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지 않아서 당신을 더 존경했습니다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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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저작에는, "사람은 깨달은 듯 싶어도 결국 땅에 두 발 딛고 선 짐승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요즘 스타일로 의역해보자면, "쿨한 척해도, 사람은 땅에 발 디디고 선 짐승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전 내가 복싱을 배웠던 도장의 관장은, “불사조”라고 불리었다. 그는 원래 국가대표 복싱 상비군이었다. 하지만 석연찮은 판정으로 올림픽 대표팀에 탈락한 후, 한동안 방황하다 결국 조폭 생활을 시작한다. 주먹 하나로 현금만 몇억(90년대 초반이다)을 들고 다니는 전국구 조폭이 됐지만, 경쟁조직이 보낸 자객에게 아킬레스건을 잘리고, 힘들게 재활에 성공한 뒤 그 자객을 살해한다. 복수의 대가로 오랜 시간 교도소에 복역하다가 겨우 출소했지만 힘든 생활 끝에 분신자살을 기도. 1급 장애인 판정을 받고 온몸에 화상이 남은 채 극적으로 살아남아 복싱 지도자의 길을 걸어 세계 챔피언을 두 명이나 키워낸 그의 인생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난폭했지만 또 순수한 사람이기도 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자기감정에 거리낌 없이 충실했고 사람을 쉽게 좋아하고 마음을 금세 털어놓는 정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종종 술에 취해 나보고 자기 뺨에 뽀뽀를 시키기도 했는데, 보통 중년 남성들은 그런 식의 감정 표현은 아들에게도 잘 못한다.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인가, 동네에서 좀 논다는 중학생들이 우르르 불사조 관장의 도장을 등록했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한 달도 안 돼 복싱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들에게 매번 호통을 치는 관장에게 상당한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 녀석들에게 불사조 관장을 정면으로 상대할 용기 같은 것은 있을 턱이 없었고, 대신 그들은 상당히 교활한 방법으로 이 관장을 도발하는 쪽을 택했다. 그중 한 녀석이 어느 날 신문지를 들고 와, 자신이 오늘 학교에서 본 영화에서 주인공이 신문지를 주먹으로 때려서 찢는 장면이 나왔노라고 말하며, 이게 실제로 가능하냐고 물어본 것이다.

여기서 주먹으로 신문지를 찢는다는 건, 네 귀퉁이를 잡은 신문지를 찢는 게 아니라, 마치 투우사가 붉은 망토를 흔드는 것처럼 한 귀퉁이만 잡은 신문지를 찢는 것이다. 아무리 세게 쳐도 그냥 뒤로 넘어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불사조 관장은 못할 것 같냐고 발끈 화를 내며 신문지를 들고 있으라고 말한 뒤 이내 주먹질을 시작했다. 원래 과학적으로 안 되는 건지, 아니면 이제 중년에 접어든 나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불사조 관장은 결국 신문을 찢는 데 실패했다. 그러자 중학생들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관장의 표정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너희들 다 링에 올라와! 한꺼번에 덤벼라!"
젊은 시절이었다면 분명 이런 전개가 되었을 것이고, 그 녀석들은 피떡이 되도록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기성세대가 됐고, 스승이라는 입장에 선 그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화를 억지로 억누르며 그 중학생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30분 동안 설교를 하는 소위 '꼰대 짓'을 선택했다. 설교의 주제는 인생이 뭐니, 싸움이 뭐니, 다양했지만 결국 누가 보아도 그건 때릴 수 없으니 그 대신 갈구는 거였다. 순간 나는 "아 사람은 결코 쿨할 수 없는 동물이구나."라는 인생의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하지만 난 그날부로 그가 더 좋아졌다. 아마 나 같은 태생적 먹물, 그러니까 일찍부터 자기 한계를 알아채고 굽신거리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그 도발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겉으로 점잔을 빼며 말이다. 대신 망신당할까봐 두려운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잘 해야 했을 것이다. 쿨하지 않은 건 이런 대응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그런 거라면, 그냥 그 불사조 관장처럼 솔직한 게 더 낫지 않은가, 그저 그렇게 순응하고 살았던 탓에 평범한 인물 밖에 되지 못한 요즘 그 생각이 많이 든다.

