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모: 여행지에서 생긴일] 아날로그적 여행

in #tripsteem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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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진을 폰으로 다시 찍었더니 화질 참 구립니다. 양해를...^^

베란다 책장을 뒤적거렸다. 10년 전 이사 올 때 버리지 않았던 책들이 꽂혀있다. 그 전 이사할 때에도, 또 그전에도 버리지 않았던 책들이다. 기억의 원점으로부터 차츰 멀어진 과거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때가 되면 마른걸레로 깨끗이 닦아내고 천 개의 퍼즐 조각을 맞춰보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던 사진첩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첩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안방에 꽂혀 있었다. 매일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친 옷걸이 옆에서 카우보이 인형 우디처럼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낡은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세게 잡으면 부서질 것이다. 그렇게 측은해 보이는 사진첩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대입 학력고사를 치른 후(네,,, 학력고사 세대입니다...) 친구들과 함께했던 겨울 여행이 긴 시간을 건너뛰어 와락 달려들었다.

1학년 6반 친구들은 방과 후면 해질 때까지 축구장을 뛰어다녔다. 2학년 때 문과와 이과로 갈라지면서 흩어진 축구 친구들은 3학년이 되어 술친구로(?) 다시 뭉쳤다. 학력고사가 끝난 후 우리는 한 친구 집에 모여 여행 계획을 의논했다. 전국 지도를 펴 놓고 가고 싶은 곳을 표시했다. 목포, 제주도를 거쳐 부산, 안동, 강릉을 돌아보고 여행 중간에 조용한 시골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서울역에서 목포행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6시간을 달려 목포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명한 유달산에 올라 감흥 없는 경치를 보다가 내려왔다. 검색해 보니 멋진 뷰 포인트가 있는 게 분명한데 어떤 비석을 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그다지 감동하지 않았다. 목포항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 안에 가득 들어왔던 카페리의 거대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큰 배가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다른 친구들도 압도되어서 감탄사를 연사해댔다. 나만 서울 촌놈이 아니었다. 6시간 동안 우리를 제주로 안내해 줄 배였다. 바다는 평탄했고 날씨도 비교적 따뜻했던 것 같다. 그러나 6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바다는 곧 지루한 망망대해가 되었다. 선실은 50명이 들어가도 될 만한 큰 방이었다. 슬슬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지면서 방에 널브러졌고 그때부터 시간은 더욱 더디게 갔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소요 시간은 목포, 제주 구간의 두 배가 걸린다고 했다. 제주항에 도착해서 민박 잡고 저녁 지어 먹고 술 사다 먹고 다음 날 일어나 버스 타고 한라산 중턱을 넘어갔다 제주시로 돌아오니 부산 가는 배를 탈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성산 일출봉과 정방 폭포에 들렀다.) 지도를 보면서 계획한 아날로그적 여행의 시간표는 한치의 오차 없이 우리를 부산으로 내몰았다.

부산 가는 카페리도 같은 규모의 배였다. 다만 다른 점은 그 거대한 쇳덩어리가 바다에서는 나뭇잎보다도 가녀린 존재라는 걸 어제는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밤배를 타고 아침에 부산에 도착하기로 했다. 파도가 세찬 밤이었다. 배가 파도를 타고 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변기통을 붙잡고 놓지 못했다. 탈진한 상태로 뒤척거리는데 선장이 들어와서는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파도가 6, 7 미터 정도로 높은 편이지만, 별문제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다. 나는 다시 변기통으로 달려갔다. 찬 바람을 쐬고 싶어 갑판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가 배 옆면에 부딪혀 튀어 오른 파도를 옴팡 뒤집어썼다. 나가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문을 닫았다. 선잠이 들었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끝에 13시간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무지하게 젊었던 게 확실하다. 부산에서 맞은 아침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이내 체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태종대에 가서는 그곳을 걸어서 한 바퀴 돌았다. 겨울에다가 아침나절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태종대 오르막길에서...

우리는 어느 바닷가에 서서 파도에 깎인 괴석들을 바라보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배에서 내린 지 몇 시간이나 지났지만, 공중화장실에 앉은 자세 그대로 좌우로 서서히 흔들리는 기분 나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 자갈치 시장에서 사 온 횟감을 해운대 여관방에 풀어놓고 진탕 마셨다.

술김에 해변에 나가 고래고래 노래도 불렀다.

눈살 찌푸릴 일이었지만, 한산한 해변에서 술 취한 고딩 여섯 명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난 그날 땅 밑으로 꺼져 들어가듯 잠들었다. 가장 깊은 잠을 잤던 날 중 하나였다. 다음날 동래온천에 몸을 담가 술때를 벗겨냈다. 동래온천은 작은 목욕탕이 주욱 늘어선 거리였다.

