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작가 응모-수필#1] 지난 사랑 이야기를 쓰는 건 실례인가요?

in #zzan5 years ago (edited)

무심코 평소 즐겨보던 예능을 보다가 먹고 있던 자몽이 목에 걸려 컥컥되었다.

KBSN의 ‘연애의 참견’, 시청자가 연애와 관련한 고민을 보내면 패널들이 상담을 해주는 포맷이다. 여자는 4년 동안 만났던 남자와 헤어진 후 갑자기 촉이 발동해 그 남자가 활동하던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게 되었다. 그곳엔 그 남자가 올린 그들의 연애이야기가 있었다. 그 여자와 있었던 일, 그때 자신이 했던 생각, 그동안 연애일기를 그 여자 몰래 써왔던 남자. 여자는 그 글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깊은 상처를 받았다. 특히, 그 여자의 생일을 맞아 그가 준비해준 깜짝 여행선물이 실은 이별여행의 의미였다는 사실은 참 나쁘다. 오래도록 권태기를 느끼면서 혼자 이별을 준비해왔던 남자의 심정을 확인하는 감정은 아프다.

모두 그 남자를 비난했다. ‘쓰레기’라고도 욕했고 ‘관종’이라고도 지탄했다. 댓글을 하나하나 멍하니 읽다가 급히 나의 글을 찾아 읽어 내렸다.

혼란스러웠다. 그 남자가 나쁜 건 그 여자를 아프게 한 건 그 여자에게 말할 수 없는 사실을 몰래 적어 둔 ‘기만’때문일까? 아니면 그 여자와의 이야기를 허락 없이 마음대로 인터넷에 공개해버렸다는 사실 자체 때문일까? 그 글에는 사진이나 이름, 어떠한 신상정보도 없었다. 그 여자가 아니면 누구도 그 여자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는 증거 같은 건 없다. 물론 그 여자만은 보는 순간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알아챌 수 있다.

그 남자가 잘못한 건 글의 내용이나 수준의 문제인 걸까? 그 글은 성의가 없었고 다정한 방식이 아니었으며 단어는 저급했다. 내용은 사랑이 식고 있다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만일 그게 그 남자가 말하지 못한 숨겨둔 사랑의 진심이라면 그 여자는 그 글을 보고 감동하지 않았을까? 아니, 조금 더 길고 고급스럽고 그럴듯하게 쓰여진 마치 소설 같은 문학작품 같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

지난 사랑 이야기를 쓰는 건 그 사람에게 실례가 되는 거구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는 걸 좋아한다. 진심으로 편안하게 쓸 수 있는 건 내 이야기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나의 것이고 나의 사생활이라 나를 제외한 누구도 아프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나의 이야기를 쓰다 보면 지난 사랑 이야기도 튀어나와 버린다. 나는 많은 시간동안 사랑을 했고 사랑에 대해 생각해왔으며 사랑을 통해 변해왔다. 내게 사랑은 인생의 한 측면을 차지하는 중요한 가치다.

어쩌면 내가 더 나쁘다. 가까운 주변인도 알 수 없는 저 깊은 곳에 숨어있어야 할 내면의 이야기와 감정을 적나라하게 적고 있으니, 상대방이 내게 주었던 마음과 감정을 내가 느낀 그대로 표현하고자 애를 썼으니, 신상 정보에 비할 수 없는 훨씬 더한 걸 내 마음대로 공개해버렸다.

그 사람을 상처주거나 모욕하거나 잘못을 탓하는 목적으로 글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글을 통해 관계를 바꾸려 하거나 그 사람과 재회를 꿈꾸는 의도를 가진 적 또한 없었다.

그냥 내가 느낀 사랑의 체온, 따뜻한 마음, 아쉬운 순간, 안타까운 오해, 그래서 아파야만 했고 서로 상처내야 했던 사정, 마음을 닿아 시간을 가뒀던 특별했던 순간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싶었다. 사랑의 파편을 아프지 않게 잘 가지를 치고 햇볕에 바짝 말려 보기 좋게 접어 보관함 속 차곡차곡 쌓아 두려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조차 상대방에겐 실례가 될 지도 모른다. 영원히 그 글을 읽지 않더라도 세상 어딘가 실체 없이 자신이 연관된 기억이 부유한단 사실이 악몽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악한 의도가 아니니 괜찮을 거란 합리화를 하다가 순간 억울 해져 버렸다. ‘결국 난 나의 이야기를 한 거야. 내 시선에서 내 맘대로 재구성한 재해석한 나만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의 일상을 담다 보면 가족 이야기도 하게 되고 그날 만나거나 생각 난 친구 이야기도 하고 직장 이야기도 하게 된다. 그런데 지난 사랑이야가 실례라면 모든 주변인을 소재로 삼는 모든 이야기가 실례가 될 것만 같다. 그럼 이 세상 모든 일기와 일상에세이는 사라져야 할 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의 모든 시, 소설, 연애 가사가 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비틀고 가공하고 비유를 거쳐 재탄생한 예술 작품이기에 그들의 지난 사랑이야기나 흔적은 용인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초상권이 있는 것처럼 ‘지난 사랑 사용권’이 생겨나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별이 오거나 이별한 연인에게 조금 머쓱하지만 허락을 받는 거다. ‘당신과의 지난 사랑을 내가 써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지난 사랑을 했던 상대방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지난 사랑 이야기는 이제 그만 쓸까 고민하다가 아직 난 유명하지 않으니 조금 더 써보도록 한다. 어느 날 지난사랑이야기가 예의없이 느껴지고 더이상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날이 오면 그때 그만두기로 한다.

