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감사 그리고 다시 출발선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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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지지고 볶던 아이들을 오늘 떠나보냈다. 아이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 다른 숫자를 달고 새 학기를 맞을 것이다.

 아이들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려본다. 아직 솜털이 보송한 아기 새처럼 날아들어서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큰 아이들만 상대하다가 이제 막 11살이 된 아이들은 물가에서 빛나는 차돌처럼 작고 반짝거렸다.

 간단한 인사와 새 학기의 바람을 서로 나누고, 자기 소개서를 적도록 했다. 자기 소개서에는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몇 가지 물음과 기본적인 사항을 적게 되어 있었다. 한 아이가 머뭇대다가 내게 다가와서는,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선생님, 가족란에 강아지도 적어도 돼요?”

 으응? 아이의 표정을 보았다. 진심이었다. 난 반쯤 웃다만 표정으로, 음, 사람만 적어줄래? 라고 말했다. 아이의 바람을 꺾어 미안한 마음에, 강아지는 다음에…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하마터면, 허락할 뻔 했다. 강아지까진 괜찮다고. 만약 그랬으면, 고양이, 새, 물고기를 키우는 아이들까지 나왔겠지.

 한 아이가 내내 오줌이 마려운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난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자기 소개서를 다 쓰고, 아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눈치를 살피던 아이의 차례였다. 앞에 나오더니, 내게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거 계속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랬던 거였다. 그 아이는 머릿속으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를 줄곧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간만을 기다리면서.

 아이는 칠순 잔치에나 어울리는 사회자의 행사 톤으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 여기를 보세요! 전, 미래의 유재석이 될 000입니다!”

 그 뒷말은 생각나지 않지만, 폭소가 터졌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이것이 고학년과 중학년의 차이구나. 고학년은 대체로 사진 찍어주는 것조차 수줍어하고 닭살 돋는 일은 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몇몇 끼돌이들을 제외하곤 말이다. 11살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려면 내가 좀 달라져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미래의 유재석은 지난 12월 학급 학예회 때 MC를 맡았다.

 떠나보내는 시점이 되니, 아이들이 처음 보았던 날보단 많이 차분해졌다. 이것이 성숙의 증거라면, 조금 서운하다. 나를 신선한 충격에 빠뜨렸던 첫 만남과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나를 당황시켰던 면들이, 고학년이 되어서도 어디엔가 남아있기를 바란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 전이긴 하지만, 아이들 중 몇몇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이제 5학년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첫 날, 내가 문으로 들어설 때 그 아이들이 다시 날 만나게 된 것에 안도하길 바란다. 내가 그렇게 할 것처럼 말이다.

 나를 행복한 선생으로 만들어준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아이들을 보내기 전 마지막 5분을 남겨놓고, 너희들은 선생님에게 특별했고, 오래 기억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꾸중을 받거나 지도를 받을 때 혹여 마음이 아팠던 일은 다 잊어달라고도 했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나를 향해 웃어주었고, 모든 걸 품어주고 모든 걸 용서했으며 모든 걸 이해해주었다.

다시, 출발선

 우리 직종은 일 년에 한 번씩 다시 출발선에 서게 된다. 어떤 선생님을 만날까, 어떤 친구들을 만날까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새 교실을 들어서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교사도 동일한 두려움과 기대를 갖는다.

 다시 긴 여정의 출발선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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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러브레터〉는 등산하다가 죽은 약혼자를 기리다, 우연히 그의 중학교 앨범에 있는 고향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뜻하지 않게 답장이 온 것이다. 답장을 보낸 사람은 약혼자와 이름이 같았던 중학교 동창 후지이 이츠키. 주인공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약혼자의 중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주인공은 자신의 약혼자였던 후지이 이츠키가 중학교 시절 동명의 여학생인 후지이 이츠키를 좋아했음을 알게 된다.

