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와라, 무엇이든
나는 지금 델리 공항 근처 어느 호텔의 커다란 룸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다. 창밖 너머로 활주로 위로 떠올랐다 가라앉는 비행기들이 보인다. 이 방은 혼자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크다. 원래 이 방에는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어야 했기 때문에 침대는 두 개다.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연일 이어지는 델리에서 이틀을 버텨야 했고, 밖을 나돌아 다니다가는 열사병에 걸릴지도 모르니 종일 수영이나 하자며 근사한 수영장이 있는 호텔을 예약했던 터였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던져두고 수영장으로 직행할 참이었는데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다. 비행기에서부터 시작된 지독한 두통이 눈두덩이 주변까지 번져서 고개를 살짝만 저어도 뇌수가 출렁이는 것 같다.
‘지나치게’ 커다란 호텔 룸에, 어째서 나는 다시 이렇게 혼자 앉아 있는 걸까, 생각했다. 작년 12월, 몰타에서 아빠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에도 나는 ‘지나치게’ 커다란 호텔 룸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출국할 준비를 마치기까지의 2박 3일은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한 체력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전부를 몇 가지 끔찍한 사실을 받아들일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에 쏟아부어야 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아빠가 죽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아빠의 가는 길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 격리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 무서운 마음에 엄마에게는 도저히 전화를 걸 수가 없었는데 떠나기 전날 단 한 번의 통화에서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착하려 애쓰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겨우 든 잠에서 깨어나면 고작 30분이 지나있었다. 커다란 방, 커다란 침대, 커다란 테이블과 소파, 커다란 창이 모두 무서웠다.
델리의 ‘지나치게' 큰 방에 놓인 또 하나의 침대는 원래 젠젠의 것이었지만, 젠젠은 나와 함께 델리에 오지 못했다. 출입국을 위해 출력해간 서류 중 ‘인도 전자 비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비자 신청서'이고, 나보다 하루 늦게 신청한 젠젠의 비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직 발급되지 않은 상태이며, 신청서로는 출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천 공항 티켓 카운터 앞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젠젠은 나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비자가 나오지 않았으니 비행편이 있다고 해도 젠젠이 언제 뒤따라올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젠젠은 눈물을 쏟기 일보 직전이었다. 핸드폰을 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일단은 혼자라도 떠나야 했다. 비자를 출력해야 한다는 직원의 안내에 프린터가 있는 데스크로 달렸다. 컴퓨터 앞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컴퓨터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오늘의 빌런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준비된 파일을 출력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신청 폼 같은 것을 작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못 한 사람이 “여기서 그걸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고 소리쳤지만, 빌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가 너무 급해서 그러는데 한 장만 먼저 출력하면 안 될까요?” 하고 통사정을 하는 사람에게 옆에 있던 빌런의 친구는 “여기 안 급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며 반격했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직원에게로 달려갔다. “저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 될 것 같아요. 방법이 없을까요?” 결국 내 파일을 직원에게로 보내 필요한 서류를 출력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탑승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한다는 직원의 말에 상황을 정리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울먹이는 젠젠을 안고 말했다. “포기하지 마. 무조건 오는 거야. 그것만 생각해.”
젠젠에게는 비장하게 말해두었지만, 다시 혼자가 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와인을 두 잔 정도 마시고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와인 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눈을 뜰 때마다 두통은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비행기 안에 모든 아기가 일제히 울어대는 통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승객 중에 아기가 열댓 명은 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의식을 잠 속에 파묻으며 약 여덟 시간을 겨우 버티고 마침내 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카톡을 확인했는데 기대했던 좋은 소식은 없었다. 젠젠의 비자는 아직도 발급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입국 심사대에서는 지문이 인식되지 않아 또 한참을 고생했다. 두통을 넘어 열까지 나는 것 같았다. 나의 것과 비슷한 사이즈의 장밋빛 캐리어는 얼마나 많은지 몇 번이나 헷갈려서 우왕좌왕했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고 공항을 빠져나오자 건식 사우나의 열기가 얼굴과 머리카락에 달라붙었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 숨이 턱턱 막혔다. 숨을 쉬면 마스크 안에 더운 숨이 머물러 더 뜨거워졌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계속 숨을 참았다. 습하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불 택시 창구로 가서 직원에게 호텔 주소를 알려주었다. 400루피라기에 500루피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건넸다. 주소를 다시 묻는 그에게 핸드폰에 저장해 둔 바우처를 확대하여 보여주었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그가 말했다. "100루피짜리를 주셨어요. 운임은 400루피예요." "아, 미안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200루피짜리 지폐를 두 장 더 꺼내어 건넸다. 그가 다시 말했다. "에어컨 있는 차와 없는 차, 어떤 차를 원하세요?" 에어컨 있는 차로 달라고 했다. "에어컨 차는 500루피예요." 그가 써준 탑승 티켓을 받아 들고 대기 장소로 갔는데 내게 배정된 차는 누가 봐도 절대로 에어컨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이 생긴 차였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에어컨 진짜 나와요?", 기사 아저씨는 의기양양하게 "그럼요! 당연하죠!", 나는 조금은 체념하고 "절대 안 나올 것 같이 생겼는데요...", 그리고 승리를 확신한 그의 마지막 외침. "타세요, 타세요. 에어컨 나옵니다."
나는 델리에서 어떤 실랑이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델리에 머무는 동안은 어떤 흥정도 하지 않을 셈이었다. 마지못해 올라탄 차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은 뜨거웠다. 따뜻한 바람도 아닌 뜨거운 바람. 그래... 바람이 나오긴 나오네... 알 이즈 웰... 알 이즈 웰...
정신을 차리고 현금인출기에서 뽑아 마구잡이로 구겨 넣은 지폐 뭉치를 정리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2,000루피를 뽑아서 500루피를 냈으니 내 손에는 1,500루피가 있어야 하는데 남은 돈은 1,100루피였다. 젠장... 선불 택시 창구다. 내가 준 500루피를 100루피로 순식간에 바꿔치기한 것이다. 아, 결국 이걸 당했네. 델리 공항 선불 택시 창구는 인도에 도착한 배낭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이다. 바가지요금은 예사, 받은 지폐를 바꿔치기하거나 일부를 빼돌려서 돈을 더 내게 만든다. 지금껏 한 번도 당한 적 없는데 완전히 얼빠진 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은 그들이 바로 작업에 들어갔고, 아주 쉽게 성공이었다. 나는 심지어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한 것이다. 화는 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만났던 작은 친절들을 떠올렸다.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됐다고.
여유로운 출국과 웃음꽃 피어나는 인도 입국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의 충격과 공포가 시작부터 펼쳐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라다크로 떠나기로 하고 타로를 뽑았는데 예정된 미래가 약간 고진감래 느낌이길래 어느 정도 각오는 했다.
고생도 장애물도 빌런도 두렵지 않다. 와라, 무엇이든.
아침에 일어나 젠젠님 글을 읽으면서도 손에 땀을 쥐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재밌고 멋진 일이 일어나려고 이런 대단원의 시작일까요. 함께 보고 있을게요.
내일 아침이면 젠젠이 도착해요. 마음 고생 많이 해서 너무 반가울 것 같아요. 여기서는 매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스텔라에게 닿고 있기를!
스텔라님 통해 알게되었어요 ㅎ_ㅎ
인도라니 정말 큰맘먹고 모험을 떠나시는군요..
비장한 각오.. 화이팅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말이지 명불허전 인크레더블 인디아예요. 재밌는 이야기 또 전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