응모분야: 수필
응모자: @fgomul
응모글: #1 지난 사랑 이야기를 쓰는 건 실례인가요?
#2 지난 사랑 이야기를 건네는 건 실례인가요?

Sort:  

어서오세요 고물님
위로 쭉쭉 올려들리게요~^^

파치님 ㅋㅋㅋ 위에 있어도 아래 있어도 괜찮지만 이리 반겨주시니 감사합니당! ㅋㅋ

내가 과거에 느낀 감정 .사랑.마음.기억은 다 내겁니다...누가뭐래도!!!

고물상님~~~~~~~ㅋㅋ

역시 그건 저의 것이 맞겠죠! ㅋㅋㅋ
댓글을 읽어보니 이리 생각하는 사람 저리 생각하는 사람 사람마다 역시 다르구나란 생각이 들어요 :D

안나 카레니나나 보바리 부인을 혼내겠다고 찾아다닐 사람들입니다. ㅋㅋㅋㅋㅋ
내 스토리는 오직 내 삶을 던져 겨우 일궈낸 단 한그루 나무인데 그 열매를 누가 감춰라 마라 하겠습니까. 적고 싶어도 표현력이 부족해서 엄두도 못내는사람이 대부분인데요
기록하면 인류의 유산이죠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aah님 너무 웃겨ㅇㅅ -
그쵸 저의 마음에 걸리지 않으면 괜찮다고 일단은 생각합니다. 인류의 유산이라니ㅎㅎㅎ 그리 될 진 모르지만 일단은 제 맘대로 ^_^

저도 제 얘기를 많이 쓰는 사람으로서,,,
신상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쓰는 건 쓰는 사람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요. ^^

역시 나하님은 자유파 ㅋㅋㅋㅋ 답을 얻고자 함은 아니었으나 많은 분들이 생각을 알려줘서 넘나 좋네요 ㅎㅎ

한국에서는 뭐라뭐라 하는데 신경쓸 필요 없는 하나의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잘 신경 안쓰는 편이라 신경이 안쓰였는데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라 앗차싶었어요!
의견 나눠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_+!!!!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는 이야기면 역시 괜찮을거란 생각이 드네요

어느 날 지난사랑이야기가 예의없이 느껴지고 더이상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 날이 오면 그때 그만두기로 한다.

그렇게 하심될것 같네요
저도 누군가를 해하려는 의도가 없다면 자신만에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고 마음에 와 닫습니다.

사랑이야기는 여러사람과 공감할수 있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야기 기대 하겠습니다.^^

저도 실화 기반의 이야기를 좋아라합니다 :D ㅋ
더 풀어낼 사랑 이야기가 남아있을진 모르겠지만 카카님이 기대해주시니 참 좋네요 히힛

당연히 내 입장에서 내 주관적으로 기록이 가능~한데 좋지 않은 일을 공개적으로 적는건 아니지 싶어요. 저는 비공개로 마음 껏 적을랍니다.^^

역시 비공개가 안전하군요-ㅎㅎ
제 주관적으로는 다 참 좋은 기억인데 누군가 곤란할 수도 있겠어요. 아직은 연락두절이라 들킨 적은 없는데ㅋㅋ 진짜 안되겠는 건 비공개로 저의 일기장에 ㅎ!

지난 사랑이야기가 아주 아련한 옛날 이야기가 되었을때, 그때 이야기를 푸는게 좋은것 아닐까요?ㅎ
갑자기 전여친 차 트렁크에 실려있을 제 인라인 스케이트가 생각나네요 ㅎ 여친말고 인라인 스케이트요

Posted using Partiko iOS

발목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뒤숭숭한 세상에 ㅋㅋ

한때는 심장을 두고온줄 알았는데 다행히 인라인스케이트만 두고 왔더라구요 ㅋ

Posted using Partiko iOS

어머 순간 장르가 스릴러가 될뻔했네요 ㅋㅋㅋㅋ

서로에게 괜찮아질 시간이 되면 괜찮다. ㅎ 일리있습니당.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라인 스케이트.. 지금 그 인라인 스케이트는 어디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 아 밑에 raah님 글 보고 너무 웃겨서 빵터졌네요.

심장은 가져오셔서 다행입니당 :D !!

고물님의 시리즈 기대합니다!!
지난 사랑도 사랑이다!!

ㅋㅋㅋㅋㅋ 제가 그래서 주주클럽의 '나는 나'라는 노래를 참 좋아라합니당!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 ‘당신과의 지난 사랑을 내가 써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묻고 지난 사랑 사용권을 획득해서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 우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이야기지만 모든 걸 털어놓기엔 SNS가 다소 위험한 곳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맞아요- 그쪽으로도 생각해봤는데 전 안 유명해서 그런지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ㅋ 나중에 흑역사로 남으려나요? 그것 또한 괜찮습니당 ㅋㅋㅋㅋㅋㅋㅋ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물어보려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

Coin Marketplace

STEEM 0.20
TRX 0.13
JST 0.029
BTC 66703.61
ETH 3518.80
USDT 1.00
SBD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