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감정] 11 인정 그리고 책임

in #kr-series5 years ago (edited)

어제는 내 인생 중요한 날이었다..


같잖은 책임감의 대면

최근 회사에서 선적을 보내주는 포워딩사를 변경했다. 이번 주말부터 함께 일을 시작해서 확인해야 할 상황이 많았고 신경이 예민했다. 목요일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가장 중요한 선적의 마지막 비행기 스케줄이 확약되어 있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코드였다. 'UU', Unable 불안 센서가 강력하게 울렸다. 나는 담당자에게 예약이 제대로 된 게 확실하냐고 물었고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고 확인 후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평소 우리와 일을 하지 않지만 실질적인 이 회사의 대표가 뜬금없이 우리를 불러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는 외국에서 살기에 보는 일이 많지 않다) 나는 곧 이야기를 들으며 웃을 수가 없어졌다. 그가 말을 하다가 "HJ씨는 꼬투리..."라고 말했고 나는 너무 놀라 "네? 제가요?"라고 되물으며 그와 했던 모든 대화를 빠르게 되돌아봤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네'만 했었다. 전혀 꼬투리가 잡힐 성격의 대답은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조금 당황했는지 말을 얼버무리며 '아니야. 아니야.'라고 말하고 하고 싶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는 그의 누나이자 우리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의 평가와 말에 의해 느낀 점을 말하고 싶었거나 혹은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주는 대리인의 역할을 하러 우리를 불렀다는 걸.

그 잔소리는 1시간가량 이어졌는데 요지는 단 하나였다. '주어진 일만 하지 말고 다른 일에도 관심을 갖어라.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알아서 처리하되 거기서 끝내지 말고 시키지 않아도 회사의 온갖 것의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모범 회사원이 되어라.' 거기다가 마지막으로 그는 'HJ씨는 남자친구한테도 떽떽거릴 것 같아.'라는 뜬금없는 잽을 날렸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분명 표정은 굳어졌을 것이고 입에서 불만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왼손 손톱으로 오른손바닥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자기 암시를 했다.

'그는 어차피 주말에 돌아간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뭐라고 말해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 그는 그냥 고용주로서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신경 쓰지 말자.'

그러나 내 기분은 놀랍도록 나빠져서 일을 이어나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골똘히 생각했지만 명쾌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침에 일어났다.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가야 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안했던 예감은 맞아 들어갔다. 곧 있으면 선적이 한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에 임박하는데 여전히 예약은 되어있지 않았다. 나는 혼자 몸이 달아 발을 동동 구르며 방으로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상관이자 이 업무의 총책임자로서 내게 조언을 해줘야 할 차장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의 기분 나쁨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억울함'이었다.

'과거에는 지금 일을 네가 열심히 해주는 걸 알고 있지만 우리는 네가 무언가를 더 해주길 원한다'는 조금의 인정이 있었다. 그런데 직원들의 고용 상황이 안정적으로 변하자 나의 평판도 변화했다. 성실하지도 않고 그저 운이 좋아 회사를 고용하게 된 인정할 수 없는 누군가가 이제는 내가 하는 일에 불만이 많았다. 딱 할 일만 끝내고 집에 가버리는 게 불만이었다. 내가 시키는 일만 한다고 불만이다. 그래 난 이 회사에 열의도 애정도 없다. 뭔가 적극적으로 일을 해주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까지 저평가되는 게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했다. 그럼 지금 내가 가진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의 정체는 무엇이지. 사고가 터질 때마다 수습하기 위해 함께 터져나가는 내 심장은 뭐지? 퇴근 후, 주말 동안 심심찮게 울리는 메시지와 메일을 확인하고 처리해주고 일과 삶이 분리가 되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노력은 대체 뭐지? 내가 못 미덥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일은 점점 던져주고 있었다.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하는 일이 못 미더우면 너네가 직접 해! 어차피 내가 하는 일 아무것도 아니라며'

금요일 내내 지옥에 있었다. 스트레스에 머리와 위장이 꿈틀거렸다. 영원히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러단 죽겠다. 죽을 것 같아 남자친구에게 쏟아내니 그가 말했다.

HJ야 네가 그 일에 너무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어.

왜 나는 사원 나부랭이에 이 회사에 일말의 애정도 없으면서. 설사 선적이 제 날짜에 도착하지 않더라도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인데 내 손해도 아닌데 이렇게 혼자 애를 쓰고 있을까? 내 것이 아님에도 과도한 책임감 속에 혼자 괴로워하고 있을까?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나의 문제다. 그러나 알면서도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오후 5시쯤 고통 속에 나를 해방시킨 건 포워딩사측의 나를 안심시킬만한 답변이었고 선적은 정상적으로 올 것 같단 생각이었다. 결국엔 나만 괜히 고통스러웠던 셈이다.