그 후 몇 년간 나는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바빠서 더 복싱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나 도장을 찾아갔다가 그만 그가 몇 달 전 작고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는, 그와는 다르게 참으로 소박한 내 삶을 두고 무슨 말을 했을까? 늘 당신의 제자는 소심해서 걱정이라는 말을 하곤 했었는데.

당신이 무척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겁쟁이인지는 모르나, 학창 시절 날 괴롭히던 그 녀석들보다 열다섯 배쯤 되는 위압감을 가지고 서 있던 당신이 실은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노라고. 당신이 나를 사랑했음을 알고, 그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그리고 쿨하지 못했던, 있는 그대로 당신의 모습이 실은 무척이나 존경스러웠노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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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님을 두셨네요

ㅎㅎ 지금은 이제 없으시죠...

이 글을 다 읽으니 누군지 알겠네요
TV에서 자주 보던 그분이시군요 가끔 사이비무술의 비합리성이며 실전에서 말도 안됨을 증명하시던
순수한면이 있던 그런 사람
뭐 각자가 다 다르기에 아름다운 세상 아닐까 합니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간직하며 살아간다는것이 진정 행복한길이라고 생각해요

네 바로 그 분 맞습니다.... 이제는 안 나오시지만...

말씀하신게 맞습니다, 모두가 그분처럼 살아야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럴 수도 없고요.
그래도 순수하셨던 분이기에 참 좋아했습니다.

공감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크 .. 복싱하니까 더파이팅이 떠오르네요
주인공 일보도 어릴때 일진한테 당하고만 살았는데...
그리고 난뒤에 엄청난 복서로 성장하죠
다른 분들이 보기에 일보가 그런 느낌이 아니었나 싶네요 ㅎ^^
좋은글 팔로우와 보팅하고 갑니다

ㅎㅎㅎ 전 일보가 아니니까요.... 아마 저 관장님 밑에서 10대부터 쭉 배웠다면 그런 반전(?)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만...

팔로우 및 보팅 감사드립니다 ^^

쿨하지 못한게 사람인데 쿨한척하다보니 안그래도 힘든 인생에 힘듬하날 더 보태게 되네요.
그 관장님이 신문질 찢었으면 좋았을껄.. 뭔가 아쉬워하게 됩니다..

ㅎㅎㅎ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그때 관장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아닙니다. 저의 태클 쿨하게 넘어가주실거죠^^;?

헉;;;;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한꺼번에 덤비라고 말하는 불사조 관장과 30분 동안 설교하는 불사조 관장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려 봤습니다. 어쩌면 후자 쪽이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다행이었어요.

ㅎㅎ 멋있는건 전자 쪽이겠지만... 후자 쪽이 훨씬 인간미있었고... 더 깊이 기억에 남네요.... 살면서 스스로 쿨하지 못한 그 많은 순간에도 그때를 떠올리며 많은 위로를 받을 것 같습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님이 평범한 인물은 아니죠~~ 대성하는 과정에 있는 분이죠 ㅋ 가즈앗!!!

ㅎㅎ 늘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이라 날씨가 춥습니다... ㅋㅋ 일찍 주무시길, 겨울에 생활리듬이 깨지면 외통수로 감기입니다

그럼요~ 생활리듬을 잘 지켜야죠~ ㅋ 가즈앗!!

뭐든지 정면돌파를 하면서 살아오신 분이네요 :)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 인용하신거 딱입니다

사람이 깨달은 듯 싶어도 결국은 땅에 두 발 딛고 사는 짐승이고,

아무리 교훈을 많이 얻고 오래 살고 흔들리지 않는 듯 해도 결국 삶에 안달복달하면서 사는게 인간입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그렇죠 뭐든 정면돌파... 인생 철학 중 하나가 "정면승부를 하지 말자." 인 저와는 아마 대척점에 계신 분이었다고 봐야겠네요. 그래서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람 나부랭이는 아무리 교훈을 얻고 오래 경험을 쌓아도 초탈할 수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걸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고요 ㅎㅎ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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