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블레이드 러너(1982)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years ago (edited)

‘블레이드 러너’를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 이상 지난 지금 보면 살짝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감독 리들리 스콧이 창출한 영화의 톤 앤 매너는 여전히 멋지고 세련되지만, 낡은 느낌이란 SF로서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말하는 것이다. 복제 인간이나 인공 지능 로봇 같은 개념은 이제는 영화적 소재로서 너무 흔해져서 크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가 20세기가 18년 남은 시점의 상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탄생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의 상상이다. 아무튼 영화의 상상에 따르면 2019년의 LA는 종일 어둡고 비가 내리며 일본어 광고와 간판이 지배하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지만 그런 디테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여전히 인류가 풀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숙제인 인간 복제 시대의 철학적 화두를 던졌다는 점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과 가장 흡사한 피조물을 창조한다’는 상상적 개념은 20세기에 이미 절반쯤 현실이 되었다. 컴퓨터의 탄생이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컴퓨터의 가공할 연산 능력이 언젠가 인간의 지능을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대체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여기에 인간 유전체(게놈) 프로젝트가 20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21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라고 말하는 21세기는 20세기에 발명된 컴퓨터와 유전 공학이 만난 지점에서 발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기술적 배경 설명을 딱 하나의 문장,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전제이기도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이것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 창조주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창조주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다. 즉 유한성이다. 그리하여 이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에게도 똑같은 형벌을 내렸다. 아니, 훨씬 가혹한 형벌이다. ‘레플리컨트(복제 인간)’들에게는 딱 4년간의 수명이 주어졌다. 지나치게 짧은 수명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 적어도 창조주의 체면이 설 것이다.

유한성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난다. 인간보다 우수한 신체 능력과 지능, 감정을 지닌 레플리컨트들이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 창조주가 있는 심장을 향해 다가온다. 그걸 막아서야 하는 게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의 임무다. 피조물은 원래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4년만 살다가 온순히 자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언감생심 창조주에게 대들었으니 이들은 고장난 제품이고 따라서 폐기처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를 ‘창조주가 된 인간의 딜레마’라는 프레임으로 읽는 건 매력적이다. 기술이 압도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는 알고리즘의 맹공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지금 나의 생각은 나의 주체적 생각인가, 아니면 인공 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조장된 생각인가, 이런 딜레마 말이다. 반란 레플리컨트의 수장 로이 베티(룻거 하우어)와 같은 선배 터미네이터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되는 세상은, 실제로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중이니까 유의미한 해석 틀이다. 당장 여러분은 검색어를 입력하는 것조차 귀찮아 유튜브 알고리즘에 눈과 귀를 내맡기고 있지 않은가. 애플과 구글, iOS와 안드로이드가 없다면, 세상에 어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로이 베티의 반란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맺기라는 측면에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아주 중요한 역치를 시도한다. 즉 창조주가 된 인간의 숙명적 숙제를 대신 껴안게 된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한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데커드가 로이 베티와 한판 대결을 벌일 때, 그는 옥상에 대롱대롱 매달려 추락사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놓인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는 데커드에게 로이 베티는 조롱하듯 말한다.

“공포 속에 있으니까 기분이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느낌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의 영역에 도전해 왔다.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노예가 되는 길을 거부해 왔다. 그 욕망의 총아가 과학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과학을 통해 신의 노예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온전히 구원하고 있는가? 과학의 자손들은 신의 자손인 인간에게 다시 묻기 시작했다. 도대체 인간은 뭐냐? 뭐를 인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냐?

피조물 로이 베티는 창조주인 데커드를 구원한 뒤 읊조린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다. 오리온 별자리 근처에서 불타던 전함들을. 탄호이저 근처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C빔들을 보았지. 그 모든 시간들은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나는 이 영화의 전체 러닝 타임이 바로 이 대사를 위한 빌드업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시간은 바로 그 유한성 안에 기억을 새기기 때문에 위대하다. 사라짐을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숙명에 치열하게 저항하다 결국 순응하며 데커드 앞에서 시를 남기는 로이 베티는 마침내 개별적 유한성을 유전과 기록으로 극복하는 인간의 역사가 지닌 의미를 터득했음을 실토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피조물인 그는 가장 인간답게 최후를 맞이한다.

인간의 피조물도 인간의 유전이자 기록이다. 나는 사라진다. 그러나 인간이고자 하는 나의 욕망과 기억은 기록된다. 기록이 인간이다. 기록으로서의 인간은 영원히 우주에 남고, 그리하여 종국에 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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