나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핵심 생각

조금 일단락된 상태에서 저녁에 남자친구를 만났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우연히 발견한 작은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면서 깊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과도한 책임감에 시달렸는지 추적했다. 기억하는 한 아주 어렸을 적부터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감투가 싫었다. 안그래도 나를 짓누르는 책임감이 더 해지는 게 버거웠다. 초등학교 3학년쯤 공사장을 지나다가 목재와 부딪혀서 눈 윗부분에서 피가 났는데 나는 울면서 그대로 학교에 갔다. 아프고 무서웠지만 죽는 게 아니면 모두 내겐 엄살에 불과했다. 나는 괜찮아야 했다. 부모님과 선생님과 친구들을 걱정시키면 안 된다.

나는 오빠보다 2년 늦게 태어났지만 누나의 책임감을 지니게 되었다.(타고난 성향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자주 아프고 허약했다. 나는 비교적 건강했고 누군가 강요하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잘해야 했다. 나는 덕분에 독립적인 아이로 자랐고 부모님과 주변의 칭찬을 들었다.

'우리 HJ는 혼자서도 잘해. 알아서 잘하니깐 걱정이 없어.'

그 달콤한 칭찬의 대가는 컸다. 나는 그 칭찬에 중독되어 갔다. 나는 늘 알아서 잘해야 했다. 내가 맡은 일은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야 했다. 내가 나에게 부여한 역할은 '알아서 잘하는 아이'니깐... 어쩌면 부모님과 심리적 거리가 있어서 고민거리를 털어놓지 못한 게 아니였다. 알아서 잘해야 하다는 강박감이 부모님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나의 각오가 가족을 멀어지게 했다.

이 과도한 책임감 위에 더 큰 압박은 부모님의 싸움을 지켜보며 고착화되었다. 나는 내가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 돼서 버려질까 두려웠다. 절대 주변에 민폐를 끼치면 안 되었다. 그건 내게 가장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고 있다. 죽기보다 싫은 일이다.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혼자서도 잘해야 하는데'라고 입 밖으로 꺼내고 말하는 순간 내 안의 어린아이가 서럽고 외롭게 울고 있었다.

나의 문제였다. 지금의 직무는 내가 버틸 수 없는 직무였다. 위기관리, 조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이 남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하고 기다리는 일이 이 일의 핵심이다. 나는 그렇게 부탁을 하면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했고 괴로워했다. 차라리 내가 일을 다 떠맡으면 마음이 편할 텐데 내가 애쓴다고 변하는 부분이 없다. 통제력이 없는 직무, 잘 맞지도 않는 직무를 묵묵히 버티고 있는데도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는 상사, 사소한 부분까지 감시하고 통제하는 상사, 이 일은 나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서럽고 분했다. 내가 그나마 1년 10개월쯤 버틴 건 내가 다시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3년 간의 공백기가 주는 두려움과 내가 인내심이 없고 나약한 정신상태를 가진 인간이 아닐까에 대한 의심, 그로 인한 죄책감이 나를 여기까지 버티게 했다.

회사가 나쁜 게 아니다. 이 일이 그저 내게 맞지 않을 뿐이다. 알면서도 떨치지 못하는 강박증이 스스로를 더 옭아매고 있었다. 오히려 이 과도한 책임감은 늘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고 무슨 일을 하든 내 발목을 잡고 경로를 비틀어버렸다. 이게 내 삶의 숙제였다. 이직의 괴로움도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괴로운 게 아니었다. '혼자서 알아서 잘해야 한다는 과도한 죄책감, 남에게 민폐가 되지 말아야 한다.'라는 무의식적 기제에서 자유로워지고 벗어나야 하는 것이 내 인생의 진짜 과제였다.

나를 놓아주기로 한다.

나는 생산적인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내가 하는 일에 사회적으로 부여하는 가치가 하나도 없어도 나를 원망하고 압박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살 수 있단 걸 그래도 나는 나라는 걸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나는 나를 그 끔찍한 속박에서 구해주고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이 전 끔찍이도 경멸했던 누군가와 의존하며 사는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내 가치를 타인의 인정으로부터 찾지 않기로 한다. 더 이상 인정받고자 애쓰지도 사회적인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기로 한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뭐라 말하든 나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키고 사랑해주기로 한다.