안동으로 가기 전 조용한 곳에 들러 하룻밤 쉬기로 했다. 지도를 펴놓고 아무 데나 정한 곳이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된 백암이라는 소읍이었다. 지도상으로는 분명히 작은 마을이었지만, 백암에 내린 우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숙박을 겸한 대규모 온천장 여러 개가 번쩍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암에서...

백암도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눈이 소복하게 내리던 그 날 밤 주머니 사정상 최대한 허름한 민박집을 찾아 들어가 가벼운 소주 한잔으로 우리만의 조용한 밤을 자축했다. 함박눈이 온갖 소리를 삼키며 땅을 점령해가던 밤이었다.

오히려 안동 하회마을이 백암보다 훨씬 조용한 곳이었다. 아날로그적 여행 계획에 따라 그곳에서 숙박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하회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강을 나룻배 타고 건넜다. 강 건너 제법 가파른 산을 오르면 하회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고3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했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 끝없는 물음표라는 걸 어렴풋하게 직감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우리 모두 치기 어린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러나 강릉 경포대에서 우리는 서슴없는 노상 방뇨로 질풍노도의 시기임을 입증했다. 죽일 놈들...

임진각까지 1일 자전거 여행을 함께하기도 했던, 1학년부터 졸업식까지 3년을 친하게 지낸 친구도 이번 여행에 함께했었다. 연락처라고는 집 전화번호밖에 없던 시절 나는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당시 내 번호를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그 친구는 내 전화번호를 물어봤단다.
"때가 되면 만나겠지."
내가 그랬다는데 난 전혀 기억나지 않는 멘트였지만, 그 친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아주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난 그 친구는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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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사진보면 그때 기억이 나는게 신기하죠 ㅎ
단체 방뇨사진이 제일 인상깊네요 ㅎㅎ

ㅋㅋ 그 사진 삼각대 가져다 놓고 준비하고 찍은겁니다.. 아놔...

그러니 더 추억인거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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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일텐데 아주 어제 일처럼 생생하네요. 고등학교 친구들은 참 오래도록 만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고3때 술친구라니 ㅋㅋㅋ
그나저나 저도 어릴때 제주-부산 배를 타본 적이 있는데... 으음... 엄청 흔들려서 토할 것 같던 기억이 있어요. 배에 오락실도 있었는데 게임기가 이리저리 같이 휩쓸려다닌듯한 기억이.

고3때 신촌, 이대앞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니면서 삼겹살과 주점을 섭렵...쩝..
머릿속에 캡쳐된 부분만 썼는데 사진을 보니 "어 이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그래서 막 고친 부분도 있어요..ㅋㅋ
그때 배멀미하고부터는 배타기 싫어요.. tv에서 멀미에 토하는 연예인들 보면 완전 공감합니다.ㅎㅎ

옛 사진들보니, 저도 고 2 여름 방학 때 친구들 대여섯이서 안동 어느 산골짜기 계곡으로 여행가서 술, 담배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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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안했지만 다른 친구 담배 피우는 사진도 있어요..ㅎㅎ
그때가 생각 많이 납니다.

꼭 응답하라!! 같아요^^
좋은추억인듯싶어요^^

그때 이야기와 다를바 없습니다.
시간상으로도 그렇구요..ㅎㅎ
사진을 보니 새록새록합니다.

당시의 여행이야 말로 가장 낭만적이고 멋진.... 거칠것 없는 여행이였을것 같습니다. ㅎ

딱 거칠것 없는 여행이 맞는듯 해요. 낭만적이고 멋지다는 건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그랬었다는걸 알고있죠..ㅎㅎ

옛 기억을 어쩜 그리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는 지....
뇌 용량이 엄청 날 듯^^

생각나는 부분만 정리한거죠..ㅎㅎ
도무지 생각 안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슬쩍 건너뛰기...ㅎ

저희때는 미성년에게 술 판매가 가능했었죠.돈이 없을땐 순대골목에서 가볍게 한잔.....ㅋㅋ 지금이면 말도 안되겠지만요.교련복도 오랜만에 보네요^^

아, 교련 세대라는게 들통이...ㅋㅋ
술집가서도 민증 안까고 술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 많이 각박해졌네요..ㅎㅎ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기타보니 아주 오래전 여행인 듯합니다.

고3때니까요.. 그러니까,,음 수십년전??

ㅎㅎㅎㅎㅎ
사진을 찍을때..
모여있지 않고 흩어져 있는 사진 첨 봐요 ㅎㅎㅎㅎㅎ

그거,,,,ㅋㅋ,,,, 나름 설정샷이에요.. 멋있어 보이라고...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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