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여행기#20 열차에서 일주일 - 시베리아 횡단 철도 1: 마지막날

in #kr-writing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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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6] 시베리아 횡단 철도 종착역 승강장

서울에 서울역이 있는 것과 다르게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이 없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역 이름은 그 철도 노선의 종착지 이름이지요.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처음에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라 야로슬로블까지 갔기에 저는 모스크바에 있는 야로슬로블 역에서 내립니다. 그런데 야로슬로블에도 야로슬로블역이 있습니다. 제가 탄 열차는 야로슬로블역에서 마지막으로 5분간 정차하고 4시간 동안 종착역까지 쉬지 않고 갑니다.

야로슬로블 역에 도착하기 전에 화장실도 가고 내복도 껴입었습니다. 제 짐도 다 정리했지요. 이제 가만히 앉아서 모스크바까지 가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금까지 봐왔던 늘 같은 풍경을 보면 됩니다. 하지만 해의 위치에 따라 풍경들도 미묘하게 변화하니 지루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일주일을 살 부대낀 열차인데 휑하니 내리는 것보다는 시간을 두고 헤어지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미리 작별 인사를 한 위층 사람도 짐 정리를 하고 제 앞에 어색하게 앉아서 댄스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냥 쿨하게 떠날 거 같았어요. 열차에서 잠시 만난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 의미를 두고 마음 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먹을 것도 나누었는데 주저 없이 헤어지는 건 냉랭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모든 것에 의미를 두고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는 게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겁니다. 집에 있는데 까마귀가 울었다면 흉조라고 생각하고 마음 쓸 수도 있지만 사실 자연이 그런 데에는 별 이유가 없습니다. 일어난 일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는 게 무병장수하는 지름길일지도 모릅니다.

모스크바까지 86km 남았습니다. 차장은 사람들에게 차표를 돌려주기 시작했어요. 30분이 남으니 이제 제법 도시 외곽 느낌이 납니다. 조그마한 역을 지날 때마다 꼭 한두 명씩은 철로를 가로질러 승강장으로 기어올라가는 게 보였습니다. 지하철 차량기지 같은 것도 보이고 정차 중인 전철도 많이 보입니다. 분주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과 건물이 서서히 높아지는 게 보여요.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제가 탄 열차는 도착해야 할 시간에 정확히 멈췄습니다. 위층 사람은 저에게 다시 한번 작별 인사를 건네고 먼저 내렸습니다. 저도 외투를 입고 가방을 메고 열차에서 내렸지요. 물론 승강장을 디뎠을 때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모스크바의 공기는 블라디보스토크보다는 덜하지만 매캐했어요. 차장이 나와서 생전 처음 보는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입니다. 열차 앞에 더 나아갈 수 있는 철로는 없습니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혼자 짐을 들고 역에서 멀어지거나 마중 나온 사람들과 깊은 포옹을 합니다. 연고도 없는 땅에 절 마중할 사람은 없으니 일단 사람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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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사항

  • "시간을 두고 해어지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 "... 헤어지는 것도 ..." (@springfield님이 알려주셨습니다.)
  • "그래도 먹을 것도 나누었는데 주저 없이 해어지는 건 냉랭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 "... 헤어지는 건 ..."(@springfield님이 알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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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아 드디어 도착이네요. 일주일을 같은 열차에 있었는데, 작별인사를 끝으로 헤어지는 마음이 조금은 쓸쓸하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은 곳에서, 정확한 목적지가 없는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셨을 지 궁금합니다 :-) 그리고 '해어지는' 이 두번 나와서.. '헤어지는' 으로 고치시면 좋을 것 같아요!ㅎㅎ :-)

전 왜 자꾸 헤어지다를 "해어지다"라고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springfield님 오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주일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일주일 내내 열차와 부대끼다 헤어지니 마음이 뒤숭숭하긴 했습니다. 어쩌겠어요. 제가 열차와 헤어지기 싫다고 내리지 않고 때써봐야 바뀌는 것은 없으니까요. ㅎㅎ
다음에 간 곳은 앞으로 여행기에 나오겠지만 테트리스에 나오는 성이에요.(소근소근)

여행기 잘읽고 있어요..! 생생하게 쓰여져 있어서 몰입이 잘되네요 ㅎㅎ

저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춥고 눈많이오는 나라를 좋아해서
핀란드를 다녀왔다가 올해 겨울에는 폴란드를 가면서 버스를 이용해서 독일,프랑스,네덜란드까지 같이 구경하고 왔어요.
핀란드 여행을 결정하기 전에는 블라디보스톡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까지 시베리아열차 여행을 해볼까 했는데, 그땐겁이나서 선뜻 나서질 못했거든요. 기회가 되면 다시 시베리아 열차 여행을 고려해 봐야겠어요 ㅎㅎ

감사합니다. @duqrldlsj님!!
저도 더운 것보다 추운 걸 좋아합니다. 운동도 눈 위에서 하는 걸 좋아하지요. 핀란드 가보셨다니 부럽습니다 ㅠㅠ 저도 핀란드 가볼까 하고 찾아봤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로 가는 배편도 있더라구요. 꼭 기회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여행기 이후에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생생한 여행기를 읽고 있으면 제가 기차에 타서 이런저런 상황을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다음 편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agee00님 제 여행기를 기다려주셔서 그리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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