그리고 이 불안한 마음에 힘을 실어주고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고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내 남자친구였다. 그와 함께 하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어쩌면 악몽같던 오늘이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많이 후련해졌다. 오랜만에 꽤 낮아진 미세먼지 수치 한 바탕 울고 빨개진 눈으로 집요정님과 손을 맞잡고 오래 거리를 걸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너를 말도 안 되는 확률도 만나게 돼 다행이고 행복하고 소중했다. 나의 평생 동반자. 동반자가 너라서 참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라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너와 함께라면 더 행복할 수 있을거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모든 게 변화한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다르게 살게 될 거고 그래서 오래도록 이 날을 전환점으로 기억할 것이다.


[안녕, 감정] 시리즈
01 입장 정리
02 감정을 드러내는 거리
03 평화의 날
04 다름에서 피어나는 감정
05 아플 때 드는 감정
06 열등감 - part 1
07 나의 무기력
08 열등감 - part 2
09 거짓 감정
10 위로에 드는 감정


aaronhong_banner.jpg

Sort:  

행복한 ♥ 오늘 보내셔용~^^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행복한 일요일 되시길:D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였습니다.

오만 사람 다 cc 에 때려 넣고 메일 날려도 상사는 구경만 하나요? 렙이 어마어마하게 높은가봐요. 강적이네. 힘들겠어요. -.-

좀 회사가 특이해서(?) 저 혼자 거의 모든 메일을 확인하고 ㅋ 단톡방에 올려줘도 잘 안봅니다 ㅋㅋㅋ

제가 구두로 어떻게 하냐고 직접 물으니 그제서야 개입하더라고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 ㅋㅋㅋㅋ 그순간 제가 잘못되었구나가 더 명확해졌죠

고물님 속에 있었던 어린아이를 발견하셨네요 대단하십니다~
이제 자꾸 이뻐해주시고 잘 달래주세요 ^^ 집요정님과 같이요 :)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남친에게만큼은 어리광을 부리곤 했지만 그날 비로소 그 아이의 이름과 성격을 알게되고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에요. 이렇게 알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D

넘의 돈먹기 항상 개어려움

ㅠㅠ 그런가봐요. 직장생활을 오래 하시는 모든 분들 존경합니다... 흑흑

엄마 아빠로서의 책임감은 막중해야 하지만 회사에서 책임감은 돈주는 만큼만 ㅎㅎ

Posted using Partiko iOS

개인적인 이유로 그 돈 값의 가치에 비해 제 책임감이 너무 과해서균형이 맞춰지지 않아 한계상황에 와버렸어요 ㅠㅠㅠ
연봉을 두배로 준다고 해도 지금의 일은 싫습니다....란 결론에 도달했어요.

나를 놓아주기로 했다는것이,
어제, 퇴직신청서 쓰셨나요?

마음 속으로는 이미 냈구요.... ㅎㅎ 실제로 쓰진 않았는데 곧 쓰게 될 것 같아요.

동반자가 너라서 참 다행이다. 우리는 서로라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위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면요?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게 일어나는 힘겨운 일들은,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늘의 배려라는.ㅋ

맞아요. 시간이 지나서 그들과 그 일은 제 기억에서 잊혀지겠지만 저의 동반자와 마음은 오래도록 남겠지요-
어쩌면 삶의 의미는 순전히 제 주관에 의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일을 겪다가 어느정도 마음이 정리되면 다 내게 필요한 시련이나 과정의 하나였구나란 순응에 와요 :D
앞으로 아끼지말고 더 많이 사랑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남녀차이, 성격차이는 행동 패턴일 뿐인데 스트레스는 자신의 몫 같습니다. 깨달은 것들을 통해 습성을 뛰어 넘으시길 바래요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인데 내 손해도 아닌데 이렇게 혼자 애를 쓰고 있을까? 내 것이 아님에도 과도한 책임감 속에 혼자 괴로워하고 있을까?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 나의 문제다.

스트레스는 자신의 몫, 예전 유튜브를 보다가 스트레스를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도약하기 위한 준비과정이구나 이해하면 해로울 게 하나도 없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적용이 거의 불가능하더라고요.

습성을 뛰어넘어라- 어렵지만 역시 할 수 밖에 없겠죠. 감사합니다.

앞 부분 읽을 땐 쩌도 너무 답답한 마음이 들었는데
잘 마무리 되고 이 상황을 통해 고물님 자신도 깨닫고 정리된 게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미스티님 이 글을 작성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쓰는 와중에 다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눈물을 좀 흘렸어요 ㅋㅋㅋ 제가 이런 상황이라 글이 이런 답답한 류로 흘러가버려 유감이지만 그래도 쓰고 싶은 건 써야했기에

언제나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망하더라도(?) 조금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D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7
JST 0.032
BTC 63626.54
ETH 2727.44
USDT 1.00
SBD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