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떠난 여행의 완벽한 마무리

in #stimcity4 years ago (edited)

"프라하에서 연락을 하세요. 전화를 걸어 당장 여기로 오라고 으름장을 놓든, 메일을 보내든. 젠젠님은 프라하에 가야만 하고 거기에서 완전한 끝을 맺어야만 합니다."

갑작스러운 크루즈 여행 제안의 끝에 마법사님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했다. 크루즈 여행을 가는 것도, 과거를 향해 서쪽으로 여행을 하는 것도 다 수긍이 됐지만 이미 헤어진지 2년이 넘은 전남친에게 연락을 굳이 하라는 건 수긍도 안됐고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2년, 쉬지 않고 임신을 했다면 2명의 애가 있을, 전문대를 입학했다면 졸업을 했을, 핸드폰 약정이 끝나 새 핸드폰으로 갈아탈, 정도의 시간이 아닌가. 이제와서 연락해서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왜 하라는 건가?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그러겠다고도 그럴 수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왜 하필 프라하냐면 헤어지기 2달 전 나와 H의 여행이 '프라하'를 가운데에 두고 갈라졌기 때문이다. 2주 간 스페인을 함께 여행한 후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한국에 가야했고, 회사를 관둬 시간이 많았던 H는 늘 가보고 싶다던 프라하로 발길을 달리했다.

"그 여행을 함께 했더라면 둘은 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가정이었지만, 일리는 있었다. 나 없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로 H는 꽤 들떠보였고 다시 돌아온 지리한 한국에서, 잠깐의 이별 앞에 울고불며 애틋한 카톡을 보내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끝난 사람에게 그것도 2년이나 훌쩍 지나 연락을 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프라하는 내게 그리 좋지 못한 기억이기에 왠만하면 가지 않고 싶었다. 2004년, J와 함께한 33일의 유럽여행에서 프라하로 오기 바로 전 민박집에 카드를 두고와 살면서 가장 가난한 여행을 했던 곳이 바로 프라하였다. 제대로 된 맥주도 식사 한 끼 못하고 주린 배를 부여잡고 바라 본 까를교 다리는 왜 그렇게 칭송받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우리는 입모아 말했다. 우리는 다리를 다 건너지도 않고 중간에서 사진만 한 장 찍고 방으로 돌아와 얼은 몸을 녹이고 잠을 청했다. 프라하에는 조금의 추억도, 좋은 기억도 없었다.

크루즈 여행을 하며 바다 위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크게 웃고, 자주 취하느라 '프라하'에 가야한다는 사실을 대부분 잊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끔씩 저주처럼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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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프라하

유럽을 돌고 돌다 결국 나는 프라하에 갔다. 다시 찾은 프라하는 그럭저럭 낭만적이었고 코젤 맥주는 먹을만 했고, 카프카는 반가웠고, 노랗게 물든 까를교도 볼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프라하가 엄청나게 좋아지진 않았다. 내가 평생 프라하를 사랑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끝까지 고민을 하고 미루고 미루다 떠나기 직전에 메일을 썼다.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고 오래 붙들려있던 상념은 그리 길지 않은 몇 개의 문장이 되었다 . 그리고 2년 2개월 만치의 그리움, 2년 2개월 만치의 슬픔, 2년 2개월 만 치의 미움 같은 게 담긴 H와의 여행기를 워드로 첨부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로가는 버스 터미널에서였다. 그 때 난 길 위에서 만난 좋아하는 남자애를 보러가는 길이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방금 막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처럼 나는 엉엉 울었다.

아파도 도달해야만 하는 지점을 기억하는데
나는 자꾸만 때를 미루고 있습니다.
치과나 병원이면 이렇게 미루지 않았을 겁니다.
차오르다 차오르다 뚜껑만 닫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됩니다.

<나는 바다가 채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같다 中 이원하>

진작했어야 할 일이었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시원하게 쏟았고 물 한방울 남지 않게 탈탈 털었다. 후련했다. 하지만 메일을 읽는 H를 상상하며 얼마 간 지속될 이불킥은 여전히 나의 몫이었다. 근데, 정말 기묘하게도 나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보낸 걸 확인했지만 나의 보낸 메일함에 그 편지는 없었다. 사라진 것이다. '펑' 하고 어디론가. 그렇게 나는 부끄러움 없이 조금의 찌끄레기도 없이 이별에 도달했다. 완벽한 마무리였다.

즐겁고도 위태로운, 스페인 그라나다
https://steemit.com/tripsteem/@zenzen25/tt20181004t170959700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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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2년만에 후편이 ㅎㅎ
프라하...
발에 열이 많은 늘 샌달신는 제가 거의 난생처음 발이 얼것 같았던 까를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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