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독서가 P씨의 사정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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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P씨의 사정

   S o u l m a t e     n o v e l  



 주변에서 인정받는 독서가 P씨는 최근에 아파트의 같은 라인에 사는 K씨와 친분이 생겼다. 출퇴근길에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만나면 목례 정도만 나누던 P씨와 K씨는 동네의 피트니스 클럽에서 만나게 되었고, 같은 헬스 트레이너에게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다. 나이대가 비슷한 두 사람은 매일 같은 시간에 함께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K씨는 P씨의 취미가 독서이며, 블로그에 책에 관한 글을 꾸준히 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K씨는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도 책을 많이 읽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독서와 멀어졌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P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의 꺼져버린 독서의 열정을 되살릴만한 책이 없을까요? 책을 많이 읽으시니까…….”
  “한 번 찾아봐드려요? 이 세상에 책은 많고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킬 책도 얼마든지 있지요.”

 P씨가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그의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P씨는 자신에게 K씨의 잃어버린 독서열을 되살려야 하는 엄청난 과제가 주어졌다고 여겼다. 그는 황무지에 꽃을 피워야 한다. P씨는 K씨가 자신과 친분을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진 문제 중 한 부분을 용기 있게 열어젖혔다고 생각했다. P씨는 K씨의 독서 주치의가 된 것이다.

 P씨는 그 날 밤 집으로 가서 K씨의 독서 세포를 되살릴만한 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읽은 책의 대부분은 블로그에 기록해두었으니, 블로그부터 뒤져본다. 블로그에 접속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K씨가 어떤 종류의 책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K씨가 P씨에게 요청할 때 책의 기준은, ‘꺼져버린 독서의 열정을 되살릴만한 책’이라는 단서가 유일하다.

 P씨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은 피하기로 했다. 자신이 책을 선별하는 노력 없이 골랐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고, 시류에 편승하는 개성 없는 독서가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베스트셀러를 일부러 피하는 편이어서 읽은 책도 거의 없었다.

 오래 독서를 안 했으니, 재미 위주의 책을 고르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재미만 있을 경우, 자신을 가벼운 책만 읽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줄 것 같았다. 재미도 있고, 묵직한 주제도 있어야 했다. 나름 재미도 있고 묵직한 주제가 다 있는 책을 추렸더니, 후보 도서 세 권 모두 4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책이다. 오랜만에 책을 읽는데,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얇은 책 중에서 재미와 주제 모두 괜찮은 책을 다시 찾아보기로 한다. 블로그에 기록된 책 중에는 그런 책을 찾을 수가 없다. 이제 P씨는 블로그 이전에 읽었던 책들의 기록을 찾기 시작한다.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에 나름 정성껏 적어왔던 독서 기록장을 들추어 본다. 후보 도서를 3권정도 찾았다. 소설 2권에 비소설 1권이었다. 온라인 서점에 검색을 해보니, 그 중 비소설은 절판이 되었다. 이제 소설 2권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이 책 중 하나는 50년 전에 나온 책이고, 하나는 20년 전에 처음 나온 책이다. 굳이 이렇게 오래된 소설을 읽고 싶어 할까, 하는 고민이 된다. 재미가 있고, 묵직한 주제도 있으며, 부담 없이 얇은 책이라는 조건에서 ‘출판된 지 15년 이내의 책’이라는 조건 하나를 추가한다.

 P씨는 다시 책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책을 찾기 시작한지 6시간 만에 적절한 책 한 권을 찾아냈다! 그는 급한 과제를 해결한 기분으로 새벽 3시에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한편, K씨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문을 나서는 순간 P씨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잊었다. K씨는 집으로 와서 애청하는 미니시리즈를 보았고, 미니시리즈에 이어서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까지 보았다. 12시 반이 되어서 잠을 자려고 누워서는, 스마트폰으로 쇼핑몰에 접속하여 피트니스 센터에서 입을 트레이닝복을 검색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다시 피트니스 센터에서 만났다. P씨는 K씨의 오랜 고민이 해결되는 걸 보고 싶었다. 그는 꺼져가는 독서의 마지막 숨을 되살리기 위한 인공호흡기를 손에 쥔 기분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어제 책을 좀 찾아봤는데요.”
 “오, 정말이요? 기대돼요.”
 “<아일랜드 소녀의 알레고리>라는 책이에요. 어떤 책이냐면…….”
 그때 헬스 트레이너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앞의 분이 일찍 끝나서 조금 일찍 시작해도 될 거 같은데. 괜찮으세요?”
 “네.” P와 K는 함께 대답했다.

