매의 눈으로 읽으셨군요 +ㅁ+ 순례길에서 일기장 한면에는 '길에서 있었던 일' 다른 한면에는 '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 으로 나누어 썼어요. 거기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서 기억나는 것을 추가했더니 글이 길어져서 걱정입니다 ;ㅁ; 무릎이 안좋아 걷기 편하려고 일부러 짐을 가볍게 쌌지요. 순례길에서 만인의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ㅎㅎㅎ

앗... 슬픈 글은 아니었는데 슬프게 들렸나 봅니다 ㅠㅠ 고마워요 제쉬카님 ㅎㅎㅎ :-)

어머 팁을 가로챈 셰프님 미워 .. !!
경유지로 시애틀에 머무르셨었군요 ^^ (그냥 괜히 반가워서 하는 소리랍니다)
스프링필드님 글을 찾아 읽어볼수록 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요.
참 글부터 매력적이신 분이에요. 갖고싶다!!!(윽 멍멍이소리;;)

라나님! 시애틀은 저에게 여러가지로 특별한 도시인것 같아요. 그래서 저야말로 라나님이 시애틀 계신다는 소리에 이미 라나님께 정을 줘버렸답니다 ㅎㅎ (물론 그림에서 이미 넘어감...) 요즘 라나님 글보면서 '내가 이래서 라나님 그림이 좋았구나' 싶을 때가 많아요. 라나님 그림은 몇 시간이라도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아요. 시부모님께 드린 그림 제가 몰래 훔쳐오고 싶어요...ㅋㅋㅋ

여행작가님이 쓰신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하는것은 모든 직장인들의 꿈이 아닐까요. 아쉽게도 저는 그렇게 못했어요. 이 여행기를 읽으며 대리만족만...

와아..... 제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인 것 같은데요 ㅠㅠ 북키퍼님, 감사합니다! 마음에 고이고이 간직할 거예요. 일 그만두고 여행가는 것은 꿀맛이지만...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하긴, 그래서 더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겠지요. 순례길은 은퇴하신 분들도 많이 오시더라구요. 아직은 기회가 없으셨지만, 앞으로는 있을겁니다 :-)

아~ 로망. 산티아고를 가시는 군요. 떠나는 아침의 부산함이 느껴지는 글이지만, 펼쳐질 풍경이 더 기대되는 순간입니다. 앞으로 올리실 글들이 기대됩니다. 산티아고 여행기를 몇권이나 읽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아직도 눈팅만 하다가 이젠 알베르게의 피곤함이 두려워지고 있는 멍청한 1인으로서........긴 길 아름답게 밟아가시길....

@raah 님의 로망이시군요! 산티아고 여행기를 몇 권이나 읽으셨다니...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났기 때문에... 육감적으로 느낀 것이 다입니다 ㅎㅎ :-) 그런데 정말 많이 알수록, 시간을 끌면 끌수록 두려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저도 요즘 출산과 육아가 두렵다는.... 아참, 순례길을 걸은 지는 2년이 훌쩍 지났어요. @raah 님 댓글 읽고 마지막에 날짜 집어넣었네요. 감사합니다!

기승전개 이건 반칙인데...

이봐이봐. 또 개소리...... 글 중에 프랑스라는 단어 쓸 때마다 프헝스라고 적어야하나 잠시 고민했습니다. 저는 불어 1도 몰라서.. 신경쓰이는 거 있음 가차없이 지적해주세요 ㅋㅋㅋㅋ

ㅋㅋㅋㅋ 그냥 편하게 써요. 여기서까지 빡빡하게 굴면 저만 이상한 놈 됨 ㅋㅋㅋ 아니 잠만... 그걸 노리고?

ㅋㅋㅋㅋㅋ 근데 김반장님 이상한거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

사진만 봐도 외국냄새가 물씬 풍기네요.
건물 건물하나가 너무 이뻐요.


팔로 꾸욱~❤

@noisysky 님 반가워요 :-) 프사짱이네요! 외국냄새란 말 신선한데요? 많이 많이 맡고 가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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