 그 중학교 시절의 이야기 중에서, 남자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가 달리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중학생 후지이 이츠키는 달리기를 잘한다. 학교 대표로 육상 대회에 나가곤 한다. 육상 대회 직전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지이 이츠키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육상 대회에 나타난다. 달리기 출발 신호가 울리기 직전에, 깁스를 한 후지이 이츠키가 트랙 옆 잔디밭에서 출발 자세를 취한다. 출발 신호가 나자, 후지이 이츠키가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트랙으로 난입하게 되고 다른 선수와 엉켜 넘어지게 된다.

 그 장면을 보면, 후지이 이츠키의 엉뚱함도 보이고, 달리기에 대한 간절함도 엿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달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달리고자 하는 의지가 깊은 인상을 준다.

 내가 출발선에 서 있을 때, 언제나 완벽한 준비가 된 상태로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달려야 한다. 나만의 트랙에서, 또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내 다리에 깁스를 해도, 아직 달릴 기분이 아니어도, 달리는 트랙이 마음에 안 들어도 난 언제나처럼 달려야 하는 것이다. 나만의 스텝으로, 간절함을 가지고 말이다.

 깁스를 하고 육상 대회를 망치는 후지이 이츠키는 내게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달리라고. 두렵고 외로워도 한 걸음을 떼라고. 일단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넘어져도 앞으로 나아간다고.

 난 올 한해도 나만의 스텝으로, 어떻게든 달릴 것이다. 한쪽 다리에 깁스를 했어도, 반대편 다리가 온전함에 감사하며 달릴 것이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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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감사

 스티밋을 시작한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스티밋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설렘과 기대를 떠올린다. 출발선에 서서 고요한 트랙을 바라보듯, 내가 달려갈 지점을 확인했던 것 같다.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 난 여전히 달리고 있다. 달릴 여건이 안 되어도, 달릴 기분이 아니어도, 여전히 앞으로 한 걸음을 뗀다.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넘어져도 앞으로 나아간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달려온 지난 길을 생각하면 좋은 일도, 감사할 일도 많다. 두 달 뿐인데! 그런 일들이 그렇게나 많이 쌓인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

 페이스북에서 간간이 내 글을 보아오다, “스티밋에 당신 같은 작가가 필요해!” 하며 이곳으로 초대해주신 @indend007님. 그 분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이곳에 발들이게 되었다. 정작 들어와서는 쓰는 글의 종류가 달라 교류를 잘 못하고 있지만, 초반에 보여주신 격려와 지지로 어색함 없이 입성할 수 있었음에 늘 감사하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조용히 박수쳐주시고 사라지는 모든 이의 키다리 아저씨 @bramd님, kr-pen 마을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지주들인 @kmlee, @kimthewriter님, 댓글로 진한 소통을 해온 옆집 이웃 @ryuie님, 초기부터 친근했던 이웃 @julianpark님, 일일이 다 적을 순 없지만 즐거운 달리기를 함께 해나가는 정겨운 이웃들.

 그리고, 달리기를 하다 목이 마를 무렵에 다가오셔서 등을 토닥이며 ‘진심으로’ 격려의 말을 건네주신 @sochul님까지!

 (한 분 한 분 이름을 다 거론하지 못함을 양해를 바랍니다.) 귀한 분들과 함께 달리기에, 아직도 난 이곳에서 달리고 있다. 다리가 성하지 않은 날에도,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김없이, 변함없이.

 이곳까지 달려오는 중에 만났던 좋은 이벤트들은 큰 힘이 되었다. @asbear님의 <슈퍼뉴비K>, 새로운 창작 욕구를 충족시켜준 kr-art의 3가지 창작 이벤트, @sochul님의 SI 40번째 작가 선정까지. 코스 중간에 설치된 음료대처럼 나의 갈증을 풀어주었고, 지친 다리를 매만져주었다.

