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 일기 2021. 10. 9

in #stimcity3 years ago

10월의 프랑스 북부 가옥에 있자니 벌써부터 발이 시렵다. 여기는 바닥 난방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싶지만 실내가 전체적으로 너무 춥다. 이 사람들도 분명 실내열을 보관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알텐데, 내가 그 노하우를 알 턱이 없다. 생각해보니 위도상으로는 여기가 한국보다는 한참 위에 있는 건 사실이다.

내겐 습관성 겨울 우울증이 있다. 날이 추워지면 어김없이 우울감이 찾아온다. 지난해 겨울에도 제주도에선 멀쩡한 기분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곤두박질쳐 결국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릴의 가을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9월에 비하면 10월 초 날씨는 급격하게 차이가 난다. 일단 비가 잦고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다. 20세기 영화제 상영작 리뷰를 다 마치고 10월로 접어들면서 한 일주일은 급작스러운 우울감 때문에 자기 통제가 쉽지 않았다. 낮에도 와인을 마시고 취해 있는 날이 많았다.

여기 사는 나의 동지 최승희 씨를 한국 식당에서 만나 돌솥 비빔밥을 시켜 먹으면서 이런 내 심리 상태에 대해 토로했다. 그녀의 처방은 두 가지였다. 첫째. 혼술을 끊을 것. 둘째, 전기 장판을 살 것. 그리고는 이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전기 장판 리스트를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으아니. 프랑스까지 와서 전기 장판이라니! 어쩐지 전기 장판은 보일러 고장난 사글세 집의 미봉책 같은 이미지라, 나로선 흔쾌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다행히 온수는 나오니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족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나 심상이 약해질 때마다 자꾸 술로 도망치려 하는 게 현명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새겼다. 술에 관한 한, 낭만적 정당화도 많이 했다. 이를테면 타나토스가 강해지니 몸이 자꾸 알콜을 갈구한다는 식의. 그러다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떠난 잭슨 폴록이라도 될 수 있다면 몰라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천재는 못된다.

그러니 몸과 마음을 추스려야 한다. 세상의 모든 규칙이 단지 주어지는 것이여서 거부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순전히 나를 위한 규칙을 만들 수는 있다. 내가, 순전히 나를 위해 만든 규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규칙은 오염되었거나, 의지 박약이다. 그런 의지로는 뒷 동산의 나무도 자를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은 의지의 표상이라고 말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불행을 견딜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은 의지와 지성이라고 말했다.

그나저나 릴 도심의 한국 식당 불고기는 엄청나게 짰다. 케밥에 길들여진 프랑스인들 입맛에 맞추려고 했던 걸까? 간을 세게 하려는 주방장의 의지가 지나쳤다.

1 (1).jpg

Sort:  

정말로x3524524 겨울이 두렵네요. 따뜻한 전기장판에 들어가 있는 거 나쁘지 않은데요. 맛있는 것 먹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오늘 나루님 연주를 직접 못들어 못내 아쉽습니다. 하지만 화상으로 감상하겠습니다. 저는 뮤지션들에게 "멋진 연주를 부탁드립니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아요. 멋지게 느끼는 건 제 몫이고, 뮤지션은 진심을 담으면 되는 거니까요. 20세기 소년을 충만하게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구. 울컥했어요. 이것을 공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울 만큼(잘 해야 하니까) 겁을 내고 있어요. 느끼는 건 사람들의 몫이죠. 감사해요.

Coin Marketplace

STEEM 0.17
TRX 0.13
JST 0.028
BTC 56570.01
ETH 3028.13
USDT 1.00
SBD 2.29