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 일기 2021.11.6

in #stimcity3 years ago

벨기에 찰러로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나를 이탈리아 토리노 공항에서 루카가 맞아주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던 루카를 그의 고향에서 만나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그는 내가 유럽에 오는 날보다 1주일 먼저 토리노로 돌아왔다. 돌아오 건가? 어쩌면 그에게 토리노는 이미 고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여행자로서 코로나 상황을 버틸만큼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중간 기착지로서 잠시 머물러 온 것일 뿐. 나를 데리고 시내 구경을 시켜주는 동안 루카는 말했다.

"처음엔 있을만 했어. 왠지 다 낯설고 그래서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거든. 그런데 한 달쯤 지나니까 더 이상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더군. 모든 게 지루했어. 이 도시는 특히나 사람들이 지루해. 어떻게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지를 모르지. 사람들이 그저 집에 쳐박혀서 TV만 보거든. 오늘이 금요일 오후인데 저 차량 행렬을 봐. 저들은 즐기러 가는 게 아니라 집에 가서 밥 먹고 TV보다가 잠들거야. 정말 지루해."

루카의 집에 가서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일흔 언저리의 노부부는 인상이 참 좋으셨다. 루카의 준수한 외모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정중하게 나를 맞아주셨다. "빌리"라는 내 영어 이름을 루카가 소개하자 부모님 모두 자신들의 이름을 말씀하시는데, 친구 부모님의 이름을 소개 받는 건 문화적으로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후에 동네 바에서 와인 한잔 하고 루카와 이런 저런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의 친구 마르코가 차를 가지고 왔다. 가수인 마르코는 나와 루카를 차에 태우고 자신의 악기 수리를 위해 시내 악기점에 들렀다. 덕분에 다양한 악기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매장 한켠에 놓인 '노드' 키보드를 발견했다. 내가 유럽으로 떠나온 뒤 '20세기 소년' 지하에 나루 님을 위해 마련된 빨간색 노드 키보드와 같은 기종이 거기에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징조인가.

2.JPG

루카와 마르코는 금요일임에도 꽤 한적한 시내의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나와 함께 술 한잔 걸칠 공간을 찾아다녔다. 루카는 백신 증명서, 이곳 표현으로 그린 패스가 없기 때문에 아무 데나 막 들어갈 수 없는 사정이었다. 산책 삼아 밤 거리를 쏘다니다 가성비가 좋은 곳을 찾아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야외 테라스에 앉으면 그린 패스를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게 루카의 설명이었다.

"야외 테라스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을 봐. 그린 패스를 보여줘야 하는 실내엔 손님이 아무도 없어. 그런데 여기는 야외라서 그냥 앉을 수 있어. 이거 참 우스운 거지. "

규칙이란 게 그런 거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야기하는 규칙은 더 많은 사람들의 편법에 의해 무시된다. 그걸 두고 사람들의 편법을 비난하는 건 타당할까? 아마 한국의 뉴스는 비난할 것이다.

나는 와인 한 잔과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금세 취했다. 마르코가 모는 차 안에서부터 꾸벅꾸벅 졸다가 루카의 방에 나를 위해 놓여진 간이 침대에 몸을 부렸다.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정신없이 잤다.

1.jpg

Sort:  

우리의 키보드는Stage3고 저건 Electro6이긴 합니다. 생긴 건 다 저렇게 빨갛구요.

그렇군요. 어쨌든 사진으로만 본 노드 키보드를 여기서 보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반가우셨을 텐데 제가 흥을 깨는 말을 해버렸네요.
https://steemit.com/kr-diary/@kmlee/6vdvj4
이 글이 생각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3
JST 0.028
BTC 65353.50
ETH 3202.07
USDT 1.00
SBD 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