 달리기 끝에 도착할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이 불어 머리칼을 빗기고, 땀을 식힌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쉰다. 불어오는 바람이, 지쳐도 앞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바뀌는 풍경들이, 내게 행복이다. 감사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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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이미지 만들어 주신 @ceoooofm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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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선생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느껴지는데 저만 그런가요? 글 재밌게 읽고 갑니다ㅋ 이 글을 보며 무엇보다 저도 이렇게 글솜씨가 좋았으면.. 했네요ㅋ 설연휴 잘보내세요, @kyslmate님^^

글에서 목소리도 느끼시다니 대단하세요^^ 다복님의 감각을 믿고 싶네요ㅋ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림 솜씨로 부족하신가요?ㅎㅎ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간만에 눈에 띄는 글입니다. 미약한 힘이지만 보팅하고 갑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팔로우할게요. ^^

이런 영광이..감사합니다.

아휴 영광이라니요. 같은 이웃 처지에요ㅎ

늘 새로운 출발선에서 싱그러운 기운들과 교감하기에, 역동적인 열정으로 차분히 마음을 다잡게 되나 봅니다. 영차영차 화이팅입니다! ^^

네 자주 출발선에 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되니까요^^ 벨류업님도 화이팅입니다. ㅎ

저도 새학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한 해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곧 정신없는 3월이 오겠네요~^^

새로운 출발도 담대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amukae88님에게 멋진 한해되길 소망합니다!ㅎ

체감상으론 한 1년 달려온 것 같은데 말입니다. 먼 여정을 위한 몸풀기에 지나지 않았군요. 내일은 러브레터를 다시 봐야겠습니다. 평온한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한참된 줄 알았는데 두달 밖에 안 지났었군요...

네 두달입니다. 벌써 지겨우신 건 아니지요?ㅋ

말도 안 되는 말씀 하지 마시죠. 날이 갈수록 즐겁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곳은, 드래곤볼에 나오는 시간의 방같습니다. 단지 두 달일 뿐인데 1년 지난 거 같네요ㅋ 예전엔 1년동안 쓸 글을 두달만에 써서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ㅎ

정신과 시간의 방. 그 말씀이 딱 맞습니다.

새로운 학생들과 맞이하는 새학기 좋은추억 많을 것 같네요.
제 큰아이가 올해 중1이 되는데 기분이 참 묘합니다
부디 좋은 담임도 만나고 사춘기 무난히지나길바래요 ㅋ
아이들 사춘기때 다루는법좋은 노하우도있으시면 ^^
설 명절즐겁게 보내세요 ~

네 학부모 입장에서도 자녀들이 새로 만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에 대해 묘한 기대와 두려움이 있을 것 같네요~^^ 큰 자제분이 아들인가요, 따님인가요. 성별에 따라 사춘기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공통적인 점은 엄마가 꼬치꼬치 묻는 걸 무척 싫어한다는 점입니다ㅋ 뭐 개인차가 있지만요. 호르몬의 작용이니 아이에게 넘 서운해하거나 실망하지 마시라는 조언을 하곤 합니다^^

아들만 둘이에요. 관심갖고싶어서 학교일 물으면항상 모른다고 답을 해요 ㅠ. 물어보지 말아야겠네요. 감사합니다

ㅎ 전형적인 증상이 나타나는군요~~ 한번 묻고 말아야지 파고들면 싫어하지요ㅋ 시간이 자연스레 해결해줍니다. ^^

전형적인증상이군요. 그냥 아무일 없어서 모른다는줄ㅋ

스팀잇에 좋으신 분들 많죠.
아무튼 앞으로 재미있고 꾸준하게 함께 하길 바래봅니다^^

네 감사합니다. 팁투요님, 꾸준하게 함께 팁을 주세요ㅋ

슈퍼뉴비!!!kyslmate님!!!!!

슈퍼 고추 참치님!!ㅎ 좋은 아침입니다^^

올한해도 매일 감사가 가득한 날들이길 원해요^^~

네 에스더님, 감사합니다. 에스더님도 감사와 기쁨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출발선이군요. 파워는 없지만 애독하고 있습니다. 쏠메님의 스텝으로 멋지게 달려주세요 :-)

함께 달려가는 정다운 이웃 스프링필드님! 덕분에 자주 힘을 얻습니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출발도 응원합니다!!

앗 그러고보니 제가 대문사진으로 쓴 저 모습이 스프링필드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꼭 들어맞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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