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애주가의 기록, 헝가리 팔링카
부다페스트에 있은 지 어느덧 12일째. 헝가리의 전통술 팔링카를 마시려고 했지만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오늘은 꼭 마셔보겠다 마음을 먹고 요리조리 시내를 누비다 팔링카를 저렴하게 파는 작은 바를 찾았다. 금발 머리를 높이 묶고 뿔테 안경에 링 귀걸이를 한 여주인은 나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첫 잔으로 사과 팔링카를 시켰다.
“395포린트.(1,580원)”
“다 먹고 한꺼번에 카드로 계산하면 안 될까요?”
“노, 온리 캐시”
현금이 별로 없어서 카드로 계산하고 싶었건만 야박하게 그지없다. 팔링카는 가히 노골적이다. 한 입도 아닌 입술만 적셔서 맛을 보는데 ‘제가 40도의 알코올입니다만…’하며 자기주장을 해댄다. 당연히 싱그러운 사과 냄새가 강하게 날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다. 독한 알코올 향에 아련하게 풋사과 냄새가 스칠 뿐이다. 팔링카는 코소보와 보스니아 등 발칸에서 먹었던 라키아와 흡사하다. 배, 자두 살구 등 과일을 증류시켜 만든 브랜디라는 것도 도수가 높은 것도. 이름만 다르고 생김새와 맛과 만드는 방법이 비슷하다는 데서 우리나라의 만두, 일본의 교자, 중국의 자오쯔를 떠올리게 한다. 헝가리를 비롯한 발칸 국가들에서 서로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한다고.
무색의 사과 팔링카
헝가리에는 아침 식사로 팔링카 한 잔과 신선한 양파를 함께 먹으면 100년을 살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헝가리도 우리나라나 영국인 못지않게 술부심이 강한 나라인데 아침부터 독주를 마시면 장수한다는 전설까지 만들어낸 걸 보면 술주정뱅이 국가 레알 인정이다. 한 입 마시니 알코올이 강하게 입안을 찌른다. 찌르르르 독한 알코올 뒤 단맛이 스르르 입 안에 퍼진다. 하지만 단맛의 여운을 즐기기에는 찌르는 알코올이 강하다. 독한 알코올의 기운은 코로 올라가고 목으로 내려가는데 단 맛은 혀에 남는다. ‘어우, 독해 독해.’ 하면서도 다른 맛이 궁금해진다. 위스키와 마찬가지로 공기 중에 두니 알코올향이 날아가 좀 더 먹기 쉬워진다. 찌르는 맛이 좀 날아간 팔링카는 길이 든 야생 망아지 같다. 여전히 거칠지만 부드러워서 다루기가 힘들지는 않다. 하지만 헝가리 사람들은 샷을 한입에 털어 넣는다고 하니, 술부심 부릴 만하다. 진짜.
다양한 맛의 팔링카
“저기에 있는 것도 팔링카야?”
“아니 저건 퓨툴러스야.”
블루베리 팔링카
가게 밖에 메뉴에는 분명 팔링카의 범주 안에 적혀있던 술이었다. 생산하는 브랜드가 다를 뿐 팔링카가 맞는 것 같다. 나는 그중 색이 가장 짙은 블루베리를 둘째 잔으로 시켰다. 20ml에 220포린트 880원이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가격이다. 달다. 진득진득한 점성은 감기 시럽을 연상시키는데, 그러고 보면 색도 맛도 닮았다. 병에 있을 때는 검은색으로 보였던 술은 잔에 따르니 속이 비치는 자주색이다. 달지만 그래도 30도의 독주인지라 알코올을 감추지는 못한다. 사과 팔링카와는 반대로 이 술은 끈적한 단맛이 압도적으로 입 안에 맴돌다 알코올이 마지막에 ‘저를 잊지는 않으셨죠?’ 하며 불현듯 나타난다. 달아서 먹기 쉬운데다 돗수도 높아 은근 취하니 정말이지 880원의 행복이다.
주머니를 털어보니 딱 220포린트가 남아있다. 퓨툴러스를 한 잔 더 마시라는 계시인 거다.
“나 퓨툴러스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 맛 좀 추천해줘.”
무뚝뚝한 여주인은 심드렁하게 한 병을 꺼내와 정량을 따라주고 다시 병을 선반으로 가져간다.
“무슨 맛이야?”
헝가리어로 답변을 해줬기에 알아듣지 못했다. 한입을 마시니 견과류의 고소함과 단맛이 입안에 퍼진다. 아마도 아몬드인 것 같다. 끈적끈적한 점성은 블루베리와 같은데 당도가 지나치다. 혀가 마비될 정도의 단 맛이다. 빨리 헤치우기 위해 두세 입에 털었다.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서너명 밖에 없던 바는 어느새 여행객과 동네 단골들도 바글바글하다. 바쁜 주인에게 두 손을 흔들며 격하게 인사를 하며 나오는데 그녀는 무뚝뚝하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바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싸게 먹으면서 극진한 서비스까지 바라는 건 사치이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그녀는 참으로 적절했다. 3,340원. 우리나라에서 맥주 한잔도 못 먹을 가격에 팔링카 세 샷이나 먹을 수 있다니. 이러니 내가 헝가리를 부다페스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해가 밝을 때 들어간 바에서 세 샷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거뭇거뭇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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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샷이라도 취기 올라오겠어요..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도수가 높아서 기분 좋은 알딸딸함을 느끼며 바를 나섰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