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술] 타파스바, 내가 그라나다에 살고 싶었던 이유

in #stimcity3 years ago

솔직히 술꾼 중에서 안주빨을 미친듯 세우는 사람은 없을 거다. 술먹기에 바쁜데 안주로 배를 채울 여유가 대체 어딨냔 말이다. 말하자면 안주는 술을 덜 취하게 만들기 위한 안전장치자 술을 오래 마시기 위한 여흥 같은 거다. 마실 것과 음식의 궁합을 마리아주라고 한다. 일본 만화 <와카코와 술>에서는 매일 술을 마시는 와카코가 늘 다른 안주와 술을 조합해 먹으며 행복해한다. 나 역시 피트 위스키에 굴, 화이트 와인에 감바스, 막걸리에 김치전, 맥주에 튀김 등 뻔한 공식을 이용하기도 하고 우연히 시도한 나만의 마리아주, 예를 들면 와인에 블루베리 치즈케익이나 꿀술에 멍게 같은 조합을 즐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음식들은 결국 술을 맛있게 먹기 위한 배경이자 술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불과하다. 그다지 안주에 집착하지 않기도 하거니와 배가 부르면 술맛이 뚝 떨어지기에 무거운 안주를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에 살면서 가장 싫은건 '가벼운 안주'가 존재하지 않는거다. 물론 배가 부르지 않는 오징어니 황태니 건어물류를 팔긴 하지만 만오천원에서 이만원을 육박하는 가격으로 보건대 절대 가볍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오천원에 사시미 10조각이 나오고, 접시에 수북한 해산물 샐러드가 나오는 걸 보고는 질투심에 휩싸였을 정도이다. 오천원짜리 안주 하나에 사케 한 병. 소주 한 병은 거뜬히 먹을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안주가 우리나라엔 없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오천원짜리 신선한 안주란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동물같은 거다. 술을 마실 때 안주는 필요하지만 비싸거나 배부른 건 먹기 싫은, 하지만 술을 돋보이게 할 맛있는 안주를 먹고 싶은 모순적인 나에게 그라나다는 완벽한 곳이었다. 타파스 문화 덕분이다. 타파스는 스페인에서 식사 전에 술과 같이 곁들여먹는 작은 음식을 말한다. 타파스의 타파는 '덮다'. '가리다'는 뜻을 지닌 타파르에서 왔다는데 가장 흔하게 먹는 타파스가 빵 위에 각종 요리를 얹는 형태여서 그런 듯 하다. 스페인에 다른 지역에서는 이 타파스를 돈을 주고 지불해야하지만 그라나다에서는 음료를 주문하면 타파스를 무료로 준다.

10년 전 와봤던 그라나다에 다시 온건 온전히,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4년째 살고 있는 친구 S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때 당시 나는 작은 마케팅 회사에서 일한지 4년 차였는데 일해본 중 가장 길게 회사 생활을 이어가는 중 이었다. 20대 때 마트에서 딱딱한 빵을 턱아프게 먹던 유럽여행에서는 배불리 무언가를 먹어본 적도 없었고 외식도 많이 하지 못했기에 그라나다의 타파스 문화를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 번 여행에서는 현지인과 다름없는 나만의 가이드의 안내 하에 온갖 종류의 타바스바 투어를 할 수 있었다.

"집에서 요리해 먹는 거 귀찮아서 타파스바에서 저녁 많이 떼우곤 해"

4년 간의 생활에서 S가 축적한 타바스바 리스트는 실로 방대했다. 나는 S를 따라 이름도 모르고 위치도 모르는 타파스바를 헤집고 다녔다. 아무 것도 검색할 필요도, 길을 찾느라 구글 지도를 켜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기에 지금까지 내가 했던 술투어 중 가장 편했던 여행이기도 하다. 도심 외곽으로 으쓱한 길을 30분 정도나 걸어 도착했던 허름한 타파스바는 맥주 한 잔을 시키니 신선한 새우로 만든 새우구이를 내주었다. 입 안에서 팡팡 터지는 새우즙과 탱글한 속살은 바다의 풍미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길가다 어디를 들어가 맥주 한 잔을 시켜도, 콜라 한 잔을 시켜도 다양한 타파스를 먹을 수 있었다. 여전히 그렇지만 지금보다도 더 와인을 잘 모르고 거의 마시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저렴하지만 농익은 스페인 와인에 홀딱 빠져 대부분 레드 와인을 주로 마셨다. 비싸지 않은 와인 한 잔을 시키면 자른 바케트 빵에 고기나 치즈, 야채가 올린 타파스나. 하몽, 치즈, 스페인식 감자오믈렛인 또르띠야, 올리브 기름에 익힌 문어와 감자. 오징어튀김, 식초에 절인 올리브, 감바스 등등 양은 작지만 맛은 돈주고 파는 안주라고해도 손색이 없는 다양한 종류의 타파스가 나왔다. 음료를 한 잔씩 마실 때마다 타파스는 매번 바뀌는데 술을 워낙 많이 마시기도 하지만 다음 타파스가 뭘지 궁금해서 평소보다 더 많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포레스트 검프에 이런 명대사가 있다. "엄마가 늘 말씀하시길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거라고 하셨어요. 어떤 초콜릿을 먹을지 모르니까요." 나는 초콜릿 상자에서 어떤 맛 초콜릿이 나올지 모르는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늘 다른 타파스를 기다렸다.

이제는 S의 남편이 된 N을 처음 만난 곳도 타파스바였다. N을 소개받기 위해 간 타파스바는 그동안 갔던 곳과 달리 좀 더 격식있고 인테리어도 화려한 곳이었다. 와인도 평소에 먹던 것보다 비싼 걸 시켰다. 타파스의 퀄리티도 훨씬 뛰어놨다. 파스타나 고기 등 음식 가격만으로 몇만원이 나올법한 그런 요리였다. 어색함도 잠시 맛있는 와인과 타파스를 먹으며 우리는 금세 웃음꽃을 피우며 대화를 나눴고 지금은 N 역시 나의 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일주일 정도 머물렀던 그라나다에서 나는 대충 세어도 10개도 넘는 타파스 바를 전전하며 다녔다. 안주를 공짜로 먹기 위해 술만 일주일 내내 퍼먹고 있으니 종국에는 간이 항복을 외치며 고통을 호소했다. 연속으로 술을 먹는 어느 날, 맥주를 몇 잔을 마셔도 쳐지기만 하고 흥이 나지 않아 일찍 쉬자고 입을 맞췄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시킨 와인 한 잔에 몸이 달구어지자 우리 둘 다 흥이 오르고 눈빛이 살아나 그 날도 멈추지 않고 취하도록 마실 수 있었다. 아무리 잦은 음주로 간이 헐어있고 지쳐있어도 '와인 한 잔'이라는 비밀코드를 입력하면 리셋이 된다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라다나의 타파스 문화가 좋아 그라나다에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어디 나뿐일까 그라나다의 타파스 문화는 술꾼이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아닐까? 술 한잔 시킬 때마다 다르게 나오는 작고 맛있는 음식이라니, 마리아주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더 더할나위 없는 행복일 것이다. 타파스바에서 술 한잔과 가벼운 음식 하나하나 마시며 쌓인 행복의 모래성은 비록 다음 날이 되면 스러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 먼 곳에서 오랜만에 만나 쌓은 이야기와 즐거움은 스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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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에 가서 삽시다! 아 타파스 가고잡다.

그라나다에 빨리 춘자인사이드 만들어서 살고싶어요!!!! 그라나다 살던 친구 말로는 요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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