 P씨는 조금 아까 하다가 중단된 책 추천 대화를 이어갈 기회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틈이 나지 않았다. K씨가 다시 말을 꺼내주길 바랐지만, K씨에게 그 이야기는 이미 흘러간 화제 거리인 것 같았다. 더 이상 책에 대한 얘긴 꺼내지 않았다. P씨는 책의 제목이라도 말했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 삼으며 서서히 체념했다. 운동을 다 마치고 탈의실로 향하는 동안 K씨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아, 아까.” P씨는 끊어진 대화가 다시 재개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얘기하려고 했는데요, 혹시 트레이닝복 공동구매할 생각 있어요? 괜찮은 게 싸게 나왔더라고요.”

 P씨는 집에 와서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깨달았다. K에게 <아일랜드 소녀의 알레고리>를 구입하게 하는 대신, 자신이 트레이닝복 세트를 하나 구매했다는 걸 말이다. P는 물리적인 거리가 정서적인 필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새삼 느끼며, 인간에겐 책보다 옷이 가깝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P.S.

 책 추천에 관한 에세이를 쓰다가, 간단한 픽션 하나를 삽입할 요량으로 이야기 하나를 지었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늘어났어요. 그냥 짧은 소설로 읽히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픽션을 먼저 올립니다. 초고 그대로 손보지 않아 뼈대만 앙상하고 좀 거칩니다.

 다들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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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트레이닝복 공구를 위해 상대방의 마음을 훔쳤네요. ㅎㅎ

결국 그렇게 된 거네요ㅋㅋ 트레이닝복 하나 득템했으니 다행이라 해야할까요

ㅎㅎㅎ 너무 재미있어요. 사람들이 책 추천해달라고 하면 진짜 고민되거든요. 딱 저 P씨 같아요. ㅋㅋ
공감이 많이 가서 그런가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
아.. 이거 읽으니 또 소설 쓰고 싶네요. 근질근질..

ㅎㅎ 잼나게 봐주셔서 감싸합니다. 생활 속 소소한 고민을 소설로 쓰는 것고 흥미로운 일이네요ㅋ
브리님 한동안 소설 뜸하셨으니, 이제 또 한 편 쓰실 때가 되었는데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누구나 관심있는 주제는 다른 법이죠.

네 상대방의 관심사를 딱 맞출 방도가 없죠.

공통관심사를 찾아내기란 힘든거 같아요!

직접 듣는 수 밖에요ㅎ

은근 많은 상상을 하게 되는 소설이네요. P라고 해서 놀랐지만, 인정받는 독서가가 아니니 나는 아니구나 생각했고, 그 사람에게 책을 추천해주려면 좀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한 것 아닐까 하면서 사적인 서점도 떠올리면서 읽었어요. :)

혹시 성이 박인가요?ㅎㅎ 인물 이름을 특정하지 않을 때 제일 만만한 게 박씨의 p, 김씨의 k죠. ㅋ
대화가 많이 필요하죠. 대화가 많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의 윤곽을 알 정도의 사이였다면 p씨도 그 정도로 신경을 쓰며 준비했을까 싶기도 해요^^

름과 전혀 상관없이 Platform의 약자로 P를 쓰게 되었어요. :)

플랫폼의 p 멋져요ㅎ

왠지 옷 공동구매를 위한 큰그림이었을까요 ㅎㅎ ;;

ㅋㅋ 역시 책보단 옷인가요~~^^

상황을 상상하니 재미있네요. P씨의 책을 찾는 6시간의 노력에 감동을 먹었는데ㅜ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ㅋㅋ 공동구매 옷으로 위로를 해야 하나요. ^^

ㅋㅋ 책을 찾아 삼만리였는데 말이죠.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일랜드 소녀의 알레고리. 이거 혹시 진짜 있는 책인가 싶어 구글에 검색해봤어요 ㅎㅎ 읽다보니 P가 저렇게 심혈을 다해 결정한 책이 결국 뭔지 궁금해져서요 ^^ 왠지 P에게 공감이 되어서 더 재밌게 읽었어요 ㅎㅎ

ㅋㅋ 실재하는 책으로 하려고 했다면, 저 역시 6시간은 검색해야 했을지 모르겠어요. 이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들어겠지요ㅎ 책까지 찾아보셨다니 공감이 된 듯하여 뿌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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