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그리다) 순례로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채식 알베르게, 그리고 맨발의 순례자

in tripsteem •  1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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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우린 마을을 여기저기 구경하고, 시장도 둘러보고, 볼것도 많이 보고, 마지막 들른 바에서 맥주를 한잔씩 하고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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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마을은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다.
알베르게는 옛날 집을 잘 가꾸어 놓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옛날 집의 형태도 보존이 되어 있고, 여기 저기 예쁘게 다시 인테리어를 한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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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부부처럼 보였는데, 여자도 남자도 아주 조용조용 말을 하고 친절했다.
집 가운데는 해가 잘 드는 뜰이 있었는데, 다른 때 같으면 뜨거워서 잘 앉지도 않았을텐데, 오늘은 날이 쌀쌀해서 따뜻한 햇살이 좋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음악도 힌두 음악같은 요상한 음악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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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날은 내가 여행 중 겪은 가장 마음이 약한 날이었다.
우선 베드버그에 물린 것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사람들 얘기로는 벌레에 물린 곳의 독이 점점 퍼진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음 벌레에 물리고도 두어번 더 벌레에 물린 것 같다.
오늘도 전에는 괜찮던 손가락 발가락 같은 데가 자꾸 가렵고, 전에 물린 곳도 점점 가려워지고 있어서 아주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게 추워진 날씨가 나를 더 우울하게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짐 중에는 긴팔 옷이 없다.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2주 동안 걷는 내내 낮에는 30도를 넘었고, 밤에 숙소에서 잘 때도 더워서 땀띠가 일어날 정도였다.
긴팔 옷은 입을 일이 없으니 그건 언제나 짐이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긴팔 옷을 모두 버렸다.
그러니 예상하지 않던 추위가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며칠 전에 산 우비를 임시방편으로 입고 있었지만 우비라 그런지 바람이 전혀 안 통했고 그래서 매우 답답했다.
설상가상으로 몸은 으실으실 추운데, 우비 때문인지 미열이 나서인지 식은땀이 자꾸 나서 베드버그에 물린 곳이 더 가려웠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고, 쓸쓸했다.
날씨의 변화가 감정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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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은 알베르게는 평점도 매우 높고, 주인도 매우 좋고, 시설도 예쁘고,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 좋았지만 내 기분은 왠지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이럴 때 포도주를 반병 정도 먹으면 취기가 올라 기분도 좋아지고 할텐데, 이날은 포도주를 한잔만 마셨는데도 열이 올라 몸이 더 가려워졌다.
대책이 안서게 슬펐다.
밥 먹기 전에 의자에 앉아 쉬다가 괜히 설움에 복받쳐 엉엉 울었다.
내가 이러니 남편도 별 의욕이 없는지, 이날은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다.

저녁은 공동 식사를 대접해주는데, 음식이 매우 특이했다.
스프도 고수향과 생강향이 나서 난 잘 못 먹었지만 남편은 맛있다고 세 그릇이나 먹었다.
빠에야도 그동안 먹은 해물과 치킨에 샤프란으로 맛을 낸 빠에야가 아니라 버섯, 양파, 당근, 가지, 시금치같은 채소 등이 들어간 야채 빠에야였는데 정말 독특한 맛이었다.
뭐랄까 조미료 없이 재료 본연의 맛을 낸 정성어린 밥상이랄까?
아마도 채식주의자 식단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때 같이 저녁을 먹던 독일 여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채식식단만 찾아서 다니는 채식주의자였다.
그러니 아마도 이 알베르게도 그런 식단을 제공해주는 곳이어서 그 독일 여자도 여기에 묵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음식에서 정성도 보이고, 맛도 참 좋았다.
그런데도 이날만은 그 무엇도 내 기분을 전환시켜주지 못했다.
정말 특이한 알베르게였는데, 음식 사진도, 함께 식사를 한 순례자들과 찍은 사진도, 그 집에 있었던 멋진 커다란 강아지 사진도 한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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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을 때 우리와 같이 앉았던 분은 아주 특이한 분이었다.
복장은 옛날 순례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수도회에 소속된 사람인 듯하다.
같이 저녁을 먹은 사람은 열두명 정도였는데,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조금 조용한 편이었는데, 이 순례자만 아주 기분이 업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이름을 주욱 물어보고, "My name is Father joyful."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아마도 "난 날라리 사제야."라고 소개한 듯한데, 아무도 안 웃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과장된 표정으로 재미있는 얘기를 하려는 조이플에게 아무도 호응을 해주지 않아서 흥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나도 평상시에는 항상 기분이 업되어 있는 사람이라서, 내가 기분이 오늘같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많은 이야기를 조이플과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컨디션이 산티아고를 걷는 중 가장 안 좋은 날이어서 이날은 크게 리액션을 해주지 못했다.
조이플은 이날 이후에 다시 만나지 못해서 두고두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남편이 조이플과 와인을 두병이나 마시면서 응대해 주었다.
남편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에 많이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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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맨발로 순례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정말로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나중에 이맘 때 같이 걸은 사람들의 페이북에서 조이플의 사진이 종종 등장할 정도로 그는 눈에 띠는 복장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제였다.
이 사진도 독일 친구 옌스의 페이스북에서 가지고 왔다.
그는 우리보다 하루이틀 뒤쳐져서 걷고 있었다.

지금도 이날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진다.
이유없이 그런 날이 있는데, 이날이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이 글은 2017년 6월 10일부터 7월 8일까지 산티아고 길을 걸었던 우리 부부의 찬란한 추억이 담긴 글입니다. 사진은 대부분 남편(@lager68)이 찍었습니다. 글은 제가 썼는데 많이 미숙한 글입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산티아고를 그리다) 순례로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채식 알베르게, 그리고 맨발의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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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축 처지는 날, 그 느낌 상상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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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한두번 있는 그런 날인데, 딱 저날이 그랬네요.ㅜㅜ

요즘처럼 먼지가득한날 상쾌한 까마노 걷고싶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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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미세먼지가 최악이더니, 어젯밤부터 내린 비에 대기가 조금은 깨끗해졌습니다.
오늘은 숨은 쉴 것 같아요.^^

여러날 객지에서 걸었으니 병이날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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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걷는 동안 이날이 컨디션이 제일 안 좋은 날이었어요.
하지만 딱 하루.ㅋㅋ

벌레와 갑자기 낮은온도 같은 예상치못한 요인 등 으로 기분이 쳐질때가 있어요. 저는 이럴땐 벗어나기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요즘 미세먼지도 너무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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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환경으로 사람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것이 참 신기해요.
미세먼지는 우울감 정도가 아니라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수준같습니다.ㅜㅜ

땀 흘린 후에 맥주 정말 맛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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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맛있는 맥주도 안 마신 날이네요. 이날은...
여행엔 변수가 항상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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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라리 사제라고 소개하시는 사제분이 너무 유쾌하네요~
요즘 보고있는 열혈사제 드라마가 생각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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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드라마도 있나요?ㅋ
요즘 드라마의 분야가 참 다양해졌어요.ㅋ

이런날이 한번씩있죠~ 컨디션만 좋았다면 조이풀과 추억하나 만들고 오셨을텐데!!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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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평소의 저와 잘맞는 감정선을 가진 신부님이셨는데 말이죠.ㅋㅋ

와우~ 저분 꼭 간달프 같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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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흰수염이 그런 느낌도 있네요.ㅋ
제가 반지의 제왕같은 환타지물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라서 영화를 보고도 기억은 잘 안나지만, 간달프 이미지